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종종 부정적인 인식과 아픔의 역사로 서술되기도 하지만, 이 7년간의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화가 되어 무수한 이야기거리와 수많은 영웅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절정에 있는 인물은 바로 이순신이지만, 이순신 외에도 곽재우, 권율, 김시민, 사명대사, 유성룡 등의 조선 인물들, 심지어 가토와 고니시 등의 일본 측 주요 장수들까지 상당한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합당한 공을 세워 두고두고 회자되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김덕령 입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주요 인물 중 김덕령은 그 인지도에 있어 최고 수준에 있습니다. 김덕령보다 이름이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봐야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이순신, 권율, 유성룡이나 김시민 정도에 왕이었던 선조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괴력의 전사로서의 김덕령의 이미지,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의 이미지를 제외하고 그의 '전공' 을 생각해보면? 권율의 이치와 행주 싸움, 이순신의 무수한 전설들, 김시민의 장렬한 전투, 수많은 장수들이 기억나는 활약상을 가지고 있지만 김덕령의 전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조 55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9월 2일(정축) 3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의 전과에 대한 치계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馳啓)하였다.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이는 김덕령의 '전공' 는, 놀랍게도 실록의 기사를 전부 살펴보아도 오직 이 사례 밖에 없습니다. 전개를 보자면, 권율의 명령으로 김덕령은 2백여명의 병사와 함께 조선 백성 50여명을 납치해 가는 일본군을 공격했는데, 이들의 목을 단 하나도 베지 못했습니다. 일단 잡혀가던 사람을 모두 구출했으니 작전은 성공했지만, 아군의 전사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상황을 보면 복병을 본 일본군이 포로를 두고 달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적인 작전이긴 하지만, 용맹과 전설이 덧붙여질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끝' 입니다.
모양새를 제외한 '공적' 에 대한 언급 자체가 실록에서는 오직 이건 밖에 없습니다. 차분하게 한번 실록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선조 46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29일(무인)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국군의 동태와 김덕령에게 일면의 방어를 맡길 것 등을 아뢰다
(생략)그리고 김덕령(金德齡)의 군대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는데 기마병(騎馬兵)이 날래고 건장하여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다고 합니다.
김덕령이 군사를 처음 일으켰다고 나오는 1593년인데, 이때 조정에서는 "그 거느린 군사가 크다." 는 말은 나왔지만 특별히 이전에 전공을 세웠다는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선조는 김덕령에 대해 유성룡에게 물었고, 유성룡은 "나이가 28이다. 사실 잘 모르지만, 지략에 대해서는 들어본적이 없다." 라는 말을 합니다.
좀 더 뒤에서 비변사는 김덕령의 부대에 충용군(忠勇軍)이라는 호칭을 내리려고 하지만, 선조는 "아직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 않는가." 라고 하여 조금 비판적인 의견을 냅니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김덕령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정도 잘 알지 못하고 있고, 그만큼 김덕령이 뚜렷한 전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5일(갑신) 1번째기사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덕령은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갑자기 고관(高官)에 제수하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선전관(宣傳官)은 내신(內臣)이므로 서관(庶官)에 견줄 것이 아니니 우선 선전관에 제수하고 그대로 충용장(忠勇將)이라는 명칭으로 군대를 통령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공' 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이후 좀 더 분명하게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해가 1594년이니, 1594년까지의 김덕령은 별다른 전공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얼마 후 선조는 "김덕령이 단기로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데, 저 이름 높은 명장인 악비조차도 그렇지는 않았다. 호언장담을 하는것을 보니 크게 쓰면 안될것 같다." 며 의뭉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장 앞서 말한 '적을 죽이지 못한 전공' 은 이해 9월 입니다. 그때까지도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김덕령의 이름 자체는 이 시점에서도 상당히 유명해진것 같지만, 역시 전공은 없습니다.
그렇게 1594년도 가고 1595년이 됩니다. 1월 경 선조는 이항복에게 김덕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이항복은 "잘 모르겠다. 용력은 뛰어나다. 지려(知慮)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용렬하진 않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후 다음 달에는 김응남 등이 "장수 중에 오로지 이시언만이 김덕령이 쓸만 사람이라고 말하니 둘이 힘을 합치게 하면 어떨까." 라고 제안을 합니다. 여하간 1595년에도 별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렇게 1596년이 되었습니다.
