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서 거제도와 사천의 거리를 잘 봐 주세요.
생각해보니 저번 편 타이틀인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 편 타이틀입니다. 어느 걸로 보나 이이가 주인공이 됐어야 했는데 이순신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군요.
몇 번의 시행 착오 끝에 bgm을 넣었습니다만, 무한재생이네요. 중간에 끄는 것도 안 되고 -_-; 그래서 bgm은 그냥 링크로 돌립니다.
http://oqualizard.blog.me/90107987936
파워재생을 눌러주시구요 (접기 펴기도 배워야 되나요 ㅠ) 왠만한 거라면 그냥 무한재생하거나 하겠는데 bgm이 너무 웅장... 아니 웃길 수도 있는 관계로 보시는 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뭐 가사 뜻은 다들 아실테니 왜 이 글에 그렇게 넣으려고 노력했는지는 아시리라 믿습니다 :) 혹시 제가 시험삼아 급히 올렸다 지운 글 보신 분들은 그냥 살포시 웃어주세요 ㅠ 다음 편부턴 진짜 나갑니다.
시작합니다.
------------------------
명종 30년, 원준량이라는 인물이 아들을 무과에 응시하게 한 것 때문에 비리 문제로 욕 먹습니다. 이 원준량이라는 인물은 실록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미친 듯이 까이죠.
원준량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원연은 문과였고, 셋째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여기에 관련될 만한 아들은 딱 하나 뿐이죠. 원균입니다. 시작부터 참 화려했습니다.
한편, 20세기 말에 원균옹호론이 등장합니다. 이재범이라는 사람은 "이순신이 혼자 몰래 장계를 올려서 원균이 피해받았다"고 하면서, 원균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장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거였죠.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옥포의 오기)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이 실록의 기록 중 이재범의 원균 정론(후에 원균을 위한 변명으로 다시 출판되니다)에서 추가한 건
[옥포의 오기] 하나였죠. 이거 하나로 저 장계는 옥포해전의 기록이며 진짜 이순신이 그 때까지 혼자 장계를 올려서 원균이 피해 봤고, 원균이 뒤늦게 장계를 올린 거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 근데 저 실록의 기록은 8월 24일. 그 때는 이미 이전의 해전으로 이순신은 물론 원균도 상을 받은 때였습니다. 이재범이라는 사람이 지식 수준이 얼마나 되든 저걸 헷갈렸을 일은 없죠.
[옥포의 오기] 이거 하나로 역사 왜곡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원균은 시작부터 저렇게 더러웠습니다. 그리고 원균옹호론 역시 시작부터 저렇습니다.
1. 경상우수영의 규모
처음에 각 수영의 규모는 다 비슷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각 왜변을 겪으면서 주로 침입하는 곳 등 각자의 상황에 맞추어 변형되었다고 하는군요. 임란 즈음에는 각 좌수영은 작아지고 우수영은 커졌다고 합니다. 임란 중에도 심심하면 바뀌고 후에도 바뀌면서 당시 확실한 숫자를 찾기는 어려운 듯 하네요. 가장 확실한 것은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입니다. 경상좌수영은 현재의 부산 다대포부터 시작해서 동해로 울산 등으로 올라가면서 8포, 전라우수영의 경우 8~11관으로 예상하더군요. 어차피 지도에 나온 보성 왼쪽부터 전라도 해역은 모두 전라우수영 걸로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렇다면 경상우수영은? 일단 기본적으로 알려진 건 8관 16포입니다. 이 중 웅천, 진해, 고성, 거제, 사천, 남해, 곤양, 하동의 8관은 확실하다고 보시면 될 듯 하네요. 인터넷에 퍼진 여러 논의를 보면 8관 20포, 11관 19포 등 다양합니다. 전쟁 당시 시점(8관)이나 전쟁 중 시점(11관)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일단 제 지식으로 확신할 수 없으니 이 정도로 해 두죠.
이런 비율로 추산할 수 있는 경상우수군은 최소 40척, 통설로는 70척, 최대 100척입니다. 징비록 등 당대 기록에서도 그렇게 나오구요.
