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덕궁 서쪽뒤편 개울을 따라 인왕산을 오르면 숲이 우거진 곳에 작은 폭포가 나오고 그 앞에 이리저리 휘어진 복사꽃 가지가 멋스러운 곳. 넓직한 바위가 깊은 개울에 반쯤은 몸을 담그고 드러나 있는 곳. 붉은 복사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날은 바람과 비도 질투하여 경박해진다는 곳. 이곳에 술 두어말을 이고지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둠이 깔릴때까지 마시고 노래하고 울부짖고 하는 동안 그들에게 그곳은 어쩌면 평등세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신분사회 조선의 양반,중인,상인이었으며 그 정원의 주인은 천민인 유희경이었으니까요.
유희경이 바탕삼은 널다란 바위는 침류대라고 불렀고 그것이 이들을 이르러 침류대학사라고 혹은 성시산림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사림파가 시골의 산림을 이뤘다면 이들은 도시의 산림이란 의미였던 것이지요. 산림이란 당시로서는 명문학벌이랄 수 있는 주류 성리학자들이었던데 반해 성시산림을 이끄는 이들 중에는 서울 관학출신들이 많았습니다. 말하자면 듣보잡출신들.
이 듣보잡 공립학교에는 이름 있는 학자들도 없었고, 대우도 좋지 못했습니다. 가르치는 교관들도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고요. 학당의 교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균관의 유생들치고 ‘누구누구의 제자입니다.’ 하고 이름난 유학자의 이름을 대지 못하는 유생들은 실력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간혹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를 얻는 운 좋은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스승이 누군가에 따라 줄서기가 심하기 때문에 출세는 엄두도 못 내었습니다. 다들 학당에 가기를 꺼렸고, 학당출신이라면 사람들이 깔보았습니다.
학당에서 소학을 배우고 그곳에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성균관에 입학하고 난 뒤 그들에게 현실의 벽은 두터웠습니다. 세상은 두 개의 파벌로만 존재했습니다. 동인인가 아니면 서인인가.
관학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거나 과거를 꿈구는 이들에게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지역감정으로만 보였습니다. 왜 실력대로 뽑아주지 않는가?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눈에 실력을 갖춘자라면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특히 한양도성에 있는 상인들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그들의 후원자가 기꺼이 되어주었습니다. 성시산림의 술값은 상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어쩌면....상인들에게 아니 성시산림과 함께한 중인,서얼,천민들에게 그 술판은 다가올 신분해방사회에 대한 암시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직전...한양은 그렇게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2.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은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처음 한양도성이 만들어질때의 인구는 만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사림과 훈구의 싸움은 지방에서 국유지를 사유화시키고 치수사업에 열을 올리게 하는 등 농업생산성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치열한 정쟁은 언제나 경제적 이득과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니까요.
이 과정에서 농촌의 소농과 빈농들은 토지를 잃었고 농촌에서 갈 곳을 잃게 된 이들은 일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일부는 산적이 되었으며 또 일부는 관아가 있는 읍성이나 도성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이렇게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당시 한양을 비롯해 지방 감영의 주변에는 관아의 물품 납품업자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점차 발전하여 거상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청진동 재개발과정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문화재들은 이들이 누린 부가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심지어 왕실도자기보다 더 엄청난 도자기류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깊숙한 창고에 숨겨두었다가 임진왜란때 화재 등으로 인해 매몰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상인들이 성장하자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이들에게 물건을 떼다가 팔거나 반대로 한강나루터에 들어오는 지방의 물건들을 받아다 상인들에게 넘기기도 했지요. 말하자면 도소매업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시장거리는 종로거리에서부터 뻗어나가 아래로는 숭례문, 동쪽으로는 흥인지문까지 즐비하게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서대문쪽에는 경기감영까지 있었으니 강북은 그야말로 상인들의 천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조선관료 사회의 급팽창은 중인전문가들에게도 부귀영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중인들은 6조건물이 즐비한 광화문까지 출퇴근이 가까운 인왕산아래에 모여 살았는데 대부분 이들의 직업은 가문대대로 세습하는 특성이 있었고 안정된 전문직이었습니다.
