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가 토벌된 다음 해인 1274년, 원은 합포현(창원 마산)에 정동행성을 만듭니다. 이렇게 일본 정벌 준비는 가속화 됩니다.
이를 총감독하는 이는 찰홀, 이 비용을 대는 건 당연히 고려였습니다. 거기다 이를 감독하기 위해 보낸 것은 또 홍다구였죠. -_- 원종은 김방경, 허공, 홍녹주, 나유 등을 보냅니다. 이 때 동원된 이들이 3만 5백명, 여기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오만 가지 방법을 다 씁니다. 원에서는 나름 값을 지불하겠다고 비단 3만 3천여필을 보내서 쌀과 바꾸게 했는데, 백성들의 쌀과 바꾸니 한 필에 열두말 씩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많은지 적은지는 알 수 없군요. 다만 당시 고려에서 저 많은 양의 비단을 바꿀 정도로 사정이 넉넉한 백성들이 얼마나 있었을까는 궁금합니다.
고려에서는 몇 차례 이에 대해 항의합니다. 거기에 여러 가지 비용이 나와 있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부 3만 5백명이 3개월 동안 일하는 비용 - 3만 4천 3백여두
흔도와 홍다구, 제주도에 주둔하는 군사들에게 줄 분량 - 1만 5천석
둔전군에 지원하는 군량 - 2천 47석 + 소먹이 1천여두
그나마 얘네들은 주는 것만 먹어치우는 게 아니라 재해나 기타 여러 이유를 대면서 더 뜯어내려 했습니다. 오죽하면 원에서는 쌀 2만석을 고려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보내줘야 될 정도였죠. 비단을 곡식으로 바꾼 것도 이 때였습니다. 원이라고 고려가 아예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요. 참 악착같이 일이 계속돼 6월에 마침내 전함 900척이 만들어집니다. 인부들은 물에서 나오지도 못 해 다리가 썩을 정도였고, 일 하다 죽은 이도 많았다고 합니다.
+) 이 해 초부터 6월까지 900척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서술될 때가 많은데, 300척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목표가 그거였고 삼별초 토벌 등 때 사용된 전함들도 꽤 있었으니까요.
+) 크게 관련은 없지만 열 받을 사건이 더 있는데, 원군 내에 만자(송나라인)들이 부인이 없다고 결혼도감을 만들어 여자들을 잡아 갔다고 합니다. 그 수는 140명, 그 외에도 원나라 장수들이 재상의 딸들을 강제로 뺏어갔는데 왕도 말 못 했다고 하죠.
5월에 일본 원정군 1만 5천이 들어왔고,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6월 원종은 마침내 눈을 감습니다. 여러 평가가 가능할 왕입니다만, 어쨌든 쿠빌라이 칸과의 세기의 도박은 성공시킨 왕이었죠. 하지만 그 자신의 능력 문제인지 상황의 한계인지 그 후에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합니다. 사람이 미칠 만한 환경이기는 했습니다. 원의 압박에 이리저리 밀리는 동안 그는 정사는 아예 제쳐놓고 환관에게 모든 걸 맡겼다고 합니다.
원종, 충경왕. 비판할 부분은 많지만, 불쌍한 왕이긴 하죠. 쿠빌라이 칸에 건다는 도박은 성공했지만, 그 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그 자신도 망가집니다. 재위 중반쯤 되면 마누라에게 휘둘리고 환관들에게 정사를 맡겨둔 채 놀았다고 비판 받죠. 어쨌든 그는 나라를 구한 공으로 조선시대에도 다른 명군들과 함께 제사를 받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자 왕심은 원에서 급히 돌아와 왕이 되니 바로 충렬왕입니다. 이제 고려는 그의 손에 맡겨집니다. 가장 당면한 과제는 준비가 거의 완료된 일본 정벌이었습니다.
1274년 10월, 1차 원정군이 합포(마산)을 떠납니다. 원나라는 도원수 흔도,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이 이끌었고 그 수는 몽군, 한(여진, 거란 등)군 합쳐 2만 5천이었습니다. 고려는 도독사 김방경, 박지량, 김문비 등이 이끄는 8천명, 스스로를 삼익(날개)군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에 동원된 사공, 격군 등은 6천 7백이었고 전투선과 비전투선 다 합쳐 900척이었죠.
