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기아의 우승이 SBS 캐스터의 무미건조한 단말마로 지나가고 난 2010년. 저는 전역을 했습니다.
군대라는 공간에서 저는 사이버 지식 정보방의 수혜를 어마어마하게 입은 부류입니다. 가격도 말년쯤 되자 슬슬 오르는 터라 군생활 내내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사회생활하는 지금보다 더 컴퓨터에 앉아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라는 공간에서 동떨어진 군대에서 저는 저보다 2살 많은 소대장에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덕력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 2009년. 스즈미야 하루히 애니메이션이 방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역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 코믹월드를 지배하던 아즈망가 대왕과 강철의 연금술사의 전성기가 죽고, 짭즈망가형 방목형 미소녀 4컷만화와 논문제목을 방불케 하는 길이의 제목을 가진 라이트노벨, 그리고 그들을 베이스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세상을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저의 덕세계에 지분을 차지하던 것들 - 마법진 쿠루쿠루. 마도물어. 빨간망토 챠챠. 리리카 SOS 등 - 은 원래 죽어있던 컨텐츠라 그러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 제가 다니는 커뮤니티의 주력이었던 투하트는 어느새 두꺼비가 울어대는 2편이 나왔고, 흡혈귀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이제 여자로 변신한 아더왕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부터 그렇게 저보고 워크해라 카오스해라 하던 친구들은 전부 제각기 자기 먹고 살 게임(...) 찾아 떠나갔습니다. 요새는 다시 한 점에 모입니다만...
여성 캐릭터의 특성은 단순한 단어가 여럿 늘어선 형태로 변했습니다. 아즈망가 대왕이 가져온 덕계의 혁명. 아즈마 키요히코는 이런 주문제작식 히로인의 대세를 만들고는 요츠바랑이라는 대작으로 슬쩍 빠져나갔더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즈망가 여캐들도 대단히 복잡한 인간군상이었습니다만 묘하게도 그 작품이 지나간 자리엔 모에가 화두로 던져졌고, 하루히로 증폭됩니다. 분명히 저희 삼촌은 메존일각 보면서 유부녀 모에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제 사촌동생은 신부이야기 보면서 아미르한테 저런 소리를 서슴없이 던져대고 있습니다. 제가 군대가기 전에 덕계 최고의 유행어는 대한민국 웹툰 절대지존의 에피소드 골방환상곡 8화의 엄친아였는데 전역하고 나니 Nice Boat가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친구는 방울토마토 먹을 때마다 무게가 다르답니다...
아무튼 그런 파란만장한 나날 사이에서 얻은 애니송 몇가지입니다.
오빠지만 사랑만 있으면 상관없잖아? - Self Produce
서두에 쓴 글의 뉘앙스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이런 류의 라이트노벨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세는 이런 애니메이션인데 정작 좋아하질 않으니 애니송에 접근하는 포인트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찾아낸 내 취향에 딱 맞는 노래가 라노베인 건 아이러니. 2010년 이후 제가 새로 구해 들은 노래 중 톱으로 꼽습니다. 한 순간도 빼지 않고 시종일관 사운드가 가득합니다. 단점은 아직까지는 이 노래를 부르려면 마네키네코에 가야 한다는 점. 키를 5개를 낮춰도 안되더라는 슬픈 전설.
슈퍼로봇대전 OG - 디 인스펙터 - 僕らの自由
슈로대의 바람직한(...) 애니화였던 인스펙터의 엔딩. 솔리드 박스가 지배하는 슈로대 보컬 라인업의 미사토 아키가 불렀습니다. 사실 전 미사토 아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고 딱 하나 아는 게 있다면 잼프와 함께 부른 추억은 억천만 라이브에서 혼자 동떨어진 실력을 드러냈다는 거 정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의미는 로얄 하트 브레이커 연출이었던 거 같습니다. 솔직히 다른 연출은 다른 로봇물에서도 얼마든지 한다고.
고스트 메신저 - No. 9
나가수 + 바람이 분다 크리로 한국에서 가장 가사 잘 쓰는 여자 타이틀을 먹어버린 와우저의 노래. 고스트 메신저가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는 이제 덕후들에게도 잊혀진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 때 루리웹 그림게를 휩쓸던 바리공주의 인기는 민국엄마 비스무레한 결말이...
개인적으로 돈이 많아서 애니에 돈을 쓴다면 위대한 캣츠비 애니화에 쓰고 싶습니다. 뭐 어차피 상상인데 어디엔들 못쓸까마는.
신세기 GPX 사이버포뮬러 - Soul of Rebirth
석기시대 유물인 사포입니다. 거기다 이 노래 자체는 21세기 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었고 노래 구성이 단편적이라 1절만 대충 듣고도 노래방에서 원없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럼에도 2010 이후의 노래에 올린 이유는 바로 2010 이후에 친구의 추천으로 오프닝 풀버전을 봤기 때문에. 풀버전을 들은 것도 처음이거니와 스토리도 눈치채면서 오프닝을 보고 나니 확실히 처음 들었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에바의 아스카나 이쪽 아스카나 성격은 달라도 외모나 스펙이나 왜 이렇게 우월하게 만들어놨는지.
여담으로 친구는 이 애니를 이 만화는 봐도 덕후 소리를 안듣기 때문에 추천했습니다. 이미 늦었지 뭐...
파이널 판타지 TYPE 0 - ゼロ
ゼロ from Wisteria on Vimeo.
제가 J-pop을 들으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인 Bump of chicken의 노래. 테일즈의 카르마 때 너무 만족했던지라 '범프 신곡 안나오나' 하면서 기다렸던 보람을 또 충족해 주었습니다. 가사는 애초에 일본어를 모르니 스포당할 일이 없고...
제 노래소리는 원래 본 조비의 One Wild Night을 부르기 위해 목을 억지로 긁었었는데 그러고 나니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도저히 부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기존의 노래소리를 바꾸려고 노래방을 한동안 피해다니면서 기존의 노래소리를 잊고 새로운 노래소리를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목이 빨리 쉬는 건 변함없지만 지금의 노래소리가 더 범용성이 좋고 bump 노래 외에도 평소에 부르고 싶어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부르지 않았던 노래에 싱크로가 잘 맞아 만족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뭐가 바뀐지 모르겠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