( 다만 그들에게 불만이라면 역시 신분. 조선 후기 동학이 농민에게 그리고 서학이 이들 중인에게 파괴력을 가졌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도시는 상인,중인,서얼 할 것 없이 활력이 넘치고 있었고 그것은 곧 위로는 양반사대부부터 아래로는 천민까지 어울리는 새로운 도시문화, 성시산림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딱 이를 두고 하는 것이란 걸, 훗날 북학자 박제가는 알았던 듯 합니다. 박제가가 그토록 청나라의 신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신분차별의 원인이 나라가 가난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북학의라는 저서 속에 토해놓은 울분은 나라가 잘 살아야 인심이 넘치고 그 인심이 넘쳐야 서얼에게도 나눠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으로 보면 성장인가 분배인가에서 성장론의 논리....이것이 북학파의 논리이고 이후 개화파로 이어지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그토록 풍요롭고 평화롭던 성시산림의 평화는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급격하게 깨지기 시작합니다. 전쟁을 통해 양반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치부와 무능력을 드러냈고, 체제위기까지 느끼게 된 그들은 급격히 보수화합니다. 상인도 중인도 서얼도 천민도 심지어 양반 내에서도 더 이상 공존은 없었습니다.
3.
임진왜란 이후 급격한 조선사회의 보수화를 이끈 것은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소위 사회1%인 부자들이자 특권층인 양반사대부의 보수화 이데올로기에 이끌린 것일까요?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양반관료들의 무능력은 곧바로 조선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습니다. 대신에 좀 더 실용적인 학풍을 가진 남명 조식의 제자들과 개성의 상인적 분위기 아래서 형성된 화담 서경덕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북인들이 득세했습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중에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위력적인 의병운동을 이끌었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고, 정인홍 같은 대중적 스타도 탄생했습니다.
여기에다 선조임금 일행이 의주에서 망명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명나라로 구원병을 요청하러간 이덕형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분조를 이끈 광해군의 눈부신 활약은 더욱 양반사대부들을 긴장시켰습니다. 광해군과 의병운동스타들의 의기투합이 가져올 후폭풍을 그들의 예민한 촉수는 알아차린 거겠지요. 조선사회 1% 특권 양반사대부층의 단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운동스타들을 ‘반역’의 혐의로 몰아가는 공격이었습니다. 의병운동이 성공하여 수복된 지역에 급파된 중앙의 관리는 의병장들에게 포상을 하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 반역의 기미가 있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은 모두 몸을 숨기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자의식이 강한 몇몇 의병장들 중 일부는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했고 이들을 색출하고 진압한 이들에겐 정난공신이라는 포상이 따랐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이것이....이후 더 이상 의병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유로 보기도 했습니다. 정유재란과 거듭된 호란...심지어 을사조약까지...)
그러나 무엇보다 양반특권층의 고민은 광해군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촉수로 보았을 때 광해군은 자신들의 동지가 아니라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병들처럼 그에게도 반역의 올가미를 씌울 수는 없는 법이었습니다.
광해군은 후궁의 둘째아들이라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형이자 장남인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서 세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선조의 정식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후궁의 아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지요.
어쩌면 비록 후궁의 아들이고 양반성리학자들이 치를 떠는 의병운동스타였지만 그에게 순탄한 왕위계승의 길이 열릴지도 몰랐습니다. 그랬다면 침류대학사의 평화도 깨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이 꿈꿨던 신분적 제약도 다소 느슨해지고 실력에 따라 등용될 기회도 넓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인과 상인들의 성장은 이후 다가올 조선후기 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궤를 같이하면서 개화의 시점에선 엄청난 폭풍을 불러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일본의 침략과 야욕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한반도에서 소멸되어버리는 C급 태풍(열대성 저기압에 불과한)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역사는 때론 잔인한 법.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선택이기도 합니다만.
비극의 씨앗을 물고 온 것은 명나라. 당시 조선양반사대부에게 명나라는 은혜의 나라 어버이의 나라로 조명동맹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는 길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전쟁을 돌이켜 놓은 것은 이순신의 해전승리나 의병들의 활동이 아니라 바로 명나라 원군때문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정치에 따라 왕을 의주까지 따라간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마부까지도 호종공신이 됩니다. 오죽하면 이 호종공신의 숫자가 무려 86명으로 군사적 승리를 이끈 선무공신 18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요.
