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고민거리가 있어. 상담 좀 해줄래?"
백짓장처럼 질린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결투신청이라도 하는 듯이 경직된 어깨와 어색한 음성. 만약 이 상태로 군복을 입고 사격장에 서 있다면, 제아무리 악마같은 조교라도 어깨를 주무르며 친근한 말투로 세상은 아름답다고 위로할 것만 같습니다. 금방이라도 조정간 단발 상태로 총부리를 돌릴 것 같은 표정이라서.
"뭔데?"
무슨 이야기냐는 듯 배시시 웃으며 돌아봅니다. 저는 한숨쉬며,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말합니다.
"니가 자꾸 좋아져. 어떡하지?"
분명한 고민 끝에 꺼낸 말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떨리는 말투. 주먹을 쥐었다 펴며, 꿀꺽 소리가 날 정도로 마른침을 삼키며, 과도하게 긴장했다는 것을 광고하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수류탄 투척에서 열외될 것만 같습니다.
"글쎄.. 어쩔 수 없지."
애매모호한 웃음. 거절의 난처함일지, 나로서는 절대 짐작할 수 없는, 다른 성별의 애매한 표정과 말은 저를 미치게 만듭니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걸까. 내가 좋아하니, 어쩔 수 없이 사귀어 주겠다는 걸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든 말든, 자기는 어쩔 수 없다는 걸까. 젠장. 말에 주어를 갖다 놓으란 말이야. 서술어가 오면 수식하는 주어가 와야 하잖아.
그리고 한참의 어색한 침묵. 과도한 긴장상태로 인해 점점 어지러워질 지경입니다. 물러서면 안돼. 스스로에게 독백하며, 웃어보려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며, 한숨처럼 내뱉는 말.
"...계속 그래도 되는 걸까?"
그래. 난 니가 좋아. 그 사실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무리 지워내려 애써도, 아무리 아닌 척 하려 해도, 이미 난 니가 좋아. 그건 사실이잖아. 매일 밤 너만을 생각했어. 매일 밤 너를 꿈꿨어. 내 옆의 너를 상상했어. 니가 책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니가 리만 제타함수의 편미분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니가 경영전략 외부환경분석 중 5force model을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니가 밥을 사달라고 했을 때, 니가 고기를 굽고 있는 내게 쌈을 먹여주었을 때, 같이 커피를 마셨을 때, 게임에서 걸려 러브샷을 했을 때,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다 걸려 친구들이 우리 사귀느냐고 웃었을 때, 그리고 그럴 때마다 니가 어색하게 웃을 때, 난 미칠 것처럼 기뻤어. 이 감정은 진짜야. 거짓말이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너도 웃었잖아. 나와 함께 있을 때 넌 즐거웠잖아. 내 농담을 재미있어했잖아. 오빠와는 정말 잘 맞는다며 좋아했잖아. 내 모든 것을 걸고,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 너도 나를 싫어하지 않아. 아무리 니가.....
"나는 오빠를 친구로서 좋아해."
탕! 조교가 달래고 달래다 지쳤는지, 결국 이상증세를 보이는 훈련병을 쏴 버렸습니다. 아, 말 한마디가 이렇게도 강력하게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니. 니 위로 내 밑으로 다 집합하라는 말보다 더, 한달 동안 군장 돌라는 말보다 더, 일조점호 생략하고 제설투입하라는 말보다도 더, 나를 힘들게 하는 말도 있구나.
"......그래."
그래. 알았어. 니 웃음은, 난처함이었구나. 기쁨이 아니었구나. 이 오빠에게 어떻게 거절을 말할지 난처했구나. 이해해. 충분히 난감하겠지. 비록....
"친구로 잘 지내자."
탕탕! 이제는 제가 사격장 조교가 된 기분입니다. 누가 조정간 점사로 하래? 영점사격 없이, 크리크 수정 하나 없이 정확한 탄착군을 형성하는 이 잔혹한 2연타. 당장이라도 특급전투요원 추천을 받아도 되겠습니다.
"그래.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그녀는 솔직했는지 몰라도, 나는 솔직하지 못하군요. 당장이라도 멱살을 틀어쥐고 그동안 나를 놀렸던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마땅하건만, 어울리지 않게 쿨한 척을.... 제 인생 두번째 고백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뒷얘기>
아실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고백은 사실 문자고백이었습니다. 그때의 이모티콘과, 상황을 떠올리며 단편소설을 써 봤네요.
그리고 일주일 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밥을 먹자네요. 그래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같이 공부하자네요. 같이 공부했습니다. 집에 데려다 달라네요. 집에 데려다 줬습니다. 술을 먹자네요. 술을 먹었습니다. 흠. 이토록 친구로 잘 지내자는 말을 충실히 준수하는 여자는 처음 보겠군.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고백하라는 말 같아서, 다시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한 친구에게서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어장속에 넣고 적당히 웃음을 주고, 밥을 얻어먹고, 자신이 배우고 싶은 공부를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남자를 비웃었습니다. 그런 한심한 놈이 있냐고. 그러자 친구는 저를 더 한심하게 쳐다보았습니다. 널 어장속의 물고기에 대입해볼 생각이 없냐고. 너무도 슬프게도,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유유히, 오늘 내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고백이나 해야징
(그녀와, 그녀의 어장속에 있는 수많은 물고기들과 마주한다.)
......저 그냥 나갈래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냐고요? 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