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작으로 끝낼 자신 없습니다. ㅠ; 아예 역사에 대한 잡상과는 별도로 연재할게요.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잡상의 영역을 뛰어 넘었네요.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해서 한 4~5개 정도의 시리즈로 쓰는 게 나을 거 같아서 타이틀을 바꿔 봅니다. 많이 봐 주세요 :)
우선 소개하고 싶은 까페가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goryeosa
아 여기는 회원가입이 막혀 있네요. -_-; 대신 다른 블로그를...
http://blog.naver.com/gil092003
위 까페의 주인이신 고려사 지킴이를 자청하시는 길공구님의 블로그인데요. 정말 엄청난 내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장의 야망이라는 게임 아시죠? 이 분이 신장의 야망을 고쳐서 후삼국통일이라는 게임을 제작하신 분입니다. 거기에 무려 100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게 길공구님이 직접 다 찾아낸 인물들이라고 하네요. 삼국사기, 고려사, 동사강목, 거기에 각종 가문의 족보들을 찾아내서 구성한 거라고 하십니다. 정말 아래 북한 철도 찾아내시는 분도 그렇지만 매니아 분들은 대단하십니다.
링크 띄운 글은 강주 호족 이야기인데요.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있었던 호족들의 다툼을 쓴 글입니다. 근데 나중에 가니까 욕심이 생기셨는지 견훤의 신라 침공 => 공산 전투 => 고창 전투 => 일리천 전투로 이어지는 후삼국시대 후반기를 위성사진과 각종 기록으로 재조명하셨더군요. 이건 정말;;; 거기에 신라의 군현을 참고해서 당시 양국의 군사력과 일리천 전투 당시 후백제가 동원한 병력을 예상까지 했더군요. 또 거기에 더해서 공산 전투에서 죽은 팔공신 중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측까지. 하아...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엔 안 듭니다. 이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필요한 글을 저렇게 자세하고도 재밌게 풀어낼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후삼국시대 뿐 아니라 고려사 전반에 걸쳐 여러 글을 쓰셨으니 찾아보면 재밌는 거 많이 보실 겁니다.
아무튼, 전 제 글을 써야죠 ^^; 더 나이 먹고는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길 빌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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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 50년도 안 된 세월이라지만 그 안을 보면 이런 저런 굵직한 사건들을 찾아볼 수 있죠. 제가 관심 가지고 재밌다 싶을 만한 사건은 보충 설명이 꽤 길 겁니다. 조금 긴 연표 보는 기분으로, 그 옛날 태조 왕건을 되새겨 보면서 봐 주세요 ^^
1. 원종, 애노의 난 (889년)
조세를 더 올리는 것에 반발한 농민들의 봉기. 이 봉기 이후 세상은 변합니다. 서라벌과 그리 멀지도 않은 상주(혹은 사벌주)에서 일어난 반란인데도 신라는 제대로 진압을 못 합니다. 이 이후 견훤, 양길, 기훤 등 곳곳에서 장군 혹은 왕을 자청한 군웅들이 일어나죠. 삼국지의 황건적의 난, 전국시대의 오닌의 난과 비슷하다고 할 만 하죠. 이들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상주는 후에 궁예, 왕건과 견훤의 주 전장 중 하나가 됩니다. 그 때의 상주는 문경 등을 포함한 큰 주였다고 하니 이 곳의 가치를 알 수 있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도 여기 호족이죠.
2. 견훤 거병 (892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전무공등주군사 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 行全州刺史 겸 兼 어사중승상주국 御史中丞上柱國 한남군 개국공 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 食邑二千戶
... 견훤이 자청한 명칭입니다. 참 길죠? -_-; 아직은 백제 왕이라고까지는 못 했다는 거죠. 거병한 곳은 현재의 광주인 무진주. 후삼국시대의 문이 활짝 열린 거죠. 참고로 아자개가 상주에서 거병하는 바람에 아들인 자기가 역적으로 몰려서 급히 거병한 거라는 말도 있더군요. 아무튼, 다른 호족들에 비해 여러 면에서 선수 쳤습니다. 다른 호족들이 자기 땅 지키는 데나 급급하는 동안 그는 백제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걸고 전라남도, 전라북도 지역을 석권하며 900년에 현재의 전주인 완산주에 도읍을 하고 계속 확장을 합니다. 오월, 후당, 일본에에 사신을 파견해 백제라는 명분을 인정 받고 정개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칭합니다.
