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에서 잉글랜드와 헝가리의 친선 경기가 펼쳐졌다. 당시, 헝가리는 명감독으로 회자되는 세베시의 지휘 아래 1952년 올림픽(당시에는 올림픽 참가 선수에 대한 연령 제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는 달리 각국의 성인 국가대표 주전 선수들이 모두 참여하는 메이져 국가 대항전이었다.)을 우승했으며, 1950년 5월 14일에 오스트리아에게 3:5로 진 이후, 3년 6개월 동안 치룬 26경기에서, 21승 5무 95득점 24실점이라는 공수 양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압도적인 기록을 거두며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은 무적의 팀 <골든팀>이었다. 이를 상대하는 잉글랜드 역시 세계 축구의 발전에 뒤쳐져가고 있다고는 하나, 자국 내에서 벌인 경기에서는 1949년 아일랜드와의 친선전에서 진 것 이외에는 패배한 적이 없는,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고 있는 팀이었다. 그 이전까지 그리 주목 받은 경기는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충격적인 결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진 전술적인 혁신은 이전의 주목과 호응하여 이 경기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기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1.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이자,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당시, 스포츠는 국가에 의해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서 흔히 사용되었으며, 직접적인 군사적 마찰이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던 냉전 시대의 정세 상, 국제 대항전은 대리전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맥락으로부터 헝가리 역시 예외가 되지 않았다. 48년, 파리의 르노 프랑스 자동차 공장에서 파업을 주도하며 노동 계급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검증 받았던, 수완가로서의 면모가 특출났으며 축구에 대한 이해 역시 그만큼 밝았던 세베시 구스타브가 골든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에 맞춰 헝가리 당국은 키스페스트 FC를 군부 내로 편입하여 부다페스트 혼베드 - 혼베드의 의미 자체가 Homeland defence, 곧 조국 수호였다 - 라는 명칭으로 개편한 뒤, 국가 대표 레벨의 선수를 해당 팀에 강제로 몰아넣고 하나의 팀으로써 조직을 다졌다. 실제로 이 시기, 헝가리 국가대표의 주전 11명 중 7명 - 푸스카스, 부다이, 치보르, 코치스, 보직, 로란트, 그로시스 - 이 혼베드에 소속되어 있을 정도였다. (10년의 스페인도 이와 비슷하지만, 강제적인 행정적 조치에 의한 것인지 여부에서 차이가 있다.) 그 덕분에, 45-46시즌부터 48-49시즌까지의 4시즌 간, 팀 전체 득점 319골 중 푸스카스 혼자서 125경기에서 163골을 넣는 대활약1)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원맨팀에 불과했던 키스페스트는,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조직이 개편된 이후 7시즌 동안 5번을 우승하는 등 독보적인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요컨대, 헝가리의 골든팀은 자연발생적인 팀이 아닌, 계획 경제 국가 하에서 철저하게 목적 합리적으로 조직된 단위였으며, 축구는 국가의 시녀였다. 아퀴나스의 시녀가 그러하듯, 헝가리의 시녀 역시 미천하면서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와의 경기 역시, 그런 체제 선전의 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처음에 헝가리 당국은 당대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와 웸블리에서 경기를 가지기로 한 것에 대해서 세베시를 질책했지만, 세베시는 자신의 팀이 충분히 잉글랜드를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이것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선언이 될 것이라고 당국을 설득했다. 결국 당국은 경기를 허락했고, 11월 25일 양팀이 웸블리에서 맞닥 뜨리게 되었다.
2.
