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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9/19 06:24:46
Name 떴다!럭키맨
Subject [일반] 추석 아침에 쓰는 잡담
1.

얼마전 그녀와 전화를 했다.
남자 이야기였는데 이야기가 정리가 안됐다.
대충 어떤 남자를 신나게 욕하는 내용이였는데 포인트가 안잡혔다.
그래서 물어봤다.

'내가 헷갈려서 그러는데 그거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니 이야기로 이해해서 들으면 되지?'
'응 사실 내 이야기야.'

오케이 한방에 해결되네.

요컨데 그녀가 최근에 6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졌는데
지랑 헤어지자 마자 카톡프로필 사진 아기 초음파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그녀는 지금 멘붕이고 남자 이제 못믿을거 같고 아무튼 힘들어 복잡해 속상해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좀 뻔한가?


릴렉스 릴렉스...
뭐 이런저런 푸념 들어주는거야 한두해도 아니고...자그마치 십오년인데..
늘 그래왔던것처럼 그냥 이야기나 들어주고 욕할때 같이 욕좀 해주고 적당히 달래주면 될 거같은데 문제가 생겼다.

본인은 그녀가 6년간 꽤 깊게 교제했던 남자친구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
여기에 별거 아닌 문제점을 추가한다면 그 기간에 내가 여동생에게 고백했다가 까였다는 점?
그래서 다시 물어봤다.

'근데 잠깐! 왜 그동안 나한텐 말 안했냐? 남자친구 있었던거?'
'그런걸 오빠한테 어떻게 말해...'

'왜 옛날에 내가 너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지금도 계속 그런마음일까봐?'
'응 그런것도 있고...'

'너 남자친구 있다고 말하면 내가 뭐가 달라지는데?'
'응..뭐...미안해 잘살아...'

'하하..뭘 잘살아?
정말 더 이해가안되네 우리가 한두해 알고 지낸것도 아니고
내가 너한테 좋은감정 가졌었던것도 맞고 지금도 그게 남아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편하게 오픈하고 지냈으면 훨씬 편했을텐데 왜 말을 안한건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허탈했다 조금 생각을 해보니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녀와 나는 십년넘게 오빠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인거 아는데 그냥 짜증이 났다.
그리고 중간에 무심결에 나온듯한 잘살아..라는 말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에게도 짜증이 났고 웬지모를 나의 졸렬함과 비참한 기분은 날 쓰러뜨렸다.
늘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들이 임펙트 쎈 반전영화를 본 것 마냥 뒤끝이 남았다.

전화를 끊고 몇시간뒤 좀 찌질하고 쓰잘데기 없는 몇줄의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후회했다.
아 마지막까지 쪽팔린 모습만 남기는구나.

나를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꽤 길었던 인연을 여기서 접기로 했다.
이번엔 진짜 접히겠지?

잘살아...무심결에 튀어나온듯한 그 말의 의미가 아리송하다.
그 말 듣고 그냥 통화를 그때 접었어야 됐나?

그래 잘살게.
너도 잘살아라.




2.


얼마전 그녀들을 만났다.
작년에 시집간 품절녀 둘에 아직 시집안간 친구 하나 넷다 그렇게 친한건 아니다.
그렇게 친한건 아니지만 십년넘게 어찌어찌 서로 안부도 묻고 결혼식도 가주고 어쩌다가 한번씩 밥도 같이 먹는다.

약속장소에 유부녀 친구는 하나는 파주에서 두시간동안 버스타고 왔고
다른 유부녀 친구는 5개월된 애기를 데리고 역시 한시간 반넘게 전철과 버스를 타고 왔다.

그리고 친구 하나는 바람빠진 자전거를 20분동안 낑낑대며 타고왔다.
나는 버스타고 갔다 한 15분 걸렸나?