3. 비뇌성 전투(899년)
양길에게서 빠져 나와 따로 영토를 넓힌 궁예가 양길과 결전을 치른 전투입니다. 궁예가 현재의 강릉인 명주를 차지한 게 894년인데 이 때 확실히 반기를 들었다고 하면 그의 엄청난 영토 확장을 가늠해 볼 수 있죠. 이 때 특이한 점이 명주는 싸워서 얻은 게 아니라 명주의 성주 김순식이 성문을 열어 바쳤다고 하는데 이게 엄청난 떡밥 거리가 되죠. 이 전 궁예의 병력이 600, 명주를 얻은 후에 3500이라고 하는데 힘에 밀린 것도 아닌데 부하가 된 겁니다. 김순식 아버지 허월의 활약, 김순식이 궁예에게 얼마나 충성을 바쳤는지는 태조 왕건에서 자세히 나오죠. 결국 명주는 일리천 전투 직전에야 제대로 항복합니다.
그렇게 태백산맥을 다시 넘어서 철원 등지를 휩쓸고 패서일대를 장악하여 전 주인 양길과의 충돌까지 겨우 5년. 그리고 이 전투에서 양길의 호족연합군은 패망하고 그 세력은 거의 궁예에게 흡수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선포하죠.
한반도 중부의 패자가 갈렸다는 것에서 관도 전투가 떠오르는군요. 궁예가 호족들을 비교적 강력하게 규합한 것에 비해 양길은 주변 호족들의 연합을 했다는 것에서 역시 중앙집권이 중요하다는 걸 떠오르게 하구요. 기훤, 양길 등의 몰락은 초적(도적을 이렇게 불렀죠) 출신 호족의 소멸을 뜻 합니다. 이후에는 그 지역에 미리 터를 닦은 호족들이 고려와 백제의 눈치를 보는 쪽으로 바뀌었죠.
그러고보니 태조 왕건 등에서는 양길이 개성이 없다 보니 용맹이라는 개성을 부여했네요. -_-; 양길에 대한 기록이 좀 있었으면 재밌었을 텐데요.
4. 나주 공방전
의외로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귀부 안 한 호족들이 많았고 내부 추스리기도 힘들었고 한 면도 있겠죠. 거기다 서로 신라 영토 뺏느라 바빴습니다. 견훤의 경우 지금의 합천인 대야성 공략에 힘을 썼고 궁예도 강원도 쪽으로 남진하고 무주공산인 북쪽도 공략하는 등... 두 세력이 붙은 곳은 상주 부근 이외에는 찾기 힘듭니다. 특히 충청도는 서로 눈치 보기인 거 같네요.
하지만 둘이 정말 피 터지게 싸운 곳이 있죠. 금성이라고 불리던 나주입니다.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903년과 909년 설이죠. 여기에는 학계에서도 평가가 엇길리는 모양이더군요. 903년 설이 맞다면 견훤은 왜 909년에야 제대로 대응을 했냐는 것인데요. 이에 따라 903년이 아예 오독이라는 말이 있고, 903년에 가긴 했는데 그냥 거기 주변 섬들 영향력 넓히거나 말만 뺏어 오는, 치고 빠지기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6년 동안 정말 견훤이 나주 신경 못 썼다는 설도 있구요. 태조 왕건에서는 제일 마지막 설을 따르는 것 같군요. 왕건의 군사로 등장한 태평이 동남품을 빌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만 신경쓰지 맙시다. 909년부터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903년 이후 왕건이 서남해에서 오월로 사는 백제 선박을 나포했다거나 양주(양산입니다) 지역 호족 김인훈이 구원을 청하자 '수군'으로 가서 구했다는 걸 보면 이 때 섬 지역이라도 점령했고 제해권은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 하네요. 이런 수군 얘기는 나중에 글 하나로 따로 쓰고 여기서는 대략적인 진행만 적겠습니다.