전쟁이 시작하면서 병력들이 도망가서 다 모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적었듯 경상좌수사 박홍 휘하에 경상우수군은 집결했습니다. 이 병력을 천오백에서 이천으로 추산하니 그 때 모일 수 있는 병력은 다 모였다고 봐도 되겠죠. 1, 2군은 주로 동북쪽으로 움직였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상륙한 게 19일이니 부산포 서쪽 경상우수영 영역은 아직 적이 오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직격타를 맞은 경상좌도의 병력들이 집결했는데 우수영이 집결하지 않은 건 이상하죠. 최전방에서도 집결에 모두 성공하는데 경상우수영만 안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원균에게는 시작부터 도망간 다른 장수들보다 더 죄가 있다고 봐야 됩니다.
위에 언급한 8관 중 전쟁 초기에 함락되었다고 기록된 곳은 웅천, 진해, 고성 세 곳 뿐입니다. 그나마 진해는 파선되서 육지로 표류한 60명에게 당했고 현령은 원균과 함께 도망갔다고 돼 있죠.
원균의 공문이 이순신에게 도착한 게 15일, 임란 당일에 보냈다고 생각하면 이틀 거리죠. 전라좌수군이 집결하기 위해 각 관포에 공문을 보내서 모이는 기한을 3일로 잡았습니다. 경상우수영에도 같은 시간을 적용한다면 임란 발발 당일, 혹은 다음 날에 집결을 명령해도 3군이 김해에 상륙하기 전에 모일 수 있으며, 그 두 배로 잡아도 김해 근처가 아니라면 충분히 모일 시간이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탁영의 정만록에는 개전 직전 경상감영의 검열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전 전 달인 3월달에 경상우수영의 모든 관포를 점검했다는 거죠. 대마도에서의 최후통첩 때문에 이일과 신립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점검하던 때였고, 전쟁광인 김수가 점검하던 때입니다. 예정대로의 숫자가 없었다면 분명 문제가 되었겠죠. 준비가 안 돼 있어서 판옥선이 네 척밖에 없었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2. 원균의 도주 시점
원균이 초기에 도망갔다는 기록은 실록,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등에서 공통되게 나타납니다. 다만 두 가지로 나뉘어 있죠. 모두 옮기면 너무 길어지니 간단히 넣어 보면...
6월 28일 김성일 장계 - 군영을 불태우고 격군만 있는 배로 사천에 숨어 있음 -> 고성에 적이 없어 가라고 몇 번이나 독촉하니 "19일"에 고성으로 갔다가 적이 오는 걸 보고 다시 후퇴. 전라도 수사와 힘을 합쳐 다시 치겠다 함. 남해는 기효근이 이순신이 군량을 다 불태워서 기효근이 돌아와서 어렵게 지키고 있음. 거제 현령 김준민은 혼자 성을 지키다가 근왕하자고 김수가 불러서 육지로 가니 적이 거제도를 점령함
같은 날 김수의 장계 - 조라포, 지세포, 율포, 영등포 등이 비었고 김준민만이 성을 지키고 있음. 원균은 육지로 피하고 우후 우응신에게 관고를 불태우게 함. 웅천 현감 적이 오기 전에 도주.
김수의 다른 장계 - 남쪽 변방을 침범한 적은 수사 원균이 잡음. 자기는 18일에 근왕하러 전주에 왔고 지금 곧바로 님 보러 감.
(이상은 같은 날에 적힌 걸로 봐서 늦게 오거나 그 때 가서 다 같이 적은 걸로 보입니다. 저 장계들은 5월 중에 쓴 것일 겁니다.)
같은 날 전라도 절도사 최원의 장계 - 5월 7일에 옥포 해전 승전 전함
난중잡록
적이 거제도로 가니 원균은 백천사로 갔는데 어선을 보고 적인 줄 알고 노량으로 후퇴. 우후는 백성들을 내쫓아서 백성들이 혼란해졌는데 도망이 늦을까 무서워서 활을 쏘면서 강요. 여기에 임신한 여자 둘이 맞는 등 많이 죽음. 기효근은 창고를 불 태우고 달아났는데 정작 적은 남해에 아직 안 옴 (경상 순영록에서 베낌)
삼도 수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가서 크게 이김. 근데 원균이 이전에도 한 번 갔었는데 적이 많아서 퇴각. 원균은 전함 다 침몰시키고 도망가려고 하는데 이운룡이 막아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함.