연합군은 하루만에 쓰시마 섬에 도착합니다. 이 때가 10월 5일, 이 때 쓰시마에 주둔한 무사는 겨우 80명이었다고 합니다. 통역을 불러 어떻게든 대화해 보려 했지만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죠. 단 두시간 만에 섬은 점령됐고, 연합군은 여기서 10일 가까이 체류합니다.
다음 목표는 이키 섬, 홍다구는 두 척에서 400명을 상륙시킵니다. 여기서는 슈고 대리 다이라노 가게다카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역시 가신 100명 정도를 이끌고 출진하지만 패했고, 히츠메 성으로 후퇴합니다. 하지만 성이래봐야 이런 작은 섬에 지킬 게 뭐가 있었겠어요. 성이라기보단 관에 가까웠기에 방어에 불리했고, 도민들까지 함께 싸웠지만 결국 이키 섬도 넘어갑니다. 이 때 일본측 피해가 천명 가까이 됐다고 합니다. 그네들 방식대로 군민 안 가리고 다 죽인 모양입니다.
이 다음에 홍다구는 큐슈 서북쪽으로 진군합니다. 특이한 행보였죠. 딱히 여기 상륙한 것도 아니었고, 목표인 다자이후에는 꽤나 멀었거든요. 이에 대해서는 이 지역의 왜구들을 먼저 상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더군요. 마쓰라토라 불리는 이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고려에서 해적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이 큐슈 서북 지역이 대대로 왜구들의 근거지였습니다. 고려에서 요구한 거였든, 애초에 작전이었든 이런 거라면 납득할 만 하긴 한 것이죠.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어딘지 모르겠어요 -_-a)에 상륙했고, 마쓰우라(색칠된 부분)의 무사들이 상륙해 맞서려 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가 10월 17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9일, 연합군은 큐슈 북부로 향합니다. 현 후쿠오카의 하카타였죠.
삼별초 편을 얘기하며 상륙에 유리한 지형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소규모의 약탈용이면 모를까, 대규모 병력이 장기 주둔을 위해 안전한 상륙을 하려면 지형이 중요하죠. 안 쪽으로 들어간 만이어야 하고, 후방에 바람을 막아 줄 섬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해당 지역이 백사장 등 상륙에 좋기도 해야 하죠. 이런 곳이 보통 대형 항구가 되고, 하카타는 고려는 물론 조선 때도 한일 교역의 거점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서일본에서 관광, 무역 모두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백제 멸망 이후 일본은 대륙과의 외교 및 무역을 다자이후 하나로 제한했는데, 이 다자이후가 하카타의 배후에 설치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19일, 여몽연합군은 하카타에 상륙합니다.
이쯤 해서 전편에서 다 얘기 못 했던 일본의 체제를 설명해야겠죠. 일본은 많은 쿠니(國)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율령 체제를 완비하며 이 지방에 고쿠시(國司)를 파견했죠.
+)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 하나 더. 나라를 뜻 하는 말은 國과 邦이 쓰입니다. 조선이 중국에 대해 "소방이 어쩌고" 할 때 방이 이거죠. 이 둘이 혼재하다 국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게 되는데 그 이유가 한 고조 유방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휘라고 해서 황제든 왕이든 북조선왕조의 수령님이든 (...) 같은 이름을 쓰지 못 하게 하는 거였죠. 북한에서는 아예 걔네들 생일도 못 맞추게 하려고 신고를 늦춘다고 하는군요.
고려 때 참 짜증났을 게 바로 이겁니다. 태조의 이름은 왕건建, 혜종의 이름은 왕무武... 정말 많이 쓰이는 한자를 썼죠. 때문에 건국을 건국이라 못 하고 개국이라 했으며, 무신을 무신이라 못 하고 범 虎를 썼습니다. -_-;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이성계고 이방원이고 왕이 된 후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로 이름을 바꿨고, 이도 등 왕들의 이름이 참 낯선 한자로 쓰이는 이유도 이거였죠. 이런 피휘는 과거에 쓰인 책들이 어느 시대에 써졌는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도 쓰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얘기를 돌려서; 막부는 이 자리를 슈고(수호守護)로 대체됩니다. 문제는 이렇게 파견된 지방관들과 현지에 쇼군 직속의 무사들로 영지를 가지고 있는 고케닌(어가인御家人)과 대립하게 된 것이죠. 이런 저런 문제로 슈고다이(수호 대리)라 하여 현지의 호족들이 이를 대리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전국시대가 되면 이게 유명무실해지죠. 이런 슈고들을 몰아내고 자기 영지를 확보하는 "하극상"을 얼마나 잘 했느냐로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능력을 가늠하게 되거든요 (...) 물론 슈고 출신으로 전국시대에 활약한 다이묘들도 있긴 합니다만.