모든 경기가 그러하듯,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양팀의 포메이션일 것이다. 다만, 이후의 모든 글에서도 포메이션을 가장 먼저 살펴봄으로써 경기에 대한 접근을 시작하는 방식을 취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포메이션을 왜 살펴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포메이션이 무용한 것임이 아님을 간단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흔히 포메이션에 의한 전술적인 분석을 비판할 때 주로 하는 말은, “포메이션은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라는 것이다. 이는, 선수들은 하나의 위치에 고정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시프트나 스위칭 등 선수의 포지션에 변화를 주는 플레이를 전술적으로 구사할 수 있으므로, 포메이션을 통해 정해진 위치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의적인 입장들이 항상 그렇듯, 이 경우에도 부정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한 명의 선수는 두 지점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10명으로는 모든 공간을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개별 선수들에게 포지션의 유동성을 부여한다한들, 한 명이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은 단 한 곳뿐이며, 경기장의 넓이는 7000m2가 넘으므로, 10명으로는 모든 공간을 커버할 수가 없다는 난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 선수의 위치를 정하여 공간을 배분해주어야 하는지가 전술상의 과제로 떠오르게 되며, 이러한 선수의 배치가 상대나 상황에 적합하지 못할 경우엔, 공격 시에나 수비 시에나 비효율적인 플레이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 선수들이 기동력과 활동능력, 전술 이해 등의 덕목이 탁월할 경우, 선수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통해서 공간을 커버하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미리 자리를 잡아놓고 있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이는 활발함, 민첩성, 투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간의 점유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실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컨대, 아무리 선수들이 자유롭게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허수아비가 아닌 이상은 플랫형 4-4-2로 다이아몬드 4-4-2를 사용하고 있는 상대의 중앙 공간을 점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백쓰리가 전술의 주류로부터 도태된 것 역시 좋은 예이다. 특별한 변화를 가하지 않은, 일반적인 형태의 백쓰리를 쓸 때에는, 지나치게 중앙 수비수가 많기 때문에 상대가 원톱을 사용할 시에는 미드필더 지역에서 수적인 측면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3명의 센터백 중 한 명을 전진시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럴 바에야 애초부터 수비수 한 명을 제외하고 미드필더 한 명을 늘려 백포를 쓰는 것이 이치에 닿으며, 백쓰리를 유지한 채 한 명의 수비수에게 유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공간의 점유에나 선수의 지구력에나 비효율적인 방식이라고 말하는 일련의 비판에 대해 대응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현대축구의 토탈사커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역시 같은 문제점을 지닌다. 가령, 포메이션 무용론의 입장을 가진 이들은, “현재 세계 축구계를 지배하고 있는 바르셀로나만 보더라도, 선수 간의 포지션 체인지가 잦고, 경기 중에 포메이션을 수리로 교체하며, 각각의 선수들이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을 탁월하게 해낸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포메이션이 경기 운영에 그리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을 종종 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처럼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토탈사커를 대변하는 팀들이, 아무리 포지션 체인지가 잦고, 포메이션의 변화가 다양하며, 각각의 선수의 전술적인 역량이 탁월하여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한들, 다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여 10명의 필드플레이어를 전원 모두 1선에 배치해버린다거나, 수비수를 단 2명만 기용한다거나, 측면 플레이어를 단 한 명도 두지 않는다거나 하면, 지금과 같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약체로 평가받는 팀들에게도 곤욕을 치루게 될 것이다.
또한, 경기 중에 바르셀로나가 포메이션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는 것 자체가, 각각의 포메이션 간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든지 말든지, 팀의 전술적인 움직임에 아무 영향이 없다면, 포메이션을 바꿀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부스케츠를 수비라인으로 내려 후방을 커버하도록 함으로써 알베스와 아비달을 전진시키는 식의 포메이션 변경은, 보통의 경우 보다 와이드하게 측면을 공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술적 조치이다. 만약 이런 식의 포메이션 변경이, 일반적인 형태와 비교할 때 측면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있어 유효한 차이가 없다면, 바르셀로나의 코치진은 구태여 부스케츠를 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바르셀로나는 어떤 식으로 선수를 배치시켜도 팀 전술에 별 영향이 없기 때문에 포메이션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의 배치를 변경시킴으로써 팀의 공격과 수비 전략에 강한 변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에 포메이션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 역시, 포메이션의 변화가 전술의 변화와 상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 외에도 포메이션이 선수와 전술에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안첼로티가 트레콰르티스타 성향인 졸라를, 트레콰르티스타를 따로 두지 않는 4-4-2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고민한 것이나,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한국 국가 대표팀이 백포에 익숙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나,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할 때 무리뉴가 4-2-3-1과 4-3-2-1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두고 고심한 것이나, 11-12시즌 프리메라리가의 전반기에 있었던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셀로나가 1:0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4-1-2-3에서 3-1-3-3으로 포메이션을 바꾸고 나서부터 전세를 역전시켰던 것과 같은 수많은 사례들은, 포메이션이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하다는 전제 하에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특정한 포메이션을 통해 선수의 기본 위치를 정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술, 곧 선수와 팀이 경기를 이끌어나가는 방식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며, 