'음 나 미리 자수할게! 나 다음주에 수술함!'
'또?'
'음 뭐가 또야? 심장은 그냥 두번쨴대 뭐 자잘한거 여러개 했지만 그건 말 한적 없는데...아무튼 난 자수했다'

자수...
여기서 왜 나는 자수란 말을 썼을까?
사실 중학교 동창 그것도 여자동창들 모아놓고 수술한다는거 자랑스럽게 떠벌릴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라니깐...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 쪽팔리잖냐. 아 쪽팔려...


근데 여기서 끄적거리면 덜 쪽팔리나...에라이..


아무튼 바로 바람빠진 자전거를 20분동안 허벅지 터지게 타고온 이상한 친구녀석때문에 자수했다.


아마 3년전쯤 이 친구가 암으로 수술한적이 있었는데 수술받고 치료받던 기간동안 난 전혀 알지 못했다.
역시 그때도 그리 친했던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알고지낸 정이라는게 있는데...
수술하고 퇴원하고 좀 뒤늦게 알게되서 웬지 모를 90의 미안함과 10의 섭섭함에...

한 일년반정도? 한달에 혹은 두달에 한번씩 소설책이나 음반 귤 만화책 등등을 싸들고 문병을 가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으로 문병을 간건 아니고 그냥 동네 놀이터에서 잠깐 만나서 물건만 건네주고 얼굴 잠깐 확인하는 식
뭐 같은 동네 사니깐 별로 수고스럽진 않는데 좀 뻘쭘한건 있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의집에 가본적은 없다.
집앞에서 만난적은 뭐 십수번인거같긴 하다만...


'옆에 계신 이 분꼐서 그때 말도 없이 입원하고 수술했잖아?
그때 내가 이녀석 집앞으로 일년정도 책배달 다니면서 교훈을 얻은게 있거든...
나도 수술 말 안할까 하다가 웬지 이놈 생각이 나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더라고...'

'말 안했으면 넌 진짜 죽었지...'


글쎄 어떻게 죽인다는 걸까...
우리가 죽이고 살릴 사이는
음 ...아무튼 넘어가자



그 수술한친구와 나름 단짝인 친구가 처음듣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나도 그때 은혜가 수술하는거 전혀 몰랐어.
친구 아버지 병문안 갔었는데...환자복 입고 나랑 링겔 꽃고 병원 로비에서 마주쳤었어...'

'에? 그래? 나만 모르고 있던거 아니였어? 설마 너도 몰랐어? 니네 둘은 반쪽이잖아?'

'나한테도 말 안하고 들어갔어...나랑 만났을때도 이미 몇달동안 치료받고 있었던 땐대...'

'야이 독한...넌 맨날 반쪽 반쪽 외치는 친구한테도 말 안하고 들어간거냐?
난 또 나만 모르고 있었는줄 알았네. 그래서 혼자 괜히 미안해서 그렇게 책배달하고 간식배달한건데..
우씨  그래서 병원에서 만나서 뭐라고 했어?'

'저걸보고 뭔 말을해! 그냥 병원에서 두손붙잡고 그냥 한시간 내내 말도 못하고 울었지 저건 달래주고...'

이야기를 듣고있는 주인공의 표정은 해맑다. 해맑어.
아 뭔가 마음이 복잡 미묘해진다.

'나 음 그래도 살 많이 찌지 않았어? 보는 사람마다 다 살쪘다고..
아 그리고 얼마전에 제천국제 음악영화제도 다녀오고...
그 전에는 강릉 단오제도 다녀오고...'

'당연히 너 혼자지?'

'응 혼자! 요즘은 게스트 하우스 잘되있어서 여행다니기 참 좋아'


단오제가 보고싶어서 강릉에 가고..
발자국 찍어보고싶어서 강릉 경포대에 가고..
대전에 산호 여인숙 거긴 뭐하는데지?


뭔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뭔가 복잡미묘하다.

'난 너를 한 십오년 정도 보면서 진짜 꽤 오랫동안 연구를 하고 있는데
아직 샘플 나온게 없다 얼마를 더 알고 지내야 너랑 친해질까...'

'응? 그게 무슨소리야? 날 연구하고싶어?'

'응 말하자면 아 복잡한데...그냥 됐다...'