다자이후를 지키던 자는 쇼니 쓰네스케, 그에게 소식이 접수된 때는 13일이었습니다. 그는 급히 막부와 교토에 소식을 전한 후 큐슈 내의 슈고와 고케닌, 지토(슈고와 같이 파견된 지방관입니다)들을 총동원 합니다. 동원된 무사는 5375기, 이를 통해 이에 맞선 일본군 총 병력을 1만에서 1만 7천 정도로 잡습니다. 일본의 경우 전투병과 비전투병의 구분을 하기 때문에 정확한 집계는 어려워 보이네요.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19일에 교두보를 마련한 여몽연합군은 20일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등 3개 방면에서 대대적으로 상륙합니다. 이 때 김방경은 모모치바라에 상륙해 사와라(삼랑포)를 넘어 내륙으로 진군했는데, 이에 일본측 기쿠치가 맞서지만 김방경의 활약과 미리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던 원군의 협공에 처절하게 패했죠. 다른 지역에 상륙한 원군 역시 손쉽게 승리를 거둔 후 현 후쿠오카시 중심부를 거의 점령했다고 합니다.
이 때 김방경이 정말 잘 싸워서 흔도는 이렇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비록 몽고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
이게 고려사 김방경전 등 고려측 기록에 나오는 거라서 신빙성이 의심되긴 합니다. 반대로 고려군이 건성으로 싸웠다고 하기도 하거든요. 거기다 전개가 고려군은 잘 싸웠고 몽고군은 도망만 가다가 진격을 외치는 김방경을 질투해서 후퇴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돼서 한층 더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퇴의 이유까지 합쳐 다음편에서 제대로 고찰해 보겠습니다. 일단 이 1차 뿐 아니라 2차부터 그 후의 이야기들까지 합치면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오는 것 같으니까요.
수가 적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죠게 모~야?"
"갈매기겠지~"
2분 정도까지만 보시면 됩니다. 중국어나 몽골어 쓰는 엑스트라보단 한국어 쓰는 엑스트라를 구하기가 쉬웠나 봅니다. -_-; 정작 홍다구나 김방경은 중국 배우 썼다는군요. 아 참고로 개그 뭐 그런 게 아니라 NHK 정통 대하 사극입니다 (...)
당시 일본의 전쟁 방식은 참 낭만적이었습니다. 우는 살(명적)을 쏘아 전투 개시를 알린 후 사무라이가 한 명씩 나와서 기이일게 나노리를 읊는 것이죠. 영상에서 보시면 투석기에서 쏘아올린 게 자기에게 날아오는 동안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계속 말 하고 있습니다.
+) 저기서 쏘아 올리는 건 철포라 하여 원시적인 화약 무기라고 합니다. 성능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고 합니다만 놀라게 하기엔 최고였겠죠.
이렇게 길게 길게 읊은 후 활이나 칼로 겨루는 식이었죠. 헌데 대륙에서 국가대항전을 벌이던 이들에게 이런 격식을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됐죠. 우는 살 같은 신호용 화살은 작전을 내릴 때 씁니다. 무슨 작전? 진격이죠 (...) 고려든 몽고든 활 쏘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던 나라였구요. 나름대로 우국 충정 내지 자기 가문의 영광을 위해 결사 항전했을 일본군이 우르르 무너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세한 전황은 다음 편에 하고, 이 얘기를 좀 더 해 보죠.
외침이 없었던 일본 내의 전쟁에서는 이런 낭만적인 전투가 필수였습니다. 단지 겉멋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죠. 대장끼리의 결투로 끝나면 아군의 피해도 적어지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피해는 없다시피 하니까요. 같은 섬 안에서 살육전을 벌이면 뭐 -_-; 다 죽는 거죠. 때문에 일본은 전투병과 비전투병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비전투병이나 일반 백성들을 죽이는 걸 철저히 막았습니다. 오죽하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욕 먹은 이유 중에 "해전 중에 뱃사공을 노려서 죽인 것"이 있을 정도죠.
