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rness Copse© IWM (Art.IWM ART 17280)
<겔루벨트 고지 에 있었던 숲 중 하나인 인버네스 숲을 그린 그림- 이미 수차례 이프르 전투의 결과 여기는 더이상 숲도 무엇도 아닌 곳으로
변했습니다.>
(1)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격이 아닌 준비다.
고프에게 일임했던 공세를 헤이그가 플러머로 넘긴 후 일어난 변화는 영국군이 더 이상 머나먼 파스상달 능선이 아닌
가까운 겔루벨트 고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차례 대공세가 모두 겔루벨트에서 영국군을 파악하고 있었던 독일군에 의해 독일 제4군이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쉽게 막혔고
심지어 겔루벨트 고지에 포까지 배치하면서 저지대에 있었던 영국군에 포탄을 선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이그나 플러머나 적어도 지지지 않기 위해서 겔루벨트 고지를 점령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겔루벨트를 공격한다는 자살 공격이었습니다. 준비도 거의 안되어 있었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두 장군 모두 이를 알고 있었지만 본국의 수상 로이드 조지는 이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많은 인명을 날렸는데
아무 성과를 내놓지 못한다는 건 선거가 있는 민주주의하의 정치가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거든요.
헤이그는 이 상황에서 무능하지 않는 상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책임은 자신이 질 터이니 6주간 시간은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플러머에게 하고 결국 이를 지킵니다.
그리고 플러머 역시 6주간 준비 시간 동안 자신이 기존에 생각했던 전술을 겔루벨트 공략전에 도입하게 됩니다.
이는 당시 독일군의 전술과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소수의 선봉 부대가 상대 방어선에 구멍을 뚷고 그걸 후위 부대가
전과를 확대하며 예비대는 적의 역습에 대응한다는 개념에서 말이죠.
하지만 정작 핵심되는 부분에서 독일과 영국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플러머로 대표되는 영국군은 최대한 일선에 구체적이고 제한된 목표를 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훈련 시키는
[하향식] 교리였다면 독일군은 일선 지휘관의 판단과 재량을 중시하는
[상향식]이라는게 큰 차이었습니다.
이런 차이는 이전투를 위관으로 참전하고 있었던 몽고메리 원수나 만슈타인 원수의 생각 차이를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9월 20일 영국군은 폴리곤 숲을 둘러싼 소규모 교전에서 독일군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호주-뉴질랜드 군
통칭 안작 부대는 폰 로스베르크의 방어 전술을 플러머의 지휘 하 훌륭한 활약을 보이면서 완전히 망쳐 버렸습니다.
-폴리곤 숲 전투에서 독일군 토치카 위에 호주 깃발을 개양하는 호주병사, 갈리폴리가 호주 입장에서 아픔이었다면
겔루벨트 전투는 자신감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플러머의 이런 공격 전술은 폰 로스베르크가 더 이상 수세적인 작전만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로스베르크가 만들어놓은 유기적인 방어전술을 망가 뜨리고 그냥 토치카 하나, 참호 하나씩 각개 격파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일군 대공세는 전혀 준비가 안된 즉흥적인 것이었기에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독일군은 오히려 압도적인 영국군의 공세에 사실상 겔루벨트 고지대를 잃었습니다.
사실상 3차 이르프 전투는 여기에서 끝났어야 했습니다. 더 이상 영국군은 최종 목적 파스상달 능선을 함락시켜도
더 이상 여력이 없었고 해당 능선을 방어할 전력도 간당간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영국군 3차 공세동안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진격은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의지의 사나이 총사령관 헤이그는 여기에서 그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2) 파스상달로의 진격
이프르에 속해있던 조그만 마을 파스상달. 한국으로 치면 동네 뒤산에 배산한 마을 이었지만
반년동안 영국군의 목표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이 마을 뒷산을 넘어 힌덴부르크 선을 뚫고 벨기에 해안을 정크버크 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이시기 솔직히 헤이그의 고집과 내년 독일 상대로 하는 방어고지 확보의 수준의 가치만 있었을 뿐이죠.
그마저도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정작 그때는 의미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요.
결국 이 조그만 마을 점령하기 위해 영국군과 독일군은 정신나간 전장 환경에서 2달간 더 싸워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