각기 다른 복수의 포메이션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축구의 포메이션은 RTS의 빌드오더와 같은 의미를 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수의 위치란 자유로운 것이므로 축구에 있어 포메이션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RTS 형태의 게임에 있어 게이머는 변칙적이고 자유로운 운영을 취할 수 있으므로 빌드오더는 무의미하다는 주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1에서 테란이 투배럭을 올린 뒤 더블을 하더라도도 마린을 생략한 채 앞마당 멀티를 먹으면 부유해 질 수 있으므로 투배럭 더블이나 원배럭 더블이나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차이를 분별하기 어렵다는 식의, 지성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수한 단견들과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조나단 윌슨 역시, 자신의 저서 <<축구 철학의 역사>>을 통해 포메이션을 지나치게 간과하는 경향에 대해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을 가한 바가 있다. 이를 인용함으로써, 독자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해당 논의를 매끄럽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잉글랜드가 유로 2004에서 스위스에게 3-0 승리를 거둔 날 저녁, 리스본에서 각국의 언론인이 뒤섞여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에릭손 감독이 정통 4-4-2 전술을 고수한 것은 과연 옳았는가? 미리 예고했듯이, 다이아몬드형 미드필더를 쓰는 게 낫지 않았는가? 유력 선수들이 막판에 팀에 합류하면서 어쩌다보니 중원이 일자형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잉글랜드 동료가 따지고 들었다. '그래, 뭐가 다른데? 포메이션이 뭐가 중요해. 그 선수가 그 선순데. 논할 가치도 없어.'
내가 술에 취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손가락을 치켜들면서, '너같은 놈은 축구에 대해 말할 자격도 없고, 아예 보지도 말아야 한다.'라며 퍼부을 때, 때마침 적절하게 아르헨티나 여성 기자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포메이션이야말로 중요한 유일한 것이죠. 다른 것에 대해 논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일순간 잉글랜드인들의 축구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축구는 선수에 관한 것, 또는 선수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형태와 공간, 합리적인 선수의 배치,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선수들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전술은 포메이션과 스타일의 혼합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겠다. 같은 4-4-2라도 야구선수 스티브 스톤과 축구선수 호나우지뉴가 다른 만큼이나 전혀 다를 수 있다.)
물론, 아르헨티나 기자의 말은 상황상 나온 비유적인 과장일 뿐, 축구에는 이외에도 마음, 정신, 노력, 욕망, 체력, 의지, 속도, 열정과 기술, 이 모든 것이 다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인 영역은 존재하며, 다른 분야처럼 잉글랜드인들은 대체로 이런 추상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분명 결점이고 내게 좌절감을 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 축구의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
3.
그리하여, 이제 포메이션 이야기를 해보자. 당시 영국은 전형적인 WM 전술을 썼으며, 헝가리는 WM을 다소 변형시킨, 당시로서는 그들만의 오리지널 포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의 전술적 배치를 사용했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한지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포메이션 경향으로부터 헝가리가 어떠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에는 선수의 포지션에 따라 일정한 등번호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참고1] 2-3-5 식 등번호 배정
11--10--9--8--7
----6---5--4----
------3--2------
[참고2] WM의 등번호 배정 (2-3-5와 비교해보면 어떻게 포메이션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5번이 최후방으로 빠지고, 10번과 8번이 약간 밑으로 내려왔다.)
쉽게 말해서, 9번이면 센터포워드, 11번이면 왼쪽 윙어, 10번이면 레프트 인사이드 포워드라는 식으로, 등번호를 알면 포지션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헝가리는 3-2-1-4, 혹은 3-2-3-2에 가까운 포메이션을 썼다. 이는 WM 포메이션에서 W를 뒤집은 형태로, 히데쿠티의 소속팀이었던 MTK의 감독 마톤 부코비가 즐겨 구사한 형태와 유사한 것이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퍼스트 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히데쿠티가, 현대의 딥라잉 스트라이커처럼 보다 후방 지역에 내려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종종 4-2-4로 보기도 하지만, 히데쿠티가 다른 필드 플레이어들과 구별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보지크와 자카리아스는 현대 축구에서 두 명의 미드필더를 뒀을 때의 역할 분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비 시의 자카리아스가 비록 후방까지 내려가는 일이 잦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위치는 분명 미드필더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3-2-1-4내지 3-2-3-2로 보는 것이 보다 적당할 것이다. 이런 포메이션 표기가 의미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히데쿠티는 어디까지나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세컨드 톱에 가까운 역할이었지, 현대의 메시나 토티와 같은 제로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메시나 토티는 최전방에 위치하며,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선수들을 지원하는 것이 주 역할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나 세컨드 톱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히데쿠티는 정반대로 자신보다 앞선 선수들을 지원하며, 빌드업을 리드하고 공격 방향을 선택하며 게임 흐름을 컨트롤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았다. 이는 요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플레이메이커에 해당이 될 것이며, 그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배치가 4-2-4, 나아가 4-4-2로 가는 이행과정을 보여주는 변화라고 지적하는 것은 타당한데, 그 이유는 자카리아스를 전술적으로 활용한 방식이 3백에서 4백, 곧 WM에서 4-2-4로의 이행이 일어난 이유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WM에서는 공격 숫자에 비해 수비 숫자가 적기 때문에, 수비 시에 종종 약점을 드러냈다. 때문에, 단순히 실점을 줄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격 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비 숫자를 한 명 늘려 후방의 위험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세베시가 자카리아스를 보지크와 구분하여 보다 수비적인 위치에 기용한 것 역시, 이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같은 발상이라고 해서 같은 포메이션이라고 오해해서는 곤란한 것일 따름이다.
