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이그 원수
보통 1917년 11월에 시작된 캄브레 전투는 3차 이프르 전투와 전혀 별개의 전투로 언급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헤이그의 생각은 이 두 전투는 연동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당시 헤이그의 생각은 아주 심플했습니다. 우리가 얼마가 죽던지 내년 있을 독일군 대공세에 참전할 독일군
수를 줄이는 것으로 말이죠.그의 전임자 프렌치 장군(이름이 프렌치인데 프랑스를 싫어하고 불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장군)
은 전쟁 중반 자기가 첨 데려온 영국 대륙 파견군(BEF) 숫자만큼 전투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니 울었다는데
헤이그는 그런 면에서 아주 프렌치와 다른 마인드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적을 위해 얼마가 희생되도
눈감을 수 있는 인간 부류 였죠. 하지만 이런 인성과 다르게 조직능력이라든지 신기술 채용 등 능력에서 그는 탁월했습니다.
특히 처음에 그는 전차를 장난감으로 여겼는데 솜므에서 이 물건의 장점을 바로 눈치채고 적극 채용합니다.
그리고 총류탄이나 박격포를 근대화 시키는데 큰역할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출세욕에 불타며 재수 없고 짜증나지만 능력을 인정 받는 직장 상사의 전형이었습니다.
아무튼 3차 이프르 전투에서 10만 정도 그의 생각보다 영국군은 덜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래서 이 10만을 동원해서
독일군을 좀더 소모 시킬 방법을 생각해 내는데 이게 바로 이프르 동쪽 영국군 제3 야전군이 맡은 지역에서 일련의
공세를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게 통칭 캄브레 전투 혹은 1918년 있을 전투를 염두에 둬서 1차 캄브레 전투라고 부르는 전투 였습니다.
2) 영국 3군 사령관 줄리안 빙의 전략
이 시기 영국군 3군은 줄리안 빙 장군의 지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영국에서 죽은 장군이었지만
전쟁 내내 캐나다 군을 자주 지휘했습니다. 전후 그 인연 덕에 캐나다 총독을 있었으며 캐나다에 학교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와 캐나다 군은 1917년 봄에 있었던 아라스 전투 중 하나인 비미 능선 전투에서 대단한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 빙 장군
- 알랜비가 주도한 공세의 조공으로 시작된 비미 능선 전투는 잘 구성된 포병전술을 통해 만명의 사상자 끝에 능선 위의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라스 전투 자체는 패전. 하지만 빙은 이공으로 3군 사령관으로 진급했습니다.-
그는 아주 보수적이고 무능에 가깝던 영국군 장군들 중에 혁신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능력면에서 유능에는 조금 아쉽운
부분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정적 고프 같은 무능아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캄브레 전투에 접근하는 방벙은 헤이그가 원했던 좀 무식해 보이는 소모전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다음 대전에서의
독일군과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즉 그는 사령관이 의도하는 소모전 보다는 기동전에 의한 포위섬멸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방 전선 두 부분에 집중공격 후 구멍을 낸 후 기동력이 좋은 전차와 기병을 통해 상대 후방을 무너 뜨린 후 독일군 후방에 위치한
캄브레와 독일군 전선 사이를 분리 시켜 포위 섬멸 시킬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독일군의 전선에 어떻게 구멍을 뚫느냐가 역시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게 가능했으면 전쟁이 3년째 이렇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영국군 2군 사령관 플러머나 독일군쪽은 소규모 잘 훈련된 선봉부대에게 이 역할을 맡기기로 되어 있었지만
빙이나 이시기 이집트에 좌전되었다가 일약 오스만 군을 물리친 영웅이 된 앨런비의 입장은 새로운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빙이나 앨런비 둘다 기병 출신이라는 점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바로 그 신무기란 그전 전투에 빈번하게 사용하였으나 성과는 형편없었던 바로 그
[탱크]였습니다.
이런 전과의 원인은 일단 느렸고 방어력도 소구경 속사포 직격에 나가 떨어질 정도로 방어력은 형편 없었으며
기계적인 신뢰도가 형편 없었다는 기술적인 문제에 있었습니다. 물론 다음해 나올 영국군 위핏이나 프랑스 군의 명작
전차 르노 정도 되면 이문제는 많이 개선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로는 전혀 이 물건에 대한 전술이 없었습니다. 그냥 이 시기까지 그냥 3~4 대 정도 필요하면 불러서
쓰다가 적 지뢰나 포 맞으면 알아서 대충 못쓰게 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럼 보병은 다시 적 화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빙의 경우 나름 이 물건의 사용법을 알아 냈습니다. 탱크 수백대를 집중 운용하고 보병은 탱크와 같이 작전하는
초기적인 기보작전을 훈련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선에서 유기적으로 포병지원을 받을 수 있게 무전기를 도입하여
보포기 연계 작전을 비록 원시적으로 이 작전에 시도할 생각이었습니다.
- 어떻게 보면 1차 대전에서 무익한 피가 흐른 이유는 바로 통신의 미발달 때문인지 모릅니다. 장군들은 전황을 유선통신이
끊이면 전혀 몰랐고 하급 장교나 병사들은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훈련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1차 대전 후기로 진행되면 점차 무선통신기가 도입되면서 이 문제는 점차 개선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빙의
이런 각 병과 연계 작전은 유선 통신 하에서는 절대 시도도 못할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무선은 보조적이었고
중요한 건 유선선로과 유선전화기였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빙의 계획은 아주 선진적이었지만 성공 가능성은 이 전투가 시작되어야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