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좋질 못해서 그간 눈팅만 하고 지냈네요. 날씨가 엄청 덥거나 엄청 추우면 몸이 늘어지는데 올해는 그게 좀 빨리 왔습니다... 초여름이 이정도인데 8월엔 어찌 될지는....휴....
241년 5월에 자타가 인정한 후계자 손등이 죽습니다. 손등의 부인인 황태자비는 주유의 딸이었던 것을 보면, 손등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만 하죠.
손등은 아버지인 손권에게 올리는 유서에서 자신의 뒤를 이을 다음 태자는 남은 동생들 중 맏이인 손화를 추천합니다. 하지만 손권은 빈 태자자리를 바로 채우지 않습니다.
당시 손권의 나이는 60살. 노년에 접어든 나이었습니다. 건강한 편이었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태자 책봉을 서둘러야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5개월 동안 태자 자리를 비워두었다가 다음해 242년 정월에 손화를 태자로 삼습니다.
손화를 태자로 세우고 대사면을 실시한 직후, 모든 백관들이 손권에게 황후를 세우고 손권의 남은 네 아들들을 번왕으로 삼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손권은 그것을 거부하죠.
손권 : 천하는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공이 평가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들은 구휼되지 못했다. 토지를 함부로 분할해 자신의 자제를 풍요롭게 하고 작위를 높여 자신의 비첩을 총애하려고 하니 나는 이 의견을 받아들일수 없다. 이 건의는 방치하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상당히 좋은 말입니다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딱히 좋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손등이 죽었어도 황후 자리는 비어있었습니다. 태자인 손등이 자신의 어머니는 오군에 있다며 서씨를 자신의 모후로 인정했지만 손권은 서씨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죠. 손등 뿐만 아니라 많은 신하들 역시 손등의 적모라는 명분때문에 서씨를 황후로 추천했죠. 하지만 손권의 뜻은 보씨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씨는 238년에 죽었죠. 거의 10년간을 꾸물거리다가 보씨가 죽자, 238년 10월 1일에 조서를 내려 보씨를 황후로 추증합니다. 손권이 이렇게까지 하자 관리들 역시 보씨를 황후로 추증하고 칭호를 추서하도록 요청합니다. 책명의 마지막에는 먼저 서거한 황후와 함께 배향하도록 하는데 이 먼저 서거한 황후는 손권의 어머니인 오씨를 말합니다. 즉 황후로서 배향된 사람은 오씨와 보씨 뿐이었습니다. 손등이 살아있었음에도, 아들 없이 딸만 둘이었음에도 보씨는 황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죠.
보씨가 죽은 이후, 손권은 원술의 딸인 원씨를 황후로 봉하려 하지만 원씨는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합니다. 원씨 역시 보씨처럼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지만 보씨가 손권 후반기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보즐과 친척관계에 있었고 두 딸 역시 오의 신진세력인 전종과 주거에게 시집 가 외부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던 보씨와는 달리 원씨는 자신의 친족인 원요는 궁궐의 중하급 직위인 낭중에 머물렀고 어떠한 지지세력도 없었던 원씨는 황후 직위를 탐낼 수가 없었죠.
손화가 태자가 된지 2개월 후인 7월에도 관료들은 황후를 세우고 황자들을 번왕으로 세우도록 주장합니다. 관료들의 이러한 주장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권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죠. 관료들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황후를 세우고 각 번왕을 봉하는 것은 잘 보면 황족을 우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파고 들어가보면 이는 황제의 후계자인 황태자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중국의 황제를 이야기 할때 항상 나오는 말중 하나가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존재합니다. 명분상으로는 모든 사람은 황제의 신하라는 것이죠. 살을 부비면서 사는 황후 역시 황제의 신하라는 의미입니다.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죠.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은 번왕으로 보내져 궁 바깥으로 내보내 지게 됩니다. 이는 황제와 그 위를 이어받을 태자만이 황궁에 머물면서 현 권력자와 차기 권력자를 내정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아들들을 번왕으로 만들어 비교적 동등한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변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후계자의 위치를 강화시키는 효과도 있었고, 궁내의 다른 황자들이 태자의 위치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었죠.
손권은 그가 황제가 되었음에도 장남인 손등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은 바로바로 번왕으로 봉하지 않습니다. 손려가 왕이 된 것도 스무살때 고옹등의 많은 신료들의 요청에도 허락치 않다가 겨우 번왕이 된 것을 본다면 손권은 이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듯 합니다. 손화나 손패 등은 이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손등, 손려가 죽고 손화가 태자가 되면서 이는 큰 문제로 발현되기 시작합니다.
강하군을 비롯한 남양군, 광릉 등에 대한 공략실패는 손권을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게 해줍니다. 하지만 사항계를 통한 석정에서의 승전은 손권의 자만심이 심하게 피어오른 듯 합니다. 조휴의 대패로 인해 여강군의 지배권은 오로 돌아옵니다. 합비성의 1차 방벽인 환현과 환성이 함락되면서 위는 합비성을 파괴하고 더 내륙인 지역에 합비 신성을 쌓은 것으로 위는 방어선을 뒤로 후퇴시킨 것이죠. 비교적 지지부진했던 촉의 북벌 상황과는 달리 오는 위의 방어선을 후퇴시켰다는 것은 손권의 자부심이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갈각과 진표가 그간 발목을 잡던 산월을 완전 토벌하는 데 성공했고, 모략으로 교주 지역을 대대로 지배하던 사씨 일가를 제거하고 이 지역을 오의 직할지로 만들었다는 자신의 알량한 업적은 손권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쓰고 손제리로 읽는 제리화가 진행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손권의 제리화는 암세포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242년 7월 살아있던 아들 중 둘째인 손패를 노왕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단순히 손패를 노왕으로 삼았다면 문제가 아니었지만 손권은 미친 짓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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