1) 연합군
3차 이프르와 캄브레, 아라스에서 손실은 영국 전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년동안 거의 200만 대군을 동원하여 45만의 손실을 본 결과는
최종적으로 이프레 시 동쪽 겔루벨트 고지와 파스상달 능선을 확보하는데 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니벨 대공세 직후 프랑스가 직면했던 항명과 폭동의 위험은 덜 했지만
그 징후는 약간 나타나긴 했습니다. 에타플 훈련소에서 9월에 단기간 일어 났습니다.
하지만 겨울 내 전선에 영국군에게 이런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죠.
10월 이탈리아군이 무너졌다는 건 영국군에게 나쁜 소식이었지만 겨울에는 알렌비 장군이
투르크 군을 크게 이기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는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보트의 위협도 점차 극복하면서 영국군과 영국시민들의 물자난은 점차 해결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도 좋은 소식중 하나였습니다.
프랑스 군은 페텡의 지도하여 빠르게 복구되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페텡 스스로가 아직은 시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 자체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편 연합군의 희망 미군은 그 배치가 형편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917년 12월에 프랑스에 도착한
미군의 수는 겨우 4개 사단 그해 상반기에 참전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느리기 이를데 없는
전력 전개였습니다. 지금 최강국 미국은 이당시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거죠.
또한 미군 총사령관 퍼싱은 어느정도 미군이 독자적인 야전군을 편성하기 전까지 어떠한 전투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헌상태인지라 그해 봄에 재개될 전투 참가는 그때까지도 불확실했습니다.
또 다른 변화로는 영-프 군 간에 없었던 최고 컨트롤 타워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최고 전쟁위원회가
그것인데 그나마 장군들끼리 직접 이루어지던 조율을 이러한 기구를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1918년 전투에 큰 도움이 될터 였습니다.
(2) 독일
독일군에 있어서는 단기적으로 좋은 성과만 있었던 1917년이었습니다. 일단 러시아를 완전히 이겼습니다.
그래서 이 병력을 고스라니 서부전선에 모두 이동시켜 영프미 3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서부전선에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가 전투 이후 찾아낸 당시 최고의 전술 후티어와 연승을 자랑하던 최강의 부대 돌격대의 존재는
이 전쟁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독일에게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독일군 아니 독일 국가 자체가 토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봉쇄와 루덴도르프의 잘못된 경제 정책 때문에 만성적인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연료, 휘발류, 말, 고무 같은 전략 자원 부족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문제 였습니다.
- 독일국민과 독일군의 마지막 희망: 순무, 재배기간을 짧았기에 겨울에 많이 심어서 먹는 실정이었죠.-
독일인들은 거의 톱밥 섞은 빵과 순무로 겨울을 나고 있었지만 1917년~1918년 겨울을 더욱 잔인했습니다.
더이상 먹을 게 없었던 독일군은 이미 캉브레 전투에서 점령한 영국군 후방 물자 집적소를 장교들의 명령을 어기며
마구 약탈해와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다음해
봄 전군 규모로 나타나게 됩니다.
독일에게는 이 전쟁에서 유일한 희망은 1918년 봄 마지막으로 모든 걸 건 올일 밖에 그 탈출구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