909년에는 2500명의 병력과 김언, 종희 등의 부장과 함께 진도, 고이도를 점령하고 덕진포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견훤의 수군과 크게 부딪혀 승리하고 견훤은 작은 배로 갈아 타서 겨우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후 섬들을 돌아다니며 왕건을 기습하려던 수달을 붙잡아서 궁예에게 바치죠. 910년에는 견훤이 나주성을 직접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돌아갔고, 911년에는 아예 무진주까지 공격합니다. 912년에는 다시 덕진포에서 맞서 싸우고 914년에도 한 번 더 맞붙습니다. 그 후 공산전투의 패전까지 나주는 쭉 고려의 영토가 됩니다.
이 전투의 영향은 컸습니다. 후고구려-고려의 제해권 장악, 백제의 후방에 영토를 확보한 것(무진주 공성에서 볼 수 있듯 방어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신라와 백제가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차단한 것 등등... 태조 왕건에서도 '백제의 땅에 고려의 깃발을 꽂는다' '고려도 백제도 아닌 왕건만의 땅을 만든다' 등으로 신나게 띄워 줬죠.
흠 자세한 건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
5. 내가 미륵이니라!
궁예는 904년 마진으로 국호를 바꿉니다. 905년에는 철원으로 서울을 옮기고, 911년에는 태봉으로 다시 국호를 바꾸죠. 이 시기에 청주의 아지태, 공주의 홍기 등 충청도 세력이 후고구려에 귀부했습니다. 왕건이 나주도 점령하고 사화진(상주)에서도 이기는 등 승승장구를 하며 후고구려의 영토가 최대에 이르렀으니 정말 기분 좋았겠죠. 하지만 영토가 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죠. 결국 궁예는 송악과 고구려 계승을 버리고 철원으로 가면서 좀 더 큰 걸 찾게 됩니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을까요,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까요? 궁예는 자신의 신격화, 아 미륵화라고 해야 될까요? 그걸 강화하며 정교일치를 노립니다. 태조 왕건에서 나온 관심법 등이 이 때부터 계속 진행되죠.
이상을 쫓다 실패한 영웅과 허상만을 쫓다 패망한 찌질이는 정말 종이 한 장인 것 같습니다.
6. 918년
918년은 왕건에게 있어 정말 뜻 깊은 한 해였을 겁니다. 이 때 쿠테타를 벌였거든요.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갔겠죠. 궁예가 한탄해서 한탄강이라고 했다거나 궁예가 다른 성으로 도망쳐서 맞서 싸웠다거나 백성들이 궁예가 도망가는 걸 도와줬다거나 하는 설화들을 보면 그저 안타까워서 그런 건지 실제 그런 역사가 있는 건지 궁금해집니다. 아무튼 4기장을 비롯한 패서 세력은 왕건을 도왔고 국호는 다시 고려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내부의 불안요소는 엄청나게 많았죠. 쿠테타 직후에 환선길이 반란을 일으켰고 웅주에 주둔해서 충청도 쪽을 맡던 이흔암은 괜히 올라왔다가 역시 반역죄로 처형됩니다. 진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의문이지만요. 후에 청주에서 또 반란을 일으키고 김순식은 922년에야 귀부를 하고 일리천까지는 적극적으로 돕지 않습니다. 공직 등 충청도의 호족들이 후백제로 넘어가는 등 고려는 크게 밀립니다. 이걸 수습한 건 수습한 거대로 대단하죠.
그 때 견훤은 뭐 하고 있었냐구요?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_-; 901년, 916년에 이어 920년에 마침내 대야성을 손에 얻죠. 반면 고려에는 공작선과 죽전을 선물하면서 친하게 지내려고 했습니다. 충청도 호족들이 넘어간 걸 보면 이런 저런 공작은 한 거 같지만요.
7. 925년
당장 망할 것 같던 고려는 반란을 진압하고 평양을 재개발하며 조금씩 살아납니다. 한편 말갈이 안정되면서 고자라 등 추장이나 궁예를 피해 북으로 도망갔던 이들, 박유 등 궁예를 피해 은거했던 이들, 신덕 등 발해에서 도망 온 이들을 받아들이며 그 세를 불려 나갑니다. 견훤의 아비인 아자개는 918년 일찌감치 귀부했는데, 이로써 상주를 지배하게 되면서 경상북도에서 우세를 점하죠. 이후 양국의 전투는 경상북도가 주 전장이 됩니다.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는 게 925년입니다.