자. 이것들을 보면 뭔가 어긋나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원균의 도주 시점이죠. 김성일의 장계에는 원균이 이미 도망갔고 자기가 명령을 내려서 19일에 고성을 탈환하러 갔다고 하죠. 임란이 벌어지자마자 도망갔다는 얘깁니다. -_-; 문제는... 김성일은 이즈음 전쟁이 안 일어난다고 했다는 죄로 잡혀갔을 때라는 거죠. 난중잡록에는 가덕도 (요새 화제가 됐던 그 가덕도 맞습니다. 앞으로 자주 나옵니다)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고 백천사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백천사는 지금의 사천 지방에 있습니다. 거제도보다 뒷편이죠. (이렇게 서로 상이한 기록이 있을 경우 다 같이 적어서 후세의 판단에 맡기는 게 당시, 특히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의 방침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전쟁 초반이라 그런지 혼란스러운 내용이 많습니다. 난중잡록에서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할 때 "전라좌우수군이 모두 모여 있었고" "적이 사천과 남해에 가득 차 있다"고 했죠. 둘 다 사실에 맞지 않은 내용입니다. 전부 의심해 가면서 봐야죠.
일단 맞는 것끼리 맞춰보면
"가덕도까지 갔다가 도망가서 거제도의 우수영 본영 불태우고 전선 다 자침하고 도망"
"사천에 있다가 고성 먹으러 가다 백천사에서 적을 보고 노량으로 도망" (지도 보시면 이것도 웃기죠)
으로 볼 수 있겠죠. 이걸 난중일기에 대입시켜 보겠습니다.
15일 - 90척이 영도 앞바다에 정박
16일 - 부산진 함락
18일 - 동래성 함락
20일 - 김수의 지원 요청 (을 조정에 허락 받기 위해 장계 보냄 -_-; )
한편 임진장초에 보면 20일 김수의 장계에서는 원균에게 출동 명령 내렸다고 함.
26일 - 좌부승지 민준의 서장에 전라좌수군도 지원해야 될 거라고 해서 경상도 각 장수들에게 그 곳의 상황과 집결지 설정해 달라고 함.
27일 - 민준의 서장(23일 작성)에 원균이 출동할 거라 해 왔으며 전라좌수군도 지원하라고 함.
29일 - 적선 500척이 부산, 김해 등 장악 후 각 해변고을 침입. 10척을 깼으나 본영 함락. 당포로 헬프
23-25일분은 없습니다.
경상우수영 본영에서 전라좌수영 본영까지 걸린 시간을 이틀이라고 치면 저기서 -2를 시켜야겠죠. 김수가 20일에 "원균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는 공문이 도착한 걸 보면 원균에게 출동명령을 내린 건 17~18일 쯤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 때 원균이 가덕도로 갔다가 도망쳤다면 김성일이 어떻게든 우도 내에서 반격을 시도하면서 원균에게 고성을 점령하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같은 기록에 여러 장수들을 거느려서 고성을 탈환하려 했다가 후퇴한 게 나옵니다. 원균에게만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함께 간 거죠)
즉, 원균이 김수의 출동 명령에 곧바로 출동했고 곧바로 퇴각했다면 -_-; 원균은 개전 직후에 도망갔다는 게 됩니다. 이 때 경상우수영에서 버틴 시간은 불과 3~4일. 당연히 적은 거제도는 둘째 치고 김해까지도 오지 않은 시점입니다. 이렇게 볼 경우 옥포해전 전까지 원균의 말은 모두 훼이크가 됩니다. 적이 무서워서 도망가놓고 "싸울 거다" 이랬다는 거죠. 그리고 원균이 100척을 가라앉힌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 됩니다.
반면 김수, 민준의 공문이 원균의 훼이크가 아니고 그 때까지 경상우수영에 있었으며, 거제도 부근까지 적이 오자 도망갔다면 경상우수영에서 도망간 시점은 20~27일 사이가 됩니다. 이 경우 어느 정도의 교전은 있을 수 있었겠죠. 이 시기 김해, 웅천 등지에 200척이 상륙했다고 하니 (물론 수송선이었습니다) 여기에 겁 먹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거제도를 향한 적 병력은 겨우 20척 -_-; 거기다 이 때 경상우수영을 지키고 있었다면 사천 쪽에 있는 백천사에서 적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거랑 다릅니다. 지도 보면 알겠지만 거제도에 적이 나타났다는데 사천에서 놀라서 도망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죠.