1596년 1월 13일의 기사를 보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김덕령이 군령도 아니고, 관하(管下)도 아닌데 아무 이유도 없이 조선 사람 세 명을 때려 죽인 것입니다. 선조는 당장은 사면을 면했지만, 사헌부에서는 이 사건을 작지 않게 여겨 선조에게 죄를 줄 것을 요청했고, 선조는 "흉적이 있는데 용사를 벌 주는 것은 힘들다." 면서 반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신들도 의견을 나눕니다.
선조 71권, 29년(1596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7일(갑신) 2번째기사
조강 후, 제주 방어 조치와 주문의 내용, 충청 목사의 적임자 등을 논의하다
호민이 아뢰기를,
“김덕령(金德齡)이 살인한 일은 극히 놀라운 일이니, 대간이 논한 바가 극히 타당한 것으로 국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적의 진퇴를 아직 알 수 없고 나라의 성패 또한 헤아릴 수 없는 터인데, 이 때를 당해 하나의 장사(壯士)라도 잃는 것은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법을 맡은 관원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특별히 정국(停鞫)을 허락하고 형틀을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소서. 이것이 사람을 쓰는 활법(活法)인 것입니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평(指平) 이형욱李馨郁은 아뢰기를,
“덕령은 놓아줄 수 없는 중죄인이거니와, 일찍이 털끝만한 공로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를 완전히 석방하여 무장들의 방자한 습성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폐단이 장차 사람의 목숨 보기를 초개같이 여기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령의 살인은 실로 놀라운 일인데, 주현(州縣)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피살된 집 또한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 내려간 후에 비로소 계문(啓聞)하였으니, 방백(方伯)이 있다 할 수 있으며, 어사(御史)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대간은 의당 먼저 이들은 탄핵하여야 옳을 것이다.”
이 때의 반응을 보면 김덕령의 살인은 충격적인 일인 동시에, 이형욱 등은 "김덕령의 공은 털끝만큼도 없다." 고 말하였고, 이에 대해 유성룡이던 선조던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습니다. 1596년까지 김덕령의 별다른 전공은 보이지 않고, 김덕령이 임진왜란 도중 참살했다고 기록된 공식적인 숫자는 '일본군' 도 아닌 '조선 사람 세명' 뿐 입니다.
이후로도 그런 식으로 흐름으로 전개 됩니다. 이몽학의 난까지 말입니다.
조선은 고대에 비해서 기록이 풍부하고, 따라서 임진왜란 등의 사건을 실록으로만 판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기록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기록에서는 어떤가?
당시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김덕령의 공으로 언급되는 기록은 없고, 정작 이런 기록이 있는데,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라며 별다른 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견을 전혀 넣지 않고, 일단 되는대로 각종 문집과 야사등을 총합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경우에도, 곽재우나 정문부 정도의 군공을 김덕령이 해내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김덕령의 기록이 없지는 않은데, 대체적으로
용맹했다, 지략에 능했다, 가토가 두려워했네, 명나라와 왜국에서도 그 용맹함을 무서워했네 등등
그럴듯한 이야기만 잔뜩 있지만 실제 군사적인 공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신경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경우에, 애시당초 학술이라기 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거기서의 언급을 또 보면,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
뭔가 거창하긴 한데, 기본적으로 연려실기술과 다를게 없습니다. 명성이 엄청나고 적들이 두려워했네, 용맹했네, 이런 이야기는 있어도 구체적으로 대체 어떻게 적군과 싸웠고, 어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김덕령이 초창기에는 다른 의병군의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부모 문제로 낙향 후 독자적으로 재봉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장 시절에 올린 군공이 있고, 그것때문에 평이 좋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호남 출신 의사들을 기록했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서, 의녕에서 곽재우와 함께 적을 기습하여 적의 절반을 익사시킨 전공이 드디어 하나 나옵니다. 이게 적이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표목을 강 깊은 곳에 세워서 이들을 유인한 후 야습으로 전멸시킨 것인데, 그런데 적군 숫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김덕령의 명성은 그 자체가 신기루였던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임진왜란 당시의 김덕령은 손꼽히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의병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긴 했지만, 바로 이 김덕령이 의병을 모을 시 모인 숫자가 무려 5천여 명입니다. 그전까지 김덕령이 별다른 전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순전히 이름값의 힘으로, 그만큼 김덕령의 명성이 대단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어떠한 종류의 인지도' 라는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괴력' 입니다.
굳이 연려실기술 같은 야사 모음집을 보지 않더라도, 처음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부터
"신력을 지녔다."