당시에는 WM과 WM의 대결이 당연한 것이었으며, WM을 쓰는 팀끼리는 라이트 인사이드 포워드가 상대의 레프트 하프와 매치가 되는 식으로, 각각의 선수끼리 같은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서로가 서로를 전담마크 하는 식의 경기가 이뤄지곤 했다. 그리하여, 센터하프인 5번은 상대편의 퍼스트 톱인 9번을 마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헝가리의 경우에는 배치 자체가 기존의 방식과 달랐다. 특히, 원래대로는 센터하프가 마크해야할 9번 선수였던 히데쿠티가 4명의 포워드 밑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누가 히데쿠티를 마크해야할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등번호 역시 통상의 관례와는 달랐으므로 헝가리 선수의 등번호만 가지고는 해당 선수의 정확한 포지션을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헝가리를 상대하는 팀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선수 전원이 전방에서 수시로 포지션을 바꿔가며 상대 수비를 교란했기 때문에 헝가리를 상대하는 팀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리한 전술가였던 세베시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된 것으로, 훗날 <토탈 사커>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전술 스타일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당대 최강을 자부하던 잉글랜드 역시 이를 상대함에 있어 예외가 될 수 없음이 이 경기에서 드러났다는 것은 이후의 서술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
경기 시작 전, 푸스카스는 연습 삼아 리프팅과 저글링을 했는데, 그의 테크닉에 경악한 관중들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이미 전력의 열세를 체감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니나다를까, 경기를 시작한지 불과 1분만에, 중원에서 볼을 받은 히데쿠티가 페인트로 한 명을 따돌린 채 원 터치로 치고 나간 뒤 페널티 박스에 진입하여 슈팅을 했고, 이것이 골로 연결 되었다. 잉글랜드로서는 시작부터 기선을 완전히 제압당한 셈이었다.
헝가리의 골이 초반의 혼란을 틈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듯, 일방적인 헝가리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윽고 10분 경, 하프라인 아래의 센터서클 부근에서 상대 센터 하프였던 존스턴에게 마크당하던 푸스카스가 히데쿠티에게 비스듬히 전진 패스를 주고 앞으로 들어갔다. 혼란에 빠진 존스턴은 일단 히데쿠티의 5미터 앞쪽에서 공간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자유로운 상태에서 투 터치로 볼을 다루던 히데쿠티는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의 레프트 쪽에 전진해 있던 푸스카스에게 볼을 넘겨주며 2대1 플레이를 시도했고, 푸스카스는 바로 원터치로 존스턴과 라이트풀백인 램지의 사이로 히데쿠티에게 패스를 찔러주며 노마크 찬스를 만들었다. 히데쿠티는 이를 지체없이 슈팅으로 연결했고, 키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심판이 이를 오프사이드로 선언했다는 것인데, 자료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 푸스카스의 패스를 받기 전, 히데쿠티 앞에는 무려 3명의 수비수가 앞선 라인에 서 있었다. 명백한 오심 덕에 잉글랜드는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헝가리가 전술적으로 잉글랜드에 대해 어떤 이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명확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전진해있던 존스턴 혼자서는 히데쿠티와 푸스카스 양자를 상대할 수 없었으며, 히데쿠티는 존스턴이 전진하여 비어있던 공간을 파고듬으로써 후방에 남아있던 다른 수비수들을 닭 쫓던 개 꼴로 만들 수 있었다.