재밌는 건 원균옹호론자들의 성경이나 다름 없는 원균행장록의 기록입니다. 거기에는 "휘하에 4척밖에 없어서 우후에게 본영을 맡기고 곤양으로 물러났다"고 돼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원균이 도망간 시점을 임란 직후, 늦어야 18일 정도로 추측하며 그 이후 원균의 행적은 곤양-사천-고성 수준으로 배가 있기는 하지만 김성일 혹은 김수의 지휘로 육전에서 싸우기를 명령 받은 상태고, 원균은 김수, 민준, 이순신을 모두 속이면서 아직 경상우수영의 전력이 남아 있는 쪽으로 주장했다고 추측합니다. 그 훼이크를 변명하기 위해 4월 20일-30일쯤에 원균은 남해 등의 아직 안전한 후방에서 병력을 다시 집결하고 고성 쪽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다시 후퇴했고, 이순신에게는 남해까지도 적이 가득 찼다는 쪽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거죠. 그 때문에 나온 게 이순신의 남해 부근 4개 포구의 군량을 방화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순신으로서는 원균이 "싸우다가 졌고" "적이 남해까지 진출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경상우수영을 방화하고 100척을 가라앉힌 시점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자기는 피하고 휘하 병력은 우후에게 맡겨서 보존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이 거제도로 오는 상황에서 가라앉혔을 것은 확실합니다. 그게 원균이 초기에 도망갔을 시점이든 적이 거제도로 오던 시점이든간에요. 그리고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거제도로 온 적의 규모"는 20척 정도였습니다.
결론을 내리면, 원균은 4월 20일 전에 부산포 쪽에 적이 많은 걸 보고 사천-곤양 쪽으로 도망갔고, 늦어도 적이 거제도로 올 때는 우후를 시켜 본영을 불태웠으며, 자신은 김수나 김성일의 명에 의해 육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척"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병력을 모아서 치러 간다고 김수와 이순신에게 훼이크를 쳤습니다.
임진왜란을 집필하신 김경진-윤민혁-안병도님 트리오(?)가 있는 워포그(warfog.net)에서는 우후가 경상우수영 본영을 불태운 걸 4월 22일로 추정하시더군요. 음... 일단 제 생각은 저렇습니다.
3. 10척, 30척 분멸설
29일 난중일기에는 "원균이 10척을 분멸했다 카더라"라고 돼 있습니다. 5월 10일에 선조와 선전관 민종신의 대화에는 "원균이 30척을 깨뜨렸다 카더라" 가 기록돼 있습니다.
원균옹호론의 골자 중 하나죠. 임란 최초의 승전은 원균이 (4척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록했다는 거죠.
글쎄요. 이 모든 건 원균이 했다 카더라일 뿐입니다. 문제는 위에 적었듯 그 때 원균은 곤양-사천 땅에 있었으며 적이 그 때까지 거기에 오지도 않았다는 거죠.
워포그에서 보니까 창원에 상륙한 적이 조선 수군을 깨뜨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내용이 불분명하며 원균이 거기에 참전이나 했을지 의심합니다. 글쎄요. 위에 적었듯 전쟁 극초반에 가덕도로 갔다는 것 말고는 원균이 거제도 쪽으로 갔다는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백천사(기록에는 배천사로 합니다만 한자가 백천사네요)가 사천에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고 알고보니 이 배천사는 거제도 동쪽에 있더라... 이게 아닌 이상 원균은 후퇴한 후 거제도 동쪽으로 간 일이 없습니다.
거기다 이순신에게는 10척이라고 해놓고 선전관에게는 30척으로 알려진 것, 원균이 정말 30척이라는 나름 대승을 거둔 거면 이순신에게 가장 먼저 알렸어야 했죠. 원균행장록과 옹호론자들은 이걸 "승첩"이라고 하지만 원균이 이순신에게 알릴 때 이건 "패전"이었습니다. 10척을 깼지만 졌다 이런 뉘앙스였죠.
이것과 위에 말한 원균의 "훼이크"를 합치면, 어디까지나 이건 원균 자신의 체면 살리기용 훼이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과 원균이 남해까지 적이 진출했다는 훼이크 때문에 이순신은 남해의 포구의 물자를 방화했고, 옥포 해전에서 만날 때 "단 한 척밖에 없었다"면서 원균에게 실망하는 단서가 되는 거죠. 원균이 애초에 단 한 척밖에 없으니 살려달라 이렇게 말했으면 그런 말이 없었겠죠.
원균은 이순신에게 아직 싸우고 있다는 식으로 말 한 겁니다.
