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대구는 참으로 이색적입니다. 평생을 이 땅의 많은 것들과 울고 웃으며 지냈는데,
술 한잔 기울이기 위해 만난 친구가 반가운만큼 어색한 것처럼, 이 곳 또한 마찬가지네요.
일년만에 대구에 내려와 확인한 것은 나의 무엇이였을까, 그것은 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다시 뒤집어쓴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누군가의 스무살은 그 생기를 이기다 못해 캠퍼스 이곳 저곳에 그네들의 아름다움을 빼곡히 채록해놓았고
스무살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또한 들뜨고 행복해보이며 동시에 묘한 결핍에 마음이 닳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이 참 보기 좋더라구요. 세상 모든 일이 사랑 또는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서부터*,
철없는 그네들의 행동 또한 앙증맞고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사랑받고 있구나. 사랑받고 싶구나. 사랑하고 싶구나.
그들의 오밀조밀한 눈빛이며 걸음걸이, 말투 하나에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들이 묻어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 또한 무언가를 위해 달려갈 것이며, 누구도 정해준 적 없는 커리큘럼을 통해 인생을 배워나갈 것이며
생각보다 세상이 아름답지도 않고, 생각만큼 추악하지도 않다는 것을 차근차근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 할 것이며
훗날의 언젠가는 스무살의 본인을 몹시나 보고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자, 왠지 같은 사명감을 짊어지고가는 동료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순이를 사랑하자 온 길에 순이밖에 없었단 누군가의 말처럼*, 청춘을 사랑하는 그들의 젊음에게 있어서는
고통 또한 경험이며 발전이자 풍족한 인생의 거름진 밑거름이 되어줄터이니, 그것이 몹시 부러워지더라구요.
세상의 모든 것에 물음표를 들이밀며 살아 간다는 것.
그것은 마음 하나 다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지는 것과는 달리 몹시 귀중한 시간이며 묘하게 긴장되는 일상이겠지요.
감상은 이정도까지입니다. 대학로를 거닐며 너를 기다린 것도 한시간째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의 대구보다 훨씬 더 오랜만에 너를 만났습니다.
#3
"...오랜만이네."
"응... 그러네."
"..."
"..."
"집에 가야지?"
"응.. 아니야 나 잠깐 나온거야"
"그래? ...커피나 한잔 마실래?"
"...그러자."
#4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너를 대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너의 갈증난 눈빛도, 너의 미소도.
오랜만에 가슴속의 어딘가가 꿈틀대며 아파하는 게 느껴집니다. 나의 마음이 깜짝 놀란 듯 싶었어요.
그것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각이였고, 너에게 그런 특유의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만에 다시 깨닫습니다.*
왜 이리 오랜만인게 많은지, 그런데도 어제와 같이 느껴지는 일들이 많은지. 생각보다 너의 지분이, 아직 많이 줄어들지 않았더라구요.
참. 그래. 나는 너의 미소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본적이 있었지요. 너의 웃는 그 얼굴은 항상 나를 위로하는 표정이였습니다.
비굴함과 오만함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듯 하고, 눈치를 보듯 헤실헤실 불안한 너의 웃음 속에는 고뇌의 1초가 빠지질 않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무척이나 상냥하게 느껴졌던, 달래는듯한 웃음*. 너의 미소 속에서 지난 날 나는 무엇을 느꼈던걸까.
혹시나 나는 너를 뼛속 깊이 믿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나는 너에게 사랑받고 싶은만큼 너를 사랑했었고, 너에게 이해받고 싶은만큼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너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듯 싶어요. 달래는듯한 웃음은 혹시나 누군가 너를 달래줬으면 하는 생각은 아닐까.
항상 나는 너를 구박하고 못살게 굴며 괴롭혔지만, 그래도 너의 삶에 내가 그루터기였다는 사실은 너도, 나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겁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해주라는* 황금률의 법칙.
그치만,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존재의 자기운동으로서의 연애라는 건 불가능한걸까요*.
그렇게나 너에게 헌신적이였던 나조차도 어떠한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것만 같아
스무살의 너와 내가(우리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나를 니가 가장 먼저 눈치챌거란 생각이 드는 것조차)
처량하며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괜찮은걸까요. 괜찮았던걸까요. 괜찮냐고, 챙겨주고 믿어주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던걸까요.
#5
"나는 참 나빠."
"..응"
"..아니라고 해주면 안돼?"
"나쁜건 나쁜거니까"
"..응"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그래."
"..."
"..."
"왜 옛날처럼.."
"응?"
"아니야. 너 많이 변했구나"
#6
변했다는 너의 말을 들었지요.
한결같이 너를 대해주는 것이 너무 고맙고 때로는 부담스러우며 가끔은 모든걸 의지하고 싶고 때때로 역겹기도 하다는
너의 술취한 목소리를 듣고나서 두번째로 듣는 너의 취중진담입니다.
너 때문이라고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실은 그것은 너 때문에 아팠던 나의 지난 날에 대한 비난이며
나를 사랑했고 너를 사랑했던 우리의 스무살이 빛바래는 짓이란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변한건 너 때문이 아니지요. 항상 그렇듯, 나를 상처입힐 수 있는건 나 자신뿐입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밀어내며 너를 빤히 쳐다보니, 너는 예의 그 미소를 짓습니다.
난 변했는데, 예전만큼 웃지도 않는데, 야위었단 말을 밥 먹듯 듣는데, 왜 이리도 변하지 않았나요 너는.
너의 그 미소는 왜 여전히 그대로인가요*.
#7
"가야겠다. 너도 들어가야지"
"응. 들어오라고 전화두 오구 그러네"
"멍청아"
"왜 짜샤"
"왜 그 말 기억하냐?"
"또 뭔말 뭐 나 무서워"
"이제 안갈구거든"
"뭔데"
"나만한 남자 없을거란 말"
"..."
"엄청 후회할거란 말"
"..."
"미안하다."
#8
아끼던 가디건을 조그마한 너의 인영에 씌여주고 돌아서는 빗길에 저기 멀리서 너와 술을 마시던 누군가가 우리를 보았던 듯 싶어요.
"와!" 하며 놀려대는 그 부러운 북적임을 뒤로하며 꺼내든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혹시나 많이 후회하며 아파했는지, 너 또한 야위었으며 너의 미소는 훨씬 불안했습니다.
나의 무언가가 너를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세상이 정말 아주 조금만 더 아름다운 곳이고 그래서 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인생에서 너의 지분을 차츰차츰 지워가듯, 너도 그러할거란 생각이 들자 조금은 안도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