이러한 때에 명나라의 내부사정이 복잡해졌습니다. 태자책봉문제가 걸려있었던 것입니다. 만력제가 성리학적 명분론을 무시하고 셋째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고 이것이 정쟁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는 조선의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길 꺼린 것입니다. 둘째아들이라는점 그리고 후비의 아들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필이면 이때 조선왕실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왕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지요. 이것은 선조와 성리학적 보수주의자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었습니다. 아직 강보에 쌓인 어린 왕자일지라도 영창대군만이 임금이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조정은 광해군을 따르는 사람들과 영창대군을 따르는 사람으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광해군은 늘 불안에 떨며 아버지 선조임금과 혈통만 주장하는 사대부들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생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던 광해군은 즉위한 후 개혁정치에 조심성이 있었습니다. 양반특권층에 대항할 정파로서 북인들을 등용하였으나 그렇다고 북인들에게 정권을 전부 몰아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을까요? 세상에 권력은 분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광해군은 몰랐던 것일까요?
4.
정인홍, 이이첨과 같은 대북파는 남명조식계열로 실용성을 강조하고 실천력을 갖춰 의병운동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병운동의 정당성을 무기로 중앙정치무대에 화려하게 입성했고 마침내 자기들이 지지하는 광해군을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승리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정당성이 모든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것이란 순진함에 빠진 것인지 모르나 보수적 성리학자들의 힘을 무시했습니다.
권력은 남용되었고 아직 어린 영창대군의 뒤에 숨은 보수파들을 겨냥한 칼끝은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분노로 변질되었습니다. 광해군 속에 깊이 봉인되었던 분노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파들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유생들의 시위는 연일 끊이지 않았고, 성리학에 치를 떨던 허균과 같은 일부 반성리학자들에 대한 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을 비롯해 모든 비양반성리학적인 것들에 대한 공격이 거듭되었습니다. 지방에 거점을 둔 서원은 밥만 먹으면 상소를 썼고, 서원의 노비와 말들은 그 상소를 실어 나르기 바빴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보수파들이 먹이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행동이란 것을 차마 알 길이 없는 광해군과 집권개혁파는 결국 그들의 뜻대로 반인륜적 죄를 범하고 맙니다. 영창대군도 살해당했고 인목대비는 폐비가 되어 쫓겨났습니다.
조선시대의 언론이랄 수 있는 서원을 통해 전국적 여론을 장악한 양반들은 위기 속에서 단결하면서 조직력을 보여주었고 소수파인 광해군과 집권개혁파들은 결국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 들었습니다. 기회를 놓칠리 없는 보수집권층은 즉각 어제의 적이었던 남인과 서인이 손을 잡아 위기에 대응하고 마침내 반정에 성공합니다.
5.
임진왜란으로 촉발된 동아시아의 변화의 후폭풍은 일본에서도 명나라에서도 정권이 교체되도록 했습니다. 다만 조선만이 이 격랑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왕조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어쩌면 선조와 양반특권층의 엄청난 위기관리능력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조선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단 한번의 반란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래서 일본제국주의가 그들의 체제를 강제로 해체한 을사조약을 새로운 번영의 시점으로 보게 하는 근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합니다. 그 한쪽 날개가 다른 한쪽 날개를 부정하다 멸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 조선의 허망한 결말의 시작은 이렇게 성리학보수주의자들의 무능력을 고발하며 특권적 양반사대부라는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광해군과 집권대북파의 비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덧붙여서
(원래 이글은 통합진보당이 종북논쟁에 휩싸이고 동부연합을 딴지일보와 보수신문에서 공격할 때 준비했던 글이었습니다....그러나 시기적으로 좀 민감해보여서 선거가 끝난 후 올리기로 마음먹었고,그에 따라 약간의 결과론이 첨가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는 7,80년대에 초중고교를 마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 의해 주사파가 탄생한 것일까요? 그리고 소위 nl이 학생운동의 대세가 되었을가요?
(사실은 주사파의 탄생배경은 한국의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므로 사실은 복잡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가 평가할 능력도 안됩니다.따라서 수박겉핥기식의 글이 될 듯합니다.)