나도 한 혼자 놀기 한다고 자부했는데..
역시 세상은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이런걸로 왜 겸손해져야 되는진 모르겠지만..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너 좀 짱인듯


아무튼 그렇게 중딩동창들과 저녁을 먹었다.
근데 잠깐 화장실 다녀온사이 그 이상한 친구 녀석이 계산을 미리 해놨다.
내가 사줄라고 불렀는데 아 뭐지 이건...

내 수술 응원 겸
5개월된 아이탄생 축하겸
반쪽이... 아 몰라 복잡해.

그니깐 그걸 왜 니가 내는건데...



그리고 유부녀 친구들에게 살림에 보태라고 집에서 담근 간장 한병씩 나눠줬다.


파주 사는 품절녀와 인천송도 사는 5개월된 애엄마를 배웅해주고...
바람빠진 자전거를 질질 끌며 오랜만에 그녀와 걸었다.
무슨말을 했더라 기억이 안난다.


내가 말을 잘하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버벅대고 뱅뱅 돌려서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 친구랑 이야기하면 주제를 못잡겠다.
동족혐오라서 그런가 보다 둘러댔는데 이말을 하는것조차도 이상해보인다.


나중에 안 혼날라고 자수했는데 왠지 더 가슴한켠 찝찝해지고 무안한 기분은 뭘까


3.

추석끝나고 바로 수술이다.
그래 예정대로라면...
근데 입원날짜도 잡히고 수술 날짜도 잡아놓고 캔슬 됐다.
아니 잠정 연기 됐다 라는 표현이 어울릴려나...

병원에서 귀차니즘[?]때문에 청소년기부터 쭉 이십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소아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번 수술도 으레 소아과에서 맡기로 되있었는데..

수술회의에서 아무래도 연식이 이제 오래됐고 사후 관리 받을라면
일반 내과에서 받는게 좋지 않겠냐 하더니...
수술직전까지 담당해주던 담당의가 바뀌면서 모든 계획이 리셋되고 다시 첨부터 시작...
다시 검사하고 관찰하고 반응보고 날짜잡는데까지 빨라도 삼개월 아니 반년에서 일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이것들이 소리가 어쩌구 선이 어쩌구 할땐 언제고...

짜증 분노 황당...
거기에 쪽팔림까지...
나 왜 지난주에 친구들 만난거니...


물론 소아과 다니는게 내 나름의 소소한 낙[?] 이긴 했지만 그래서
분명히 몇년전부터 계속 여기 다녀도 상관없냐고 물어봤었는데...
수술 스케쥴까지 잡아주고 이제와서 까버리면 난 어쩌라고...
수술 못해서 안달한거같은 상태가 되버렸다.

아 쪽팔려...



추석이다. 지금은 아침 여섯시다
차례상을 차려야겠다.
아마 수술 들어갔으면 차례상 안지냈을거 같은데...
그래도 할머니 돌아가시고 처음 지내는 명절인데 밥한끼 차려드려야 손주한테 덜 섭섭하시겠지?
동생놈은 밤새도록 낚시 하다 와서 지난 밤 나한테 한소리 듣고 잔뜩 쫄아서 미안하다고 굽신거린뒤 잔다.

다 큰걸 팰수도 없고..
어차피 싸워도 내가 질테지만



추석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나이를 먹어갈수록 명절날 내 마음은 초승달이 되어가는거 같다.


언제쯤 보름달이 뜨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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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달빛능소화
13/09/19 10:08
수정 아이콘
좋은날 좋은글 잘 읽었네요.
나이가 먹을수록 친구란 뭘까 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듭니다.
추석 연휴 즐겁게 잘 보내세요~
13/09/19 13:56
수정 아이콘
이런글 너무 좋아요~
추석 잘보내세요!
singlemind
13/09/19 15:26
수정 아이콘
건강이제일이죠~
고로로
13/09/19 16:37
수정 아이콘
잘읽었어요 제가 좋아하는글이에요
가만히 손을 잡으
13/09/19 21:08
수정 아이콘
이런 소소한 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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