924년에 이미 견훤은 조물성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절영도(부산의 영도입니다)의 총마를 보내는 등 화전양면작전을 벌입니다. 이 때 왕건은 칼을 빼들어 조물성(현재의 경북 예천, 김천 부근)을 공격하죠. 이 때 왕건이 견훤에게 밀렸다고 하는데, 맨 위에서 소개한 길공구님에 따르면 유금필(유검필이 맞습니다만 알려진 게 유금필이니 이렇게 칭하겠습니다)이 임존성, 충청도 예산에서 연산진(충북 청원)에 있는 길환을 전사시키고 무려 200km를 강행군 해서 왕건을 도왔다고 합니다. 실제 같은 시기에 벌어진 전투인데, 이게 이처럼 하나로 묶인다면 유금필의 무패 전설은 여기서 시작된 거죠. 유금필이 오자 전력은 백중세가 됐고 둘은 화친하여 인질을 교환합니다. 그럼 전쟁이 멈췄을까요? 설마요.
8. 잠깐의 승리
926년 4월. 고려에 인질로 갔던 진호가 사망합니다. 태조 왕건에서도 왕식렴이 죽였다는 음모론을 내밀었죠. 견훤은 인질 왕신을 죽이고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받습니다. 긴장은 극에 달했죠. 견훤은 웅진까지 진격했지만 왕건은 이 일전을 피합니다. 제대로 전쟁이 시작된 건 927년, 왕건은 용주(예천)을 뺏고 근암성(문경)을 뺏습니다. 4월에는 수륙협공으로! 강주(진주)를 점령하고 이어 백제의 숙원이었던 대야성마저 함락해 버립니다. 이 때 백제 장군 추허조가 전사하죠. 대야성을 점령한 상태로 두지 않고 불태웠다는 것에서 이 전투가 얼마나 격전이었는지, 이 곳이 얼마나 요충지였는지 알 수 있죠.
이렇게 이 짧은 시기 벌어진 전투에서 고려가 계속 승전했습니다. 자. 이대로 고려 쪽으로 판세가 기울었을까요? 그럴 리가요.
9. 공산 전투
"고려가 경북을 계속 먹고 있고 충청도에도 발을 뻗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신라를 공격한다!"
... 이미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부터 대야성만 공격하던 견훤이었죠. 그는 마침내 아껴 두던 칼을 빼듭니다. 926년 9월, 견훤은 번개 같이 서라벌, 경주를 공격합니다. 이 직전에 문경시 근암성을 공격했는데 태조 왕건 소설판에서는 이것을 경주 공격을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한 훼이크로 묘사하더군요. 이 때 견훤은 경애왕을 자진하게 하고 왕비를 욕보이는 등 의자왕의 복수를 처절하게 합니다. 왕비를 겁탈한 건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 많습니다만... 이후 견훤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온 왕건을 크게 무찌릅니다.
우선 왕건의 병력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공훤에게 일만을 보냈고 후에 오천을 따로 끌고 갔다고 하는데, 이 공훤의 일만 명이 패한 건지 말이 없거든요. 패했다, 왕건과 합류했다 크게 두 개로 갈라집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먼저 공격한 건지에 대해서도 말이 엇갈립니다. 보통 견훤이 기다리다가 매복해서 왕건을 공격한 걸로 추측합니다만 기록상으로는 왕건이 매복을 했고 견훤이 이걸 뚫고 왕건을 이겼다고 나오죠. 이에 대해서는 맨 위에 건 길공구님 글에 위성사진과 함께 정말 디테일하게 나와 있으니 꼭 보세요 ^^
이 전투에서 왕건은 많은 병력과 8명의 장수를 잃고 패퇴합니다. 오죽하면 공산 이름을 팔공산으로 고치고 그 일대(특히 대구)의 지명이 이것과 관련 있는 게 많이 나올 정도죠. 이후 주도권은 견훤에게로 넘어갑니다.
