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차(車)는 앞모습만 보아도 차종을 알아맞출 정도로 달달 외웠고 명절날 시골에 내려가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명절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차(車)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차는 소나타였다. 럭셔리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평범하지도 않은 디자인, 대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안정적인 승차감과 튼튼함. 신기하게도 오늘날 소나타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수출량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난 소나타를 좋아한다.
차(車)는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특징, 새로운 옵션, 새로운 가격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전(前) 모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혹은 추억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녀에게 오래된 소나타 같은 존재였다. 나는 돈이 많은 집안의 자식도 아니고, 평범하다고 하기엔 세계관이 독특하며 많은 사람들과 두루 어울리고 나쁘지 않은 대학을 다닌다. 그녀에게 나와의 첫만남은 새로 나온 소나타를 보는 기분이었으리라. 다행히 그녀 또한 소나타를 매우 좋아하는 여자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졌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마치 운전자가 새로운 소나타를 원하는 것처럼. 그녀는 내가 더 매력적이고 능력있는 남자가 되길 바랬다. 그녀의 주위에는 워낙 돈 많고 능력있는 남자들이 많았고 자연히 그녀는 더 럭셔리하고 더 예쁜 디자인의 차(車)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집 앞 주차장에 있는 소나타가 걸렸지만 곧 벤츠, BMW, 렉서스 등 고급차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고, 소나타는 주인을 잃은 채 주차장에 방치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차(車)를 구입하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낡은 소나타가 되었다.
나는 그런 차(車)였다.
차(茶) 중에서도 나는 홍차를 매우 좋아한다. 나는 원래 지독하게 커피를 찬양하던 사람이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마시게 된 홍차 한잔에 매료되었다. 나는 특히 홍차의 소박하지만 달콤하게 자극하는 향기를 좋아했다. 녹차가 편안함과 시원함을 상징한다면, 홍차는 열정적이지만 부드러움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그녀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일에 열정적이려고 노력하는 남자였다. 비록 지금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나의 꿈을 위해, 나의 가족을 위해, 나의 친구들을 위해, 무엇보다 나의 그녀를 위해 시간을 기꺼이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마음에 작은 홍차 한 잔이 되길 간절히 바랬다. 나는 그녀에게 열정적이지만 부드러운 남자이길 노력했다.
차(茶)를 마실 때 우려내는 티백은 다 우려내면 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잔의 바닥으로 갈수록 차의 맛은 더욱 쓰기 마련이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첫 잔의 향기와 부드러운 맛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잔이 비워질수록 처음의 그 향기는 없어진채 내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술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평범한 차의 쓴맛 뿐이었다. 티백은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 차의 향과 맛을 우려내는 역할을 하지 못한채 쓸쓸하게 버려진다.
처음의 나는 분명 그녀에게 홍차였다. 그녀는 나의 향기와 맛을 좋아했고 나는 그녀의 마음에 홍차 한잔이 되어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그녀에게, 향기는 사라지고 쓴맛만을 품은 식어버린, 그냥 평범한 차 한잔일 뿐이었다. 나는 더이상 그녀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되돌릴 수 없었고, 그녀 또한 더이상 차를 찾지 않았다. 나의 향기는 그저 겉멋에 젖은 가격만 비싼 향수의 향기일 뿐이었다. 나의 맛은 남들과 다르기를 거부하면서 그저 방관하는 것이 몸에 베어버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고리타분한데다 매력도 없는 씁쓸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런 차(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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