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는 선조 대의 문인으로, 벼슬자리를 멀리한채 음풍영월하며 전국을 누비던 특유의 방랑벽과 재기 넘치는 문재로 유명한 인물이다.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법도를 초탈해서 호방하게 지냈으며, 봉건적 권위에 반항하면서 자유분방한 인생 자세를 보여 주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어쩌면 그는 당대의 유교적 윤리관에서 볼 때에는 용납되지 않을 인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임제가 평안 평사의 소임을 받고 부임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시를 지었다가 유가들에게 수난을 겪었다는 일화도 이러한 임제의 인간상을 한 마디로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나 그는 시문을 통하여 그의 낭만성을 보여 주었는데, 조선조 선조 때, 평양 명기인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노래도 그 중의 하나다.
북창이 맑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맛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
그러자 기생 한우(寒雨)가 이렇게 화답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듸 두고 얼어 잘이 오늘은 찬비 맛자시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
임제의 노래를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이렇다.
북녘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맑다고 하기에 우장도 안 가지고 길을 떠났더니, 가는 도중에 날씨가 나빠져 산에서는 눈이 어리고, 들에서는 찬비가 내리는 구나. 이래저래 오늘은 찬비를 맞았으니, 할 수 없이 언 몸으로 잘까 하노라
하지만 여기에서의 찬비란 한우(寒雨)를 지칭하는 중의적 의미이며 ‘얼어 잘까 하노라’에서 ‘얼다’의 의미는 ‘남녀가 음양을 나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임제는 한우에게 푹 빠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함과 동시에 은근 슬쩍 이른바, 부킹을 시도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향한 은유적인 큐피트의 화살이 참으로 은근하고 재미있다. 이 짧은 노래에서도 임제라는 인간의 풍류남아로서의 멋을 충분히 느낄 수 가 있다.
헌데 더 재미있는 건 이러한 임제의 구애에 대한 한우의 화답이다. 한우의 화답시를 있는 그대로 풀이해보면 이렇다.
어찌 얼어 자겠는가? 무슨 일로 얼어 자겠는가? 원앙새 수놓은 베개와 비취색 이불을 어디다 버려두고서, 이 밤을 얼어 자려 하시나이까? 오늘은 (그대가) 찬 비를 맞고 오셨으니 덥게 몸을 녹여 가며 자려 하나이다
사실 첫 구절만 딱 들었을 때 임제는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얼어 자느냐’ ‘무슨 일로 얼어 자느냐’
라고 되물으며 한우가 약간 튕기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어찌 얼어자겠냐'는 말이, '운우지정의 거절'을 의미하는지 '추위에 떨며 자지 말라'는 말인지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우는 다음 순간,
‘원앙새 수놓은 베개와 비취색 이불을 어디다 버려두고서, 이 밤을 얼어 자려 하시나이까?’
라는 말로 '얼어잠'의 의미를 밝히며, '운우지정' 쪽으로 자신의 마음을 슬쩍 털어 놓는다.
이제야 임제는 잠시 긴장했던 마음을 놓았을 듯싶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오늘은 찬 비 맞고 오셨으니 덥게 몸을 녹여 가며 자려 한다’며 기어이 마음을 허락해주는 한우.
말 그대로 그 남자 못지않은, 넘치는 재기와 재치를 지닌 그녀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두 사람의 화답 시조에는 작은 만남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고전적인 멋과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지금 시대에 처음 만난 혹은 잘 모르는 이성 앞에서 직접 시를 지어 주는 남자 혹은 여자가 얼마나 될까? 옛 시대의 연애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풍류가 있고 멋과 운치가 있었다. 특히 이러한 멋과 풍류에 톡톡히 한 목을 하는 것이 노래를 받아주는 기녀들의 재치이다. 이런 시조들을 읽다보면 재치 있는 두 남녀의 감칠맛 나는 은근함과 운치가 내심 재밌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2. 정철과 진옥의 화답시조 (노골적이면서도 저급하지 않은 멋스러움)
여기에 또 임제-한우 커플 못지않은,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또 하나의 커플이 있다. 바로 선조 대의 유명 정치인이자 조선 시대 명문장가였던 송강 정철과 기생 진옥이 주고받은 화답시조이다.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진옥(眞玉)이라는 기생을 만나게 된다. 어느날 방안에 홀로 누워있던 그에게 한 여인이 찾아와서 흠모와 연정의 마음을 전하는데 그녀가 바로 진옥이다. 정철은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반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진옥과 정철의 애정은 서로의 마음속 깊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때 정철의 나이가 56세인 건 안유머.)
사실 송강과 진옥의 시조는 해석하기도 참으로 민망하다. 은근하고 은은한 맛이 있던 임제와 한우의 시조에 비하면 참으로 낯 뜨겁고 노골적인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해석을 하자면, 풀이에서의 '진옥(眞玉)'은 말 그대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자연옥을 뜻하면서 동시에 기생 진옥을 의미하며 살송곳이란 살로 된 송곳으로, 이른바 남성의 성기를 비유하는 말이다. 내용인 즉, 진옥과 하룻밤의 운우지정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시조에 담아 조금은 능글맞고 노골적인 시어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보통의 여자라면 이러한 노래를 듣고 심히 당황할만한데 기생 진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재치를 보여주는데 진옥의 화답시조를 분석하면 이렇다.
진옥의 시조 또한 해석하기에 매우 낯 뜨겁고 민망하다. 즉, 여기에서의 '정철(正鐵)' 또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를 뜻하면서 동시에 송강 정철을 의미한다. 그리고 풀무란 일반적으로 철을 녹이는 용광로를 의미하므로 여기에서의 살풀무란 살송곳을 녹일 수 있는 여성의 성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더불어 녹슨 철인줄 알았다며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패기(?)까지. 이쯤 되면 송강보다 한술 더 떴으면 더 떴지 덜 하지는 않은 해학과 재치를 느낄 수 있다.
조선의 당대 명문장가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여인의 이러한 기지와 재치가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가. 누가 함부로 이 노래를 외설적이고 노골적인 잡문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룻밤 사랑과 풍류가 이만큼 멋들어지게 어울려진 예도 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을 것이다.
사실 남녀 간의 하룻밤 사랑이야 조선시대보다 더욱 더 흔해빠지고 많아진 요즘 세상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그 시절에는 하룻밤 사랑에도 이렇게 풍류가 있었고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함께 전해주는 멋스러움과 운치가 있었다.
같은 하룻밤 사랑이라도 우리 조상들의 연애는 이처럼 깊은 맛과 운치가 담겨 있다. 가벼운 듯 하면서도 한없이 깊고 잔잔한 것이 그 시절 그들만의 매력인 것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점점 가벼운 인스턴트식 사랑에 길들여져 가는 우리들에게 진정성이 담긴 잔잔함과 깊은 여운의 힘을 일깨워주는 조선의 진정한 로맨티스트들이 바로 이들이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