10. 백제의 역습
927년 12월. 견훤은 왕건을 농락하는 국서를 보내고 왕건도 이에 답합니다. 나름 자존심을 보여줬지만... 백제의 쾌진격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공산 전투 이후 백제는 벽진군(성주) 대목(칠곡군) 소목군(성주)의 곡식을 불지르고 고려 장수 색상을 전사시킵니다. 왕건이 아직 도망 못 갔을 거라 생각하고 수색 작전을 폈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게 아니더라도 대대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928년에는 강주를 공격하고 복수를 위해 삼년산성(충청도 보은)을 공격하던 왕건을 격퇴합니다. 여기에 넘어서 궁예 때부터 영토였던 청주까지 공격합니다. 하지만... 유금필에게 격퇴 당하죠.
8월에는 관흔을 시켜 양산(영동)에 축성을 하고 오어곡(예천)을 점령하죠. 이 때 두각을 보인 장수가 관흔인데 이후에는 기록이 없어서 아쉽네요. 게임 태조 왕건전에서는 후백제의 몇 안 되는 승장이라서 그런지 백제의 에이스로 나옵니다.
나주가 후백제에게 재점령 당한 것도 이 때쯤이라고 예상됩니다. 점령당했다는 기록은 없어요. 후에 왕건이 '나주가 백제에게 먹힌 지 몇 년 째인데'라는 말로 929년에 점령당했을 거라 추측만 할 뿐이죠. 견훤은 계속해서 충청도와 경북 대부분을 손에 넣습니다. 짧은 사이에 고려는 엄청난 수세에 몰립니다.
그런데 참... 무슨 턴제 게임도 아니고 백제의 우세도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이제 왕건의 턴이 돌아왔습니다.
11. 고창 전투
929년 12월, 견훤은 고창을 공격합니다. 신라와 고려와의 몇 안 남은 연결선을 끊으려는 거였죠. 왕건은 이를 막기 위해 직접 출동합니다. 여기서 지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 공신 홍유조차 도망갈 길을 닦아 놓자는 말을 하는 등 고려에는 패배주의가 흘렀습니다. 하지만 유금필이 출동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유금필은 공격을 외쳤고 왕건은 이를 따릅니다. 유금필이 선봉이 된 고려군은 저수봉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이어진 석산, 병산 전투에서 견훤을 처참하게 보내 버립니다.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행 장길이 고려군을 도왔고 견훤이 지렁이여서 강에 소금을 뿌려서 지렁이를 죽임으로써 고려가 이겼다는 전설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전투의 여파는 컸습니다. 무려 110여개의 성이 고려에 귀부하는데 이 중에는 현재의 포항, 울산의 호족도 포함됩니다. 전투에서 이긴 것도 이긴 거지만 계속 지는 와중에도 친신라 정책을 지속한 게 큰 힘이 되었겠죠. 931년 2월 왕건은 신라 왕을 위무하면서 확실하게 신라를 합병할 힘을 얻게 됩니다. 동쪽을 안정시키다, 고창의 이름은 이 때 안동으로 바뀝니다.
왕건의 턴이 끝났습니다. 다시 견훤의 턴이 왔죠.
12. 백제의 재역습, 그러나...
932년 6월, 백제 쪽에 붙었던 공직은 다시 고려에 붙습니다. 이 곳이 충청도 보은입니다. 왕건은 현재의 청원군인 일모산성을 공격하면서 충청도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구요.
견훤은 이에 맞서 상귀, 상애의 수군을 두 차례 보내 예성강 일대의 선박을 불지르고 대우도를 공격하고, 고려 장군 만세를 패퇴시킵니다. 뜻밖의 역습이었죠. 태조 왕건에서는 아예 송악이 털린 걸로 묘사되고 유배돼 있던 유금필에게 패배한 걸로 나옵니다. 이 때 신검이 왕건의 옥좌에 앉으면서 '왕이 이런 데 앉는구만' 하는 장면이 나름 명장면이죠.
한편으로 933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경주를 공격하려고 합니다만... 하필 이 때 유금필의 유배가 풀렸어요. -_-; 유금필은 왕건의 명에 따라 급히 80기의 병력으로 신라를 구원하러 가고, 여기서 신검의 군대를 '이겨 버립니다.' 네. 겨우 80기로요. 그렇게 경주에 입성해서 신라인들을 안심시키고 돌아가는 길에 또 만나서 또 이기죠. 대체 뭘까요? 태조 왕건에서 견훤이 신검에게 '니가 여기서 활약을 하면 이 나라를 너에게 주겠다' 고 했던 그 전투입니다.
