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반 시절, 같이 듣던 전공수업의 조모임에서 널 처음 만났지. 너를 만난 그 수업에서, '프리라이딩만 면하자, 이론 파트만 담당하고 빠지자. 문명의 이기 MSN을 적극 활용하자'를 골자로 한 내 조모임 철칙은 학점처럼 산산히 부수어졌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때처럼 그렇게 열심히 조모임을 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조모임이 귀찮아서 차라리 그냥 저 혼자 할테니 ppt만 지원해주세요, 하던 내가 밤을 새서 조모임을 하고 그랬으니까.
뭐, 워낙 유명한 수업이긴 했지. 교수의 악명이 자자하여 듣는 사람이 언제나 열명이 채 되지 않았고, 조모임이 너무 빡샌 덕에 그 열명도 안되는 학생 사이에서 매 학기 조모임 커플이 탄생한다는 것이 담당교수의 나름 프라이드였으니까. 나와 너는 그렇게 그 프라이드를 유지시키고 말았지. 한동안, 이라기보단 사실상 태어나서 그때까지 딱히 그런 깊은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언제나 짧고 얕게, 가 내 인생의 도리이던 시절이었는데. 역시 인생은 오래살고 볼일이었어. 그런 의미에서, 어찌보면 넌 내 첫 사랑이구나. 그리고 내 첫 프로포즈라는 건 어찌봐도 부정할 수 없을 사실이 될 것이고.
아무튼 그 시절은 참 즐거웠는데. 우리 조가 몇 명이었더라. 한 네댓명 되었던거 같다. 활기찬 조장 아가씨랑 내 친구랑 나랑 너랑 그리고 기억 안나는 누군가랑. 그러고보니 기억나는 우리 조원들은 전부 대학원에 왔구나. 인생 참 그지같다 그지. 처음부터 다들 열심히였지. 아, 나랑 넌 처음엔 그닥 안 열심히었나. 하지만 중간고사 보고 좀 지나고나선 우리가 제일 열심히였던거 같아. 라기보단 너 오는 조모임엔 내가 꼭 오고 나 오는 조모임엔 너도 꼭 왔었으니. 아, 혹시 밤샘 조모임 기억나? 오후 다섯시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다섯시에 끝난 조모임말야. 망할 내 친구놈은 조모임 중간에 문자 하나 받더니 급한 일 생겼다고 나가버리고, 성실한 조장아가씨는 차 끊길 때 되어 내일 하자 그러고. 너랑 나만 남아서 어디 한번 그래도 끝까지 가보자 하는 심산으로 달리다보니 새벽 다섯시가 된 그 날. 대충 결론을 잡고 너를 보내고 난 막 신나서 새벽 다섯시에 나와서 친구 불러다 술쳐먹었어. 아직도 그날 뭐 먹었는지 기억난다. 돈 없어서 편의점에서 소주에 건면세대랑 꽁치통조림 사놓고, 친구한테 막 신나서 니 이야기를 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우리는 그 학기를 잘 마치고 다음 학기를 잘 다니고 대학원에 왔지. 나름 화제였다고 생각해. 나야 뭐 그냥 무난무난열매를 먹은 스타일이지만, 넌 참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모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넌 남한 사회과학 60년사 이래로 95%를 차지한다던, 평범하고 깔끔한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너와 함께 다니면 참 많은 시선을 받았던 것 같다. '어떻게 저런 애랑 계속 만나지?' '하는 호기심 반 부러움 반의 그런 시선들이었던 것 같아.
대학원 생활은 참 지난했지. 작년 일년 동안 내가 병원비만 한 100만원 쓴거 같네. 물론 술값은 그 열배쯤 쓴 듯 하고. 너와 함께면 뭐가 되든 좋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너와 함께 할 시간 자체가 나질 않으니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지. 가끔씩 자주 아니 거의 항상 차라리 너랑 그냥 헤어질까, 좋은 추억으로 남길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삶이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상황의 핑계를 대지 말자. 사실 상황이 아니었어도 너와의 관계 자체도 쉽진 않았어. 물론 넌 95%정도 내 스타일이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쉽지 않았으니까. 무난무난한 95%에 속하는 부류와 끈질기게 관계를 맺어가는 친구들이 참 인생 쉽게 산다고 보인 적도 많았어(아, 물론 한번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어. 그들에게는 그들의 어려움이 있었을테니). 넌 물론 내게는 언제나 빛나는 보석같은 무엇이었지만, 모든 빛나는 보석이 언제나 내 마음을 빛나게 해 주는 건 아니었으니. 가끔씩 네가 완전 삐져서 아무 말도 안 할 때나, 아니면 내가 힘들어서 널 그냥 방기해버릴때나. 이럴 때마다 젠장 그만두자 하는 생각과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니. 뭐, 모두와 마찬가지로 말야.