원균의 10, 30척 분멸설이 "승첩"이라고 주장하는 건 원균행장록밖에 없으며, 그렇게 원균을 찬양하던 선조도 "원균이 제일 먼저 이겼다"고 하지 않고 "원균이 구원을 청하고 경상도에서 이겼으니 원균의 공"이라고밖에 못 했습니다. 선조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원균도 임진왜란 극초반의 행각에 대해서는 절대 승리라고 말 하지 못 한 겁니다.
여담으로 원균행장록은 칠천량 해전도 "지는 상황에서 8척이나 깼으니 대단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 대단하네요.
그리고 위에서 나온 김수가 "남쪽 바다에서는 원균이 이겼다"는 건 시기상 옥포해전의 기록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4. 결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준민은 거제현령이었습니다. 진주에서 기꺼이 전사한 것처럼, 그는 절대 적을 피할 인물이 아니었죠. 실제 임진왜란 초기에 그는 원균이 도망간 상황에서도 거제성을 지켰습니다.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나(원균이 김준민 욕 했는데 구라다) 이순신의 옥포해전 장계(김준민은 원균이 불러도 안 오니 왜 이럼?)를 보면 원균은 그를 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김준민은 원균이 도망가는 걸 보고 실망하고 후에도 거제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김성일의 기록에 "김수가 근왕을 위해 불러서 김준민이 거제도를 떠났고, 그 후에 적이 거제도에 가득 찼다"는 걸로 봐서 거제도가 완전히 함락된 시점은 김수가 근왕군을 소집해서 전주로 향했을 때이며, (전주에 도착한 게 18일이죠) 옥포해전 이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거제도는 경상우수영 전체가 괴멸될 정도의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원균이 싸우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해전에서 밀려도 거제도에서 김준민과 함께 싸웠겠죠. 그가 김준민을 욕한 것은 김준민이 거제도를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경상우수영의 전력은 최소 40척(윤민혁님의 추정이더군요 보니까)에서 아예 전라좌수영과 비슷한 20척으로 봐도 충분히 적과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최대 100척에 이르는 병력이 흩어지고 경상우수영 본영을 방화한 것은 모두 원균의 죄로 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숨기기 위해 다른 장수들에게 최대한 훼이크를 쳤습니다.
뭐 그 때 경상도의 장수들이 신나게 도망갔으니 원균만 딱히 욕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냥 원균의 병력이 그들보다 좀 심하게 많았을 뿐이죠. 그래도 이운룡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싸우려고 했으니 무작정 도망만 간 장수들보다는 나을 겁니다. 의지는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후의 결과를 생각해 보면 그냥 죽거나 멀리 도망가 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불안한 진군을 계속 합니다. 대체 경상도 해안이 어디까지 먹혔을까 걱정 됐겠죠. 원균을 만나기까지 계속 각 포구를 정찰하면서 진군합니다. 근데 희한하게 적을 처음 만난 곳은 거제도 동쪽 옥포였죠. 경상우수영 본영이 있던 오야포는 거제도 서쪽이었구요.
========================================
지금 와서 생각합니다만, 원균옹호론이 없었다면 원균이 이리 탈탈 털리면서 욕 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당시 썩은 장수들처럼 도망가고, 잘 싸우는 장수 모함하고 한 것 뿐이죠. 그냥 규모가 좀 심하게 커서 욕 먹었고, 하필 비교 당하는 상대가 이순신이라서 욕 먹은 것 뿐이죠. 그런데 원균옹호론이 기승을 떨치면서 이순신과 비슷한 급으로 연구를 당해서 더 욕 먹게 되었습니다.
거 참... 왜 그럴까요?
사실 원씨 분들은 억울한 게, 원균옹호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원균에 대해서는 조용히 있었죠. 그런데 선조를 띄우기 위해 원균을 옹호하면서 힘을 얻어서 원균옹호론이 발전합니다. 자기 조상이 죄가 없다는 데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죠. 원균은 분명 부끄러워할 조상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조상을 변명하는 것도 모자라 띄우려고 하면 더 욕 먹을 뿐이죠.
김경진님은 말씀하셨죠. "같은 전주 이씨 가문에서 세종대왕도 나오고 연산군도 나온다"구요.
아무튼, 아직도 bgm 틀고 있으신 분들은 같이 외쳐주세요. 개~쉑 개 개~쉑 개 개~쉑 오 오오오오 ( . .)
그럼 다음 글, "태산과 같이"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