"비호처럼 날래다."
이런 언급등이 보입니다. 이름값이라는것은 이 사람이 워낙 유명한 선비라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던가, 워낙 전과가 대단한 장군이라 주위에 모였다던가, 하는 부류가 있을텐데 김덕령은 그 두가지 모두 포함되지 못합니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참작하지 않고 마구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군사일기(撫軍司日記)》를 보았더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총통(銃筒) 3백 자루를 쏘고 있었더니, 왜적이 저절로 무너졌다. 」고 했다.’ 하였고, 또 ‘쌍무지개가 몸을 둘렀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항복이 아뢰기를,
“약간은 압니다. 담양(潭陽)의 금성 산성(金城山城)에 불끈 솟은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김덕령은 그 바위를 걸어서 넘기를 매우 경첩(輕捷)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고을 사람 20여 명이 목격한 것이라 합니다”
“신이 동궁을 배종하고 남하했을 때 호남 사람이 김덕령의 기이한 일을 극도로 말하니, 듣는 자는살피지 않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 진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상소를 올려서 유 총병(劉總兵)으로 하여금 철수해 돌아가게 하고 영남의 일을 오로지 김덕령에게 맡기려고까지 하였으나, 신은 그 위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옛 역사책속에 실린 관우(關羽)·장비(張飛)의 지혜와 용맹에 대한 일을 보아도 김덕령이 하는 바와 같은 것은 있지 않습니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조정이 사호(賜號)까지 하였는데 지금 이시언의 관하를 삼는다는 것은 사체에 부당하다. 나는 처음에도 믿지 않았지만, 이귀(李貴)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는 말을 감히 하였는가. 어찌 그럴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용력은 쓸 만하니,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인물이겠는가. 모름지기 영남·호남으로 하여금 군량을 계속 조달하여 군세를 도와서 장려해 쓰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이 언급을 보면 대략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김덕령 같은 경우는 "괴력" 등으로 이름을 날렸고, 상황을 보면 김덕령이 실제적으로 괴력을 가진건 확실하고, 다만 이게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과장되기도 하고, 추어올리기도 하면서
날라다닌다,
힘이 장사시다,
귀신과도 같은 재주를 부린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범이 나온다 -_-
는 식으로 조금 더 부풀어진것으로 보입니다.
즉 김덕령이 실제적으로 괴력이 있음 - 이게 이야깃거리로 퍼짐 - 난리통에 뭔가 대단한 인물을 기대하는 백성들의 심리 때문에 이야기가 커져 이게 조정 대신들에게까지 그런 이야기가 퍼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그런 점들 때문에, 실질적인 전과는 뭔가 그렇다 할만한게 없어도, 명성은 엄청나고
조정에서도 계속 주목을 하고, - 선조의 경우 몹시 궁금한지 끊임없이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어봅니다.
하여 실질적인 전공이 비해 위상이나 네임맬류도 대단하고...
다만 이런점도 있긴 합니다. 김덕령이 활동하던 시기가, 전선이 고착화되고 질질 끌어가기 시작하던 시점이라 일본군과 격돌하여 전공을 마구 세울 수 있던 그런 시기는 아니라는 게 있씁니다. 만약 제대로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엄청난 명망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건 결과적으로 기록으로는 일본군 병사 한명의 수급도 얻지 못했고...
나중에 이르면 김덕령 본인조차도, 이런 막연한 기대
- 잘 싸우는 장군이다 정도의 기대가 아니라, 무슨 도술로 적군을 섬멸하는 수준의 기대 -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체찰사(體察使) 윤두수(尹斗壽)가 장수를 보내 거제(巨濟)에 주둔한 왜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양사가 윤두수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당시 왜적은 해상의 8읍(邑)을 점거한 채 깊이 침입하지 않고 화평(和平)하려는 의사만 비치고 있었다. 두수는 군사가 피로하고 군량이 떨어진 데다가 화평은 기필코 이룰 수 없다 하여 매양 공전(攻戰)하자는 의논을 내세웠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 때에 이르러 중국 장수가 병력을 철수하여 견제(牽制)하는 바가 없자 두수는 우선 거제에 주둔한 적을 토벌하자고 청했는데, 그 장계에,
“승전하면 황천(皇天)이 우리 나라를 도운 것이요, 이기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조종(祖宗)에 떳떳히 할 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의 계책을 따를 것을 명했다. 이에 두수는 남원(南原)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휘하의 병사 수천 명을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거느리고 고성(固城)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는 한편, 도원수(都元帥)·통제사(統制使)·충용장(忠勇將)에게 거제의 왜적을 수륙(水陸)으로 협공하라고 전령하였다. 산의 요새지에 웅거하고 있는 적에 대해 제군(諸軍)이 배를 타고 거제도(巨濟島)에 들어갔는데, 김덕령(金德齡) 등이 용사(勇士)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적이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대니 덕령의 군사가 위를 향해 공격하다가 많이 탄환에 맞았다. 이에 선거이를 포함한 제장(諸將)이 모두 퇴각하니, 덕령이 대열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이에 앞서 국인(國人)들이 말하기를,
“덕령은 신용(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 와서 한 차례 시험에 공이 없자 변경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제군(諸軍)이 진격할 무렵 진주 목사(晋州牧使) 곽재우(郭再祐)가 덕령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정말 바다를 건너 적을 섬멸할 수 있겠소?”