이 경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대다수의 글들이 언급하는 것은, 히데쿠티가 등번호만 9번이지 실제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뛴 False9로서, 상대 센터 하프였던 존스턴이 자신을 대인마크하기 위해 미드필더로 올라오면 코치시나 푸스카스가 공간을 침투할 수 있도록 하고, 존스턴이 대인마크를 포기하고 원래의 위치를 고수하면 중원에서 활개치고 다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옳은 해석이나, 이 경우 히데쿠티의 개인 전술적인 탁월함을 간과하게 된다. 히데쿠티는 존스턴을 밖으로 끌어낸 뒤, 자신의 스피드와 드리블을 이용해서, 혹은 2대1 패스에 의해서 존스턴을 농락하고 직접 빈공간으로 들어가 잉글랜드의 골문을 두드렸다. 마치 만화 슬램덩크에서 산왕의 센터 신현철이 자신의 마크맨인 채치수를 외곽으로 끌어낸 뒤, 날카로운 드라이브 인에 의해 득점을 종종 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15분 경, 다수의 인원을 하프라인 너머로 전진시키며 지나치게 공격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던 헝가리는, 패스미스를 범해 볼을 뺏긴 뒤, 그리 빠르게 전개되지 않은 잉글랜드의 역습에 의해 배후 공간을 내주며 시웰에게 실점을 범하고 만다. 5분 전에 오심으로 골을 취소된 것이 아쉬울 법한 상황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잉글랜드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경기를 한 것은 아니다. 물론 볼 탈취 이후 공격을 전개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고, 하프라인을 넘어서는 것을 어려워하긴 했지만, 비교적 공방이 서로 오가는 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스코어도 1-1이었으니 말이다.
반격에 나선 헝가리는 5분 동안 잉글랜드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하프라인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강하게 공격하며, 앞선에서 볼을 차단하여 내내 몰아쳤다. 그러던 와중, 치보르가 레프르 공간으로 침투하여 푸스카스와 함께 문전 혼전 상황을 유발시켰고, 푸스카스는 넘어져 등이 땅에 붙어 있는 상황에서 영리하게 히데쿠티에게 패스를 했다. 히데쿠티는 이를 침착하게 골로 연결하였고, 동점이 된지 5분 만인 20분 경에 다시 헝가리가 리드를 잡았다. 벌어졌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혼란에 빠진 것인지, 직후의 킥오프 상황에서 무력하게 볼을 뺏겼고, 부다이는 2대 1 패스를 시도하며 노마크 상태에서 박스의 라이트쪽 각도로 파고 들었다. 다행히 부다이의 슈팅은 빗나갔지만, 양팀의 기세는 명확히 대비되었다. 이후로도 4분 내내 헝가리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으며, 시웰이 한 순간 시도했던 역습이 헝가리 수비진에 의해 무위로 돌아간 뒤, 헝가리는 라이트백에서부터 패스를 여유롭게 주고 받으며 라이트와 센터를 오가는 패스를 8번 연속 이어나갔고, 치보르가 라이트 사이드에서 올린 크로스를 문전에서 발로 받은 푸스카스는 커버를 들어온 라이트를 왼발만으로 시도한 짧은 드리블로 농락하여 벗겨버린 뒤 노마크 상태에서 득점을 올려 3-1로 리드를 벌렸다. 잉글랜드 해설자조차 "Lovely Goal!"을 외칠 정도로,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다시 3분 뒤, 코치시의 프리킥이 푸스카스를 맞고 굴절되어 4-1로 스코어가 벌어졌고, 이것이 결승골이 되었다.
이후로도 헝가리의 주도 하에 경기가 진행되었고, 잉글랜드는 이에 무기력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존스턴은 대인마크를 하러 전방으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자연히 중원은 헝가리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4-1이라는 스코어는 헝가리 선수들의 경각심을 감소시켰고, 점차 안정을 찾은 잉글랜드는 대등하게 공세를 펴나가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클리어링 미스로 얻어낸 찬스가 크로스에 의한 헤딩 슈팅으로 이어진 것이, 헝가리 골키퍼의 놀라운 선방에 막힌 것이 좋은 예였다. 이후 2분 뒤, 단 두 번의 패스에 의한 다이렉트한 페네트레이션을 통해서, 최전방에 있는 모르텐센이 프리한 상태에서 득점을 올리면서 4-2로 한 점을 따라 붙었다.
