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있어서 늦게 올렸네요. 죄송합니다.
한 일주일은 연재를 못한 것 같습니다. 다시 열심히 연재할테니 재밌게 봐주세요.
지난 화들은
http://58.120.96.219/pb/pb.php?id=freedom&keyword=aura&sn=on 요기로 가주세요.
- - -
##
‘선배 있잖아요.’
연주와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째서? 의문을 가지며 집으로 가는 버스 차창에 기댄다. 텅 빈 버스와 어둑한 하늘 조명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생각 난 것일지도.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더 있다. 왜 하필 연주가 나를 부르던 그 장면만이 떠오르는 걸까.
“음.”
곰곰이 기억을 되짚는다.
“아!”
그러다 한 가지 생각나는 바가 있어 무릎을 탁 쳤다. 연주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뭔가 시원하지 못한 기분이었는데, 어쩌면 연주가 자신의 모든 고민을 털어놓지 못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진로문제만으로 연주가 그런 모습을 보였을 리 없었다. 확실히 연주에게 다른 문제가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앉은 상태에서 살짝 몸을 틀어 주머니에 틀어박혀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연주에게 미처 듣지 못했던 고민까지 들어주고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이현우 선배 맞죠?’
‘어? 선배! 저랑 같은 수업이었네요? 잘 부탁드려요.’
‘이 부분 시험에 꼭 나올 것 같아요. 별표 쳐놓으세요!’
‘힘내요. 만나면 원래 헤어짐도 있는 법이잖아요.’
연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내게 도움을 줬으니까. 막 복학한 선배가 어려울 법도 하건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같은 수업에서는 과제나 시험에 있어서도 도움을 줬다. 또, 힘들게 이별했을 때 말없이 들어주고 위로해줬다. 새삼스레 연주에게 많이도 빚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들은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막 연주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나는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에 그럴 수 없었다. 발신자에는 ‘소악마’라는 세 글자가 찍혀있었다. 소희였다.
“여보세요?”
-- 어디야?
비가 내리고 난 뒤 축축한 날씨 탓인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희의 목소리가 축 젖어있었다.
“집에 다와가. 왜?”
-- 그냥... 놀이터로 올 수 있어?
그제야 나는 단순히 소희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이 날씨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천하의 은소희가 이렇게 쳐져 있다니. 굉장히 낯선 소희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걱정이 들었다.
“어. 오 분이면 도착할거야.”
-- 응.
소희가 힘없이 대답하고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때마침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벨을 눌렀다. 연주에게 연락해 고민을 들어주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둔다. 솔직히 당장 연락해서 진짜 고민이 뭔지 다 들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힘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소희 쪽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버스가 멈췄고, 나는 왠지 모르게 드는 연주에 대한 미안함을 떨친 채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 입구에 도착하자 그네에 힘없이 앉아 있는 소희가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정말로 소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차례 비가 퍼부어 질척해진 놀이터의 흙바닥이 소희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을 한층 더 무겁게 만들었다.
“야 은소희! 혼자서 그네 독점하기냐!”
그러나 소희가 저렇게 쳐져 있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순 없었다. 나는 무겁게 내 발길을 잡아끄는 진흙을 뿌리치며 소희에게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소희는 고개를 들지 않고 나를 본 채 만 채 했다.
“아... 왔어?”
바로 지척에 다가섰을 때,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왔냐는 말이 전부였다. 그 모습에 나는 직감적으로 소희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너 바보같이 비 맞았어?”
자세히 살펴보니 입고 있던 옷도 다 젖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밖에 있었고, 내리던 비까지 피할 생각 없이 다 맞았다는 소리다. 늦봄이라지만 이렇게 찬비를 맞고 있을 생각을 하다니. 감기 따위는 걸려도 상관없다는 건가. 안 그래도 감기 걸리면 잘 낫지도 않는 주제.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고,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소희에게 덮어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질문을 하면서도, 고지식하게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있는 모습에 그래도 소희는 소희답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왔다. 거듭되는 질문에도 소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손을 들어 소희의 어깨를 토닥여 주려다가 이내 손을 거뒀다.
“다 큰 여자애가 맨날 이렇게 놀이터 그네 독점해도 되냐. 애들도 좀 타야지. 흠흠. 나는 좀 타도되지?”
소희 옆에 빈 그네에 앉아 발을 굴렀다. 비에 젖은 탓인지 그네는 엄청 뻑뻑했다. 소희 스스로 무슨 일인지 말하기 전까지는 쭉 이 뻑뻑한 그네를 탈 요량이다. 어쩌면 몇 시간 넘게 타야한다고 해도.
그러나 다행히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말할 생각이 들었는지, 그네를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입을 열었다.
“현우야.”
“응?”
그네를 멈춰 세운다.
“어떡해. 어떡하지?”
말과 동시에 소희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흑흑 거리는 울음소리가 앙 다문 입술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나는 그제야 잔득 걱정이 실린 말과 동시에 들썩이는 소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소민이가...흑. 다쳤어.”
소희의 어깨가 더 거세게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소희를 토닥여주던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민이가 다치다니.
소민이는 소희의 하나 뿐인 남동생이었다. 소민이는 소희뿐 아니라 내게 있어서도 각별한 존재였는데 미국유학가기 전, 어렸을 때 나를 마치 친형처럼 잘 따르던 아이였다. 성격은 소희와는 정반대로 착하고 순박한 아이여서, 옛날에 우스갯소리로 소민이에게 소희와 너는 남매 같지 않다고, 천사와 악마 같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형! 우리 누나 데려갈 사람은 형밖에 없어!’
순진한 표정으로 내게 말하던 소민이가 떠올랐다. 물론 나는 소민이에게 꿀밤을 먹였었지만.
“소민이가 왜? 지금 미국에 있잖아.”
“아냐.”
믿을 수 없어 소희에게 반문하자 소희가 도리질 쳤다.
“오늘 잠깐 입국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일까? 소민이가 탄 버스가 사고가 났단다. 이런 일은 영화나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 버렸다.
“은소희! 그럼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가봐야 할 거 아냐!”
평소답지 못하게 바보 같이 비나 맞고 있는 모습이 겹쳐 괜히 화가 났다. 이렇게 다그치면 안 될 걸 알면서도 소민이 생각에 울분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다쳤데?”
소희는 훌쩍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순간 머리가 아파왔다. 지금 자기 동생이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고, 여기에서 계속 있었던 거야? 도대체 왜?
“언제 연락 온 건데?”
“네, 네 시간 전에...”
“너희 부모님은?”
“퇴근하자마자 먼저.. 병원으로...”
“너는 왜 안 가고 있었어?”
다시 한 번 다그치자 소희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숨넘어갈 듯 울어버려서 내가 너무 다그쳤나 싶어 미안함 마음이 들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걱정되는 말투로 물었다.
“소희야. 왜 여기 있었어? 소민이가 다쳤잖아. 병원으로 당장 갔어야지.”
소희는 그제야 마치 울고 있다가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울음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무서워서... 혼자 가기 무서워서 기다렸어.”
그 기다린 사람이 나였구나. 기운이 탁 풀려버린다. 순간 눈앞에 있는 소희가 어렸을 적 밤에 놀이터에 혼자 있던 그 작은 여자 아이처럼 보였다.
“가자.”
앉아있는 소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디 소민이가 많이 다친 것이 아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