통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장인 시대가 많았지만, 개개의 다이묘들은 자기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기 이전에 바로 근처의 다이묘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은 비교적 먼 나라 얘기였죠. 다이묘들끼리 싸울 때 힘이 딸린다 싶으면 할복으로 자신만 죽으면 부하와 백성들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게 합의된 것이었죠.
대신 이런 "규칙"을 어기고 끝까지 싸우다 성이 함락되면 본보기로 성 내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도 관례였습니다.
이전 편에서 언급한 쿠스노기 마사시게는 이런 규칙을 깨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에야 "저런 무사도를 모르는 촌 것"이라 욕 먹었겠지만요.
일본 내에서도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런 낭만적인 생각은 남아 있었습니다. 때문에 임진왜란에서 정말 큰 충격을 받게 되었죠.
한국의 경우 고려 이후에는 이런 게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삼국시대에도 이런 경향이 꽤 있었을 거고, 후삼국시대에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죠. 전쟁은 중앙군이 거의 도맡아 하고, 전투는 주변 호족들에게 자기 편에 붙으면 유리하다는 걸 알리는 행위였으며, 이들은 병력 지원보단 물자 지원을 했습니다. 이 때라면 그나마 "낭만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달랐죠.
여요전쟁부터 대몽항쟁까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어느 정도 완성된 이후의 전쟁은 모두 국가대항전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다 죽는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죠. 특히 대몽항쟁기 몽고의 모습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외세의 침략은 곧 자기 자신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였죠. 조선 때 완전히 장착된 유교 사상은 그에 대한 주요한 명분이 됐습니다.
항복만 하면 살려준다는 일본군, 하지만 조선인들은 장수가 도망가든 뭘 하든 맞서 싸웠고, 이는 진주성 전투 등 많은 학살의 원인이 됐습니다. 뭐 이런 거 외에도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있었지만요. 장수가 도망가고 왕이 도망갔으니 대충 항복하겠지 했던 일본군은 점령지역에서 우후죽순 솟아나는 의병과 전열을 정비해 반격하는 관군과 만나게 됩니다.
결국 이런 건 모두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는 전쟁은 곧 침략자와의 전쟁이며, 이 절대악과 무조건 싸워 이겨야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외세의 침략이 없었던 일본은 자기들끼리 격식을 차리고 피해를 입는 계층은 최대한 줄여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싸워 다 죽을 테니까요. 대신 이렇게 싸우는 계층은 죽음을 절대 두려워하면 안 됐습니다.
이런 "정정당당" "적이라고 다 악은 아니다"는 식의 생각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죠. 문제는 이게 "절대악"이 돼야 하는 상황에서도 응용해 버리는 겁니다. -_-; 저 피안도의 경우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건 물론 인류 전체가 흡혈귀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흡혈귀랑 정정당당 어쩌고 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잘 싸운 조선 장수나 조선군들은 따로 무덤을 만들어 주며 경의를 표했던 일본군, 반면 정말 열심히 잘 싸운 일본 장수에 대한 우리 장군님의 감상은 이랬죠.
"고오오오얀 노오옴"
이런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사건이 바로 서양의 개항 요구 때였습니다. 일본의 경우 페리 제독이 흑선을 몰고 와 개항을 요구할 때, 백성들은 근처 산에 올라가 도시락 까 먹으면서 이걸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 반면, 조선에서는 평양에 온 제너럴 셔먼호에 대항해 군관민 합동으로 싸워 배 자체를 불태워 버렸죠.
뭐... 이랬던 나라는 후에 자살 공격을 국가 차원에서 권장하고 계획하는 미친 나라가 됐죠.
자, 얘기 마무리 짓겠습니다.
승승장구 했던 여몽연합군이지만, 일본군 역시 마냥 무너지진 않았습니다. 나름 잘 싸운 이도 있었고, 원군 장수 유복형이 화살에 맞아 낙마하기도 했죠.
일본군은 후퇴해 맞서려 했지만, 의외로 추격은 없었습니다. 연합군은 다시 함대로 돌아가 하루를 보냈죠.
그리고, 그렇게 오래 준비했던 전쟁은 단 하루만에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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