이 득점 직후의 약 3분 여가 잉글랜드가 전체 경기 중에 가장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여준 때일 것이다. 그러나 푸스카스의 킬패스가 라이트의 부다이에게 연결되어 오픈 찬스를 맞기도 하는 등, 그저 독에 오른 저항 이상이 아니었다. 소강 국면이 이어졌고, 그 상태로 전반이 끝났다.
후반 들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매튜스의 측면 공격이 효과를 보는 듯 했지만, 결국 3분 뒤에 보직의 중거리슛에 실점을 허용하였고, 재차 4분 뒤엔 아크 서클 부근에서 푸스카스가 짧고 높게 올린 로빙 스루 패스를 뛰어들어온 히데쿠티가 발리로 연결하며 해트트릭을 달성하여 점수는 6-2로 벌어졌다. 2분 뒤, 후방에서 온 롱패스를 모르텐센이 머리에 맞춰 떨어뜨린 것을 헝가리 키퍼가 처리하는 과정에서 반칙을 범했고, 그 결과 PK로 인한 실점을 허용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록 잉글랜드가 3골을 넣긴 했지만, 실제 경기 내용은 그보다 더 비참했다. 헝가리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잉글랜드의 골망을 흔들었다. 첫 골은 개인 돌파였으며, 두 번째 골은 문전 혼전 상황에서의 근접 슈팅, 세 번째 골은 롱볼에 의존하지 않는 짧은 패스에 의한 오픈 플레이, 네 번째 골은 세트 플레이 상황이었고, 다섯 번째 골은 중거리슈팅, 여섯 번째 골은 일타일격의 성격을 지닌 패스에 의한 득점이었다. 푸스카스는 강력한 슈팅과 예리한 킬패스를 구사했으며, 탁월한 드리블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문전 지역에서 짧은 훼이크를 통해 상대 수비를 따돌리는 데에는 굉장히 능숙했다. 헝가리의 3번째 골이 그렇게 나온 골이었다. 히데쿠티는 전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플레이메이커이자 피니셔의 역할을 했고, 부다이는 오른쪽을 끊임없이 파고들었으며, 치보르는 좌우를 넘나들며 수비를 교란했다. 그런 와중에도 헝가리는 경기 중간 중간 템포를 조절하며 패스를 뒤로 돌려가며 플레이할 정도로 운영 감각 역시 뛰어났다. 잉글랜드에서는 매튜스, 시웰, 모르텐센 등이 분전했지만, 히데쿠티와 그 위의 4톱은 전방에서 잉글랜드 선수들이 볼을 전개시키지 못하도록 경기 내내 타이트하게 압박을 가했고, 미들 지역 깊숙이까지 내려와 볼을 탈취하는 데에 가담하곤 했다. 잉글랜드가 3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가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다소 상대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었을 뿐, 잉글랜드 대표팀의 탁월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는 대부분의 공격을 다이렉트한 볼처리에만 의존했으며, 개인 드리블이라든가 조직적인 패스 연결 등에 의해 중원을 거쳐 올라가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 작업이 전반적으로 조야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경기 후,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는 데에 능숙했던 세베시는 사회주의의 집단 연대적 토탈 사커가 제국적 자본주의 국가인 잉글랜드의 개인주의 축구를 격파했다는 것을 당국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함으로써 자신과 팀의 입지를 강화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잉글랜드를 웸블리에서 격파한 이후에도 헝가리는 이집트와 오스트리아와 가진 친선 경기에서 가볍게 승리를 거뒀으며, 월드컵 직전에 헝가리의 홈인 부다페스트에서 펼쳐진 잉글랜드와의 리턴 매치에서 7-1로 재차 승리를 거두며 세계 축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알렸다. 그렇게, 54년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었다.
1) 이를 두고 오래 전의 과거이기 때문에 다득점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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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두고 오래 전의 과거이기 때문에 다득점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헝가리 리그의 경기당 평균 득점은 대략 3.0~3.3 정도로, 현대 축구(지역과 대회에 따라 다르나 대개 2.6 내외)에 비해 1~20% 정도의 차이만을 보일 뿐이다. 즉, 당대의 득점 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푸스카스의 득점은 괄목할만한 수준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또한, 키스페스트가 단 한 번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고 중상위권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팀의 위세를 힘입어 실력 이상의 득점을 해냈다고 보기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