80년대 대학가의 최고의 화두는 독재권력의 폭력성이었습니다.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정권이 존재하는 한 그 치명적 약점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펼쳐지는 사상적 자유는 그런 독재권력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보게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아래 대한민국의 군대가 대한민국의 국민인 청년을 향해, 무방비한 채 웅크린 청년을 향해 내리치는 몽둥이를 바라보는 대학생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이제까지 받아온 철저한 반공교육은 단지 정권옹호를 위한 교육이었다는 것을요. 철저한 언론 통제아래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요. 보도지침이라는 용어속에 표현된 이런 독재권력이 움켜진 정보의 폐쇄성과 독점성을 뚫고 해외외신들이 보여주는 작은 진실쪼가리에 대학가는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그리고, 이때 대한항공 폭발사고의 주범인 김현희에 대한 조작관련 대자보가 전 대학가에 나붙습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많은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자명합니다. 정권의 도덕적 약점과 보도지침이 결합한 시너지였던 것이지요.
정권을 무너뜨릴 약점으로 일부 학생운동세력가운데서 북한을 찾기 시작한 것은 이런 상황속에서였습니다. 북한을 적으로 삼아 긴장이 거듭된다면 독재권력의 폭력성은 거듭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전 대학가의 암묵적 동의하에 빠르게 자리잡아갔습니다. 그것이 엔엘계가 학생운동의 대세가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엔엘계는 정권의 도덕적 정당성문제를 정면으로 그리고 설득력있게 제기했던 것인데 반해 피디계는 민생문제라는 다소 추상적인(왜냐하면 아직도 이문제는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는것이니까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대학가의 특성상 사회안정적 특권층이 될 수 있는 이들에게 실천적 자비심 외의 것을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중 일부....소위 강철선생이라고 일컬어진 김영환씨의 강철서신이 학생운동계를 강타합니다. 그것은 정권의 도덕적 뿌리를 일제청산에까지 소급해갑니다. 김일성은 (비록 우리가 배운 바대로 그가 소련의 앞잡이이고 소련에서 내세운 가짜일지는 모르나) 어찌되었든 항일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가진 주체라는 점, 그리고 북한내 토지개혁을 비롯한 반봉건성과 일제청산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등의 정보가 담긴 연구물들이 설득력을 얻은 것입니다.
(반면 남한에선 미국이 신탁통치이후 권력이양을 위한 권력주체로서 김구세력이 제거된점, 그리고 이승만이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친일청산에 소극적이고 오히려 부일파들을 권력기관으로 재임명한 점 등의 도덕적 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특히 박정희정권의 성공신화를 낳은 경제개발계획과 그 뒤를 이은 유신독재는 스탈린체제의 한국적 모델일 뿐이었고,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박정희 스스로가 공산주의 시스템을 도입한 점까지 감안한 일부 엔엘계에서는 북한체제의 도덕적 우위에 그치지 않고 성공모델로까지 여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북한의 체제수호전략이자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후 남한 주사파의 창안자나 다름없는 김영환과 뉴라이트들이 친일청산문제는 물론 박정희정권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이것은 지난번 뉴라이트 논쟁에 대한 발제문이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아마....진중권씨나 일부 전향한 주사파의 말대로 그들은 ‘김일성장군님’을 향한 맹목적 추종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을 무너뜨린 것은 안기부도 아니고 조선일보도 아니고 바로 국제정세의 변화였습니다.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에 대한 남한의 체제우위가 분명해지자 주사파는 스스로 전향하거나 소멸되어갔습니다. 만일에 아직도 남아있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부정당하기 싫은 편집증이거나 북한의 성립과 발전과정이 남한보다 도덕적으로 우위를 갖는다고 여기는 도덕적 결벽주의자.
이전에 방북논란이 빚어진 노수호씨는 전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한내에 극렬 통일론자들은 극우파와 같이 정신나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상적 스펙트럼으로 볼 때 그들 또한 분단의 산물입니다. 우리사회의 종북주의자가 위험한 것인지 그것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가 더 위험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종북의 개념은 전국연합 사상논쟁에서 비롯되었듯이 주사파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분명한 실체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한국에서 아직도 그 실체가 남아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또한 반국가단체나 폭력단체와 같은 위험조직으로 표면화한 적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적단체 혹은 이적표현물.)