휴학을 결심했을 때, 사실 반쯤은 '쉬다 오자'라는 생각이었지만 반쯤은 '너랑 이제 헤어져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어. 지금에서야 솔직히 이야기하는 건데 아무튼 그래. 내가 그 공간을 떠나면 너와 날 이어줄 건 없을 것 같았으니까. 넌 순순히 나를 보내줬지. 난 그때 사실 마냥 신났었는데. 네가 지겨운건지 세상이 지겨운건지, 아무튼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았었으니까.
그렇게 반년동안 세상에 치이다, 결국 돌아오게 되었네. 돌아옴을 생각할 때, 계속 네가 밟히더라. 아. 어떻게 하지. 게다가 너 뿐 아니라 모든 상황들이 더 좋지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고. 잠은 안 오고. 막아야 할 빚들은 빛처럼 쇄도하고. 대체 뭐가 될까? 싶은 적도 있었고. 오랜만에 본 네 면상은 정말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고. 그러면서 또 반갑고. 시크한 척 무시하려고 해도 도무지 마음이 그리 되지는 않고. 주위 친구놈들은 계속 그래서 어떻게 정리할 껀지 물어오고. 삶이 악몽이었지.
몰라. 덕분에 맨날 지도교수한테 깨지고. 아오. 생각해보니 지도교수야말로 악의 근원이구만. 내가 졸업반때 이인간 수업만 안 들었어도 너랑 만나는 불상사는 없었을꺼 아냐. 그렇게 깨져나가다 결국 지도교수한테 불려나가서 갈굼당했지. 숱한 갈굼 끝에, 한마디 하시더라. '일단 이것부터 정리하고 뭘 하도록 해라. 일들이 엉켰을 땐, 제일 중요한 일부터 정리하는 게 좋다.' 참 송구하고 민망하더라.
그게 벌써 두어 달 전 이야기구나. 아무튼 덕분에, 두달 동안 마음의 정리는 참 잘 한 것 같아. 그 동안 계속 옆에 있어줘서 참 고마워. 이젠 결단이 필요한 것 같네. 그래, 이제 프로포즈하려고. 물론 한참 부족한 내가 보기에도 넌 솔직히 프로포즈하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참 부족하긴 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인생이 그런 건데. 물론 원래 이런 프로포즈는 11월 초의 어느 길일에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늦어졌데. 그리고 더 끌다가는 너나나나 죽도밥도 안될 것 같은 각이잖아 딱 봐도.
그래서 널 프로포즈하려고.
내 첫 논문아. 그동안 참 고마웠다.
엄밀히 말하면 propose a paper라기보다 submit a paper겠지만, 그런 기계적인 단어를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낚으려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마지막 교정본을 지도교수한테 보내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막 나려고 하더라. 아오. 고치고 싶은 부분이 아직도 산더미이긴 한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고마워, 내 논문아. 주제나 방법론이나 이론적 프레임이나 학계 메인스트림에서 3광년쯤 벗어나있던 덕에 학회 발표 갈때마다 '참 흥미롭네요' 이상의 코멘트를 받지 못하던 내 연구야. 이제 한동안 니생각은 안하려고. 할 일이 많아 너나 나나. 에효. 소박(reject)만 맞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네. 에 또 뭐 소박맞으면 어때. 등재지에 프로포즈 해봤다는게 중요한거지. 난 일단 좀 쉬다 카오스나 하러 가야겠어. 뭐가 되든, 웃는 얼굴로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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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말년부터 붙잡던 기묘한 연구를 어쨌거나 글 하나에 정리해서, 논문이랍시고 학회지에 프로포즈-투고-섭밋-했네요. 내내 그리고 감상적인 기분입니다. 주말까지 해야 할 무수한 작업이 있음에도 작업이 손에 잡히질 않네요. 푸. 글 쓰고 나면 마음이 정리될까 하는 생각에 본의아니게 글 투척하고 가요. 흉흉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즐거운 주말들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