하니, 덕령이 말하기를,
“이번 일은 나의 계책이 아니오. 굴(窟)을 점거하고 버티는 적을 난들 무슨 수로 제압하겠소.”
하자, 재우가 말하기를,
“장군의 명성이 온통 적경(賊境)에 퍼져 있으므로 적이 움츠러들어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소. 만일 지금 경솔하게 진격하다가 약세를 보이기라도 하면 위엄을 잃어 실책함이 클 것이오.”
하였다. 그리고 이내 원수(元帥)에게 치보(馳報)하여 그 계책이 옳지 않음을 말했으나 원수는 체부(體府)에서 이미 결정한 것이라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상황을 보면, 일본군이 요충지를 장악하고 위에서 총을 쏠 수 있는 환경이라 공격하기에 극히 불리한데,
윤두수가 싸우자고 주장을 해서 김덕령이 그런 지시에 따라 나가서 싸우는데, 당연히 상황이 안 좋으니 패퇴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멋대로
"야, 김덕령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이기지! 질리가 있겠어!"
이러다가, 극히 상황이 좋지 않아 별 재미도 못 보고 돌아온것을 보고
또 자기 마음대로 실망을 합니다.
저런 상황에서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자면, 아군의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은게 아니라면
김덕령이 사이오닉스톰 이라도 사용해서 일본군을 섬멸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런 상황에서 멋대로 말도 안되는 기대를 걸어놓고 패배하니까 실망하고,
김덕령 본인조차
"난들 무슨 수로 당하겠냐?"
하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다음은 이항복의 말입니다.
이항복은 아뢰기를,
“당초 조정이 너무 포장(褒奬)을 한 것입니다.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때에 주의를 시켰더니 그 역시 깊이 새겨 들었습니다.
다음은 선조의 말입니다.
“김덕령(金德齡)은 내가 잘 모른다. 당초에 사람들이 사실과 너무 지나치게 말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무능하다고 여긴다. 위명이 꺾이자 군졸들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나의 생각에는 비록 필부의 용맹이라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그는 한쪽 지역을 방어하게 할 만하니, 지금 전라 감사에게 하서하여 군병을 뽑아 보내 주기도 하고 또는 군량을 계속 공급해 주기도 해서 군세를 돕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처럼 해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종합하자면 김덕령이 활동하던 시기 자체는, 딱히 그가 아니더라도 큰 공을 세우기는 별로 좋지 못한 시기지만,
하지만 김덕령은 초반에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너무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명성이 퍼져나갔고,
앞서 말했다시피 별로 공을 세우기 좋은 시기도 아닌데,
너무 기대치가 말도 안되게 높다 보니
- 여기서 말하는 기대치가 지휘 잘 하는 장수 수준이 아니라 양 팔에서 범이 튀어나오고 하는 수준 -
역으로 실망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러한 '명성' 이 바로 김덕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반란 세력이 잡혔을때 아무렇게나 불어댄 이름이 김덕령이었는데, 필시 그가 유명한 인물이었던 점이 있었을테니 꼼짝없이 말려들어가고 만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김덕령은 고교시절 실적은 딱히 없지만 그 포텐션을 높게 평가받아 높은 드래프트에 뽑힌 유망주로, 데뷔 이후 성적이 그리 좋지도 못했지만 등판 기회도 부족한 상태에서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종료, 그 포텐셜이 계속 회자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생전이나 생후에나 상당한 과장이 되었다고 해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