노수호씨처럼 아직도 연연해하는 그들에 대한 연민이 온정주의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수호씨와 같은 종북주의자들의 철없는 행동이 남한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의 잠수함공격에 수십명의 청년들이 목숨을 뺏긴 허술한 국방력을 보여주면서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북한에 대한 분노만 부추기는 세력이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반대의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요. 북한이 남한을 무력으로 테러하고자 한다면 국방력은 의미가 없으며 종북주의자들은 그런 경각심을 무디게 해서 북한이 오판하게 한다던가...하지만 전 종북주의자 때문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고 보진 않습니다.종북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통일의 대의를 위해 헌신한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북한체제에 이용만 당하는 것이니까요. 이점은 북한이 더 잘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노수호씨도 그 철없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꼴통 통일론자들을 잡기위해 온국민이 들고 일어선다면 결국 잡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반도내 긴장관계가 어떻게 될지, 반대로 그 긴장관계가 남한내에서 어떤 위협이 될지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그게 최선일까요?
소금은 짜야 합니다. 간이 딱맞는 소금이란 짠 소금이죠. 그러나 그 소금을 짜다고 당장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소금을 버린다면 어찌될까요?
그런 점에서 이번 종북논쟁이 불거졌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진보당이 국민적 선택을 받은 것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13석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통합진보당을 선택한 국민이 의미있는 수치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에대해서도 심판했습니다. 지난 4년간 민주통합당은 국민이 울고 아파하는 곳에 있었나요? 아니면 안락한 국회에 앉아 서로에게 삿대질만 하고 있었나요?
이 사회의 소금이 되어준다면 그래서 아파하는 국민곁에서 온몸으로 저항하는 이정희 대표를 볼 수 있다면 기꺼이 그와 통합진보당을 지지하겠다는것. 그것이 이번 선거의 또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갑니다. 우측 날개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준 새누리당과 좌측날개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주지 못한 민주통합당. 그리고 스스로 좌측에 있음을 숨기지 않았던 통합진보당. 국민들은 그에 대한 판결문을 내렸다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괴물은 이정희의원과 그 뒤에 숨은 동부연합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글은 이번 선거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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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이 느껴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왼쪽 날개를 자처하는 통진당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행패(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하겠습니다)는 진보 세력에 심정적인 지지를 보내는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더군요. 특히나 그들이 선거 전략에서 철저하게 현실감 결여를 보여줬기 때문에 그들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가 소련이 붕괴될때 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 운동권 선배들의 '멘붕'에 대해서는 많이 봤었습니다. NL의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만, 21세기 들어서 10년 뒤에도 아직까지 북한은 절대 비판의 영역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고 감싸는 집단이 있는건 맞다고 생각합니다. 연평도 포격 이후 민노당의 논평도 개인적으론 치가 떨렸고요. (천안함이야 논란이 있으니 그럴수도 있다고 봤지만..) 한겨레신문의 홍세화씨가 칼럼에서 북한에 노를 못하는 민노당에 대해서 비판한것도 십분 이해가 됬고요. 저들은 말로는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자기들은 전혀 바꿀 생각도 준비도 된거 같지 않아서 비판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국제관계의 변화속에서 영리하게 이득을 취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정말 고민했으면 하는게 바람입니다. 그건 사실 모든 정당에 요구하고 싶고요. 맹목적인 한미동맹이 유리할 때도 있지만 적당한 반미가 더 많은 걸 얻을 때도 있는 법이죠.정부는 불가능하지만 정당은 가능한것이니까요.
통합진보당의 강령에 의하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등 한반도·동북아의 비핵·평화체제를 조기에 구축한다. 이와 연동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여 동북아 다자평화협력체제로 전환한다. 국군의 해외 파병을 금지하고, 선제적 군비동결과 남북 상호 군비축소를 실현한다."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최대의 논란거리가 될 거라 여겨집니다.
평화협정의 대상으로서 북한은 체제를 인정해야 하는것,국가로서 실체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니까 헌법을 수정하는 문제까지 많은 숙제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엇든 한반도는 전세계의 화약고인데도 휴전상태에서도 여지껏 큰 충돌없이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인지...정말로 미군이 주둔해 있는 한 북한은 도발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도발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인건지 아니면 평화협정이 한반도에 이득인지 혹은 아닌지 등....풀어갈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