934년에는 견훤 최후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그 장소는 웅진의 북쪽 운주성. 아마 최정예일 갑사 5000을 이끌고 운주성으로 진격합니다. 왕건은 이에 맞서 직접 나섰고, 견훤은 왕건의 병력이 너무 강하다고 일단 화친하자고 합니다. 왕건이 그럴까? 하는데 '또' 유금필이 지금 적이 제대로 정리 안 됐을 때 밀어야 한다고 나섰죠. 그 뒤는 뭐 말 할 필요 없죠? 이 전투로 웅진성 이북 30여개의 성이 귀부함으로써 견훤은 충청도에서도 밀리게 됩니다. 그리고, 백제의 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3. 후삼국시대의 종말
935년 3월,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에게 나라를 주려고 했지만, 신검의 정변으로 금강은 죽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됩니다. 커다란 사건이었죠. 고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 해 4월 유금필은 나주를 수복했고 6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 나주를 통해 고려에 귀순하게 됩니다. 애초에 서로 말을 맞춰 놓은 모양이죠. 이건 후백제 내부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겁니다. 일단 견훤의 사위 박영규가 고려에 귀부했죠.
견훤은 자기가 세운 나라는 자기가 없애겠다는 생각인지 그냥 신검에 대한 복수인지 후백제를 칠 것을 청합니다. 이에 왕건은 태자 무를 주축으로 1만의 군세를 천안으로 보내 결전을 준비합니다. 최종적으로 집결한 병력은 팔만칠천오백, 후삼국시대가 열린 이후 최대의 병력이 집결한 겁니다. 신검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모아서 대항했는지는 아직 미스테리입니다. 길공구님은 후백제 역시 결전을 위해 모든 병력을 모았다는 가정 하에 육만사천으로 추측하시더군요. 고려와 마찬가지로 당시 지배했던 지역의 모든 병력을 징집했을 경우입니다.
이 이전인 935년 11월,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천년왕국 신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서라벌은 경주라는 일개 주가 돼 버립니다. 이제 후백제만 밀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936년 9월, 왕건은 마침내 칼을 빼듭니다.
이 일리천이 경북 구미인데 이에 대해서도 추측을 할 수밖에 없죠. 천안에 먼저 병력을 보내 놓고 왜 빙 돌아서 구미까지 내려갔는지에 대해서요. 신검이 먼저 그 곳을 친 건지, 왕건이 그 쪽으로 진군하자 신검도 병력을 모아서 간 건지, 갔다면 왜 간 건지.
이 전투에서 견훤은 노구를 이끌고 참전했고, 효봉, 애술 등 후백제 장수들은 견훤에게 항복합니다. 왕건은 이 기세를 타고 밀고 나가서 대승을 거두죠. 이후 백제의 긴 퇴각이 시작됩니다. 왕건은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로 진격했고 황산 - 마성(익산)까지 진격합니다. 엄청난 추격전이죠? 결국 신검은 전주에서의 농성할 생각을 버리고 왕건에게 항복합니다.
이렇게 후삼국시대는 끝이 납니다. 능환, 양검, 용검 등 신검의 측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고 견훤은 후백제의 멸망을 본 후 한 많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오백년을 이어 갈 고려를 세우게 됩니다. 물론 아직 해결해야 될 건 많았죠. 발해의 멸망으로 북쪽은 혼돈이었고 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은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후대의 몫이었고 왕건의 명도 얼마 남지 않았죠. 이렇게 이야기는 제국의 아침으로 넘어갑... 아 옛날에 끝났죠? = =;
이렇게 후삼국시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여기서 재미있는 거 골라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 최대한 겹치는 거 없게 하려고 합니다만, 힘들 것 같긴 하네요. 유금필이라든가 나주 전투, 왕건과 수달로 대표되는 후삼국시대의 제해권 이야기, 후삼국 하면 빠질 수 없는 궁예 이야기,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재밌게 써 보려고 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