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금하러 왔습니다."
3. "내놔 새끼야!" "드, 드리겠습니다!"
청나라 시대에는 매년 명절 외에 황제나 황태후의 10년마다 경축을 빌미로 상인과 농민, 지방 관리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보효 은냥이라는 악습이 있었다. 건륭시대에는 이러한 풍조가 대단히 극심해져, 황제가 강탈한 재물과 은의 수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건륭제의 팔순 행사에 경우, 114만 4천 3백 냥의 예산 경비는 주로 관리와 상인, 그리고 각 성 백성들의 헌납으로 조달되었으며, 각 성의 독무 등 관리들은 그 성에 내려지는 양렴은 25%를 반드시 바쳐야 했다. 물론 대다수 관리들은 이를 백성과 상인들에게 떠넘겨 백성들의 빈곤과 상인의 파산을 초래했다.
4. 사채왕 건륭
청대 내무부에서는 매년 상인들의 출자금으로 수백만 냥의 은을 빌려 주고, 높은 이자를 물리는 방법으로 수탈하는 악습이 있었다. 건륭 시기의 고금리는 더욱 무거워졌을 뿐만 아니라, 빌려간 원금을 완전히 상환한 후에도 원금 없는 이자까지 지급해야 하는 괴현상이 나타났다.
예시를 들어 장로 지역에서는 건륭 40년 9월 노상들이 밑천이 모자라 염정사인 서녕에게 내탕금 20만 냥을 빌려 쓸 것을 청하고 매월 1%의 이자를 붙이기로 했다. 건륭 41년 6월 산동 소금도매상들은 장로 시장에서 소금을 사다가 여러 주현에 팔고자 했으나 운영자금이 모자랐기에 다량으로 소금을 구입할 수가 없어, 내무부의 '공금' 에서 은 15만 냥을 빌리고 매월 이자 1%를 내기로 했다. 그들은 이를 15년 할부로 갚기로 하고 해마다 원금 1만 냥을 상환하면서 이자까지 완납하도록 했다.
5. 리모델링왕 건륭
건륭 55년 건륭제는 "서화문에서 사직문까지 세 구역으로 나누어 양회, 장로, 절강의 상인이 북경으로 와서 스스로 경관을 꾸려 거리마다 노래와 춤이 넘치게 하는 정성을 보이도록 하라." 는 위엄찬 명령을 내렸다. 이에 경관을 꾸미고 건물을 수리하는데 은 36만 냥이 소모되었으며, 동락원, 기춘원 등에 있는 건물들의 기와를 교체하고 유화로 장식하는데 은 7만 5천냥이 필요했다. 황제의 가마가 지나는 길을 정돈하는데는 20만 냥이 들었다.
6. 토목왕 건륭
이를테면 대녕사 행궁 은 상인들이 골통품과 진귀한 보석, 꽃과 나무, 대나무와 돌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사다가 장식을 했다. 평산당 행궁에는 원래 매화가 없었는데, 건륭이 처음 남순했을때 염상들이 매화 1만여 그루를 심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7. 소통왕 건륭
건륭의 남순은 민폐 중의 민폐로 현지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겼으므로, 많은 대신들은 이를 반대했다. 민절 총독 객이길선은 "황제가 남순하려면 강남 지방의 좋지 않은 도로들을 보수하고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데, 백성들은 죽어나간다. 유지를 거두어 주라." 고 권했고 노삼, 조혜 같은 대신들도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질 수 밖에 없다." 고 반대 했지만 건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순행 길에서도 신하들은 남순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 건륭의 배가 진강에 다다랐을때 양강 총독 황정계는 폭죽을 쏘아 올려 황제를 환영했는데, 이 지독한 연기 때문에 기침 하는 사람들이 속출 하는 민폐가 발생했다. 이에 시위 박이분찰은 교묘하게 돌려 황정계의 아첨을 비난하며 건륭에게 충고했으나, 건륭은 그냥 한번 웃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건륭의 네 번째 남순을 막기 위해 소홍의 지부는 미리 배를 시험 운항하면서 수로에다 돌덩이와 나무 토막을 수없이 던져 두는 충격스러운 일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건륭은 내각학사 정경윤의 반대도 뿌리치고 남순에 나섰다.
이 그림은 정복가로서의 황제의 면모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으나 건륭 황제는 친정을 한 적 따윈 한번도 없다.
1. 건륭제는 대금천과 소금천의 분쟁이 벌어지자, 처음에는 "묘족 야만인들은 고집이 세고 무식하여 신하로 쓰기에도 부족하다. 땅도 지킬 필요 없다." 고 방관했으나, 건륭 11년 대금천의 토사인 사라분(莎羅奔)이 청군을 공격하고 왕을 참칭하자 장광사(張廣泗)를 총독으로 하여 2만여 군단을 파견했으나 날씨의 탓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황제는 전략적으로 밀고 있던 눌친(訥親)이라는 인물을 현장에 파견하였다. 눌친은 건륭제가 장정옥, 오르타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밀어주던 인물이었지만, 정작 눌친은 현장에서 3,4만의 군대를 10부대로 나누는 전략 미스를 저지르며 대금천에게 간단히 각개격파 당하였다. 더구나 현지에서는 눌친과 장광사의 불화까지 터져나왔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부항을 후임 사령관으로 파견하여 5만의 군대를 더 지원, 상당한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전쟁은 이미 2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소모된 자금만 2천만냥에 이르렀으며, 장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재정 위기가 닥쳤고 사천에서부터 대량의 인부와 수레, 가축을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통에 쌀값이 폭등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또한 이마저도 다 해결된것이 아니라 건륭 36년에 또다시 문제가 생겼고, 사천, 귀주, 섬서, 감숙에서 총 7만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며, 10만 9천여근의 화약과 화승 6만판, 다량의 총포와 대포등을 모두 동원하였다. 이에 소모된 군비가 무려 2천 900만냥이나 되었으나 황제는 "1천만냥이 더 들어도 좋다. 간악한 반역자를 모조리 죽여라." 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상대가 화친을 청해도 들어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관대한것이 화근이다.' 라고 소리치며 살육전을 전개하며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으나 5년의 시간동안 무려 10만여명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군비는 7천만냥이라는 경악할만한 액수였다. 전쟁 후에 군사 배치와 변경 안전을 위해 소모된 물자까지 더하면 이는 더 많아질 수 있다.
2. 건륭 30년, 미얀마의 지도자는 꼰바웅 왕조의 신뷰신(Hsinbyushin)이라는 걸출한 호걸이었다. 미얀마군이 중국 남부의 토사들을 공격하자, 청나라군은 이를 막기 위해 소규모 교전을 치루었으나 오랜 평화로 타성에 젖어있던 청군은 얼마전까지 분쟁을 거듭하던 미얀마의 군사들을 전혀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의 건륭제는 현지 사령관들이 승리를 날조하여 보고하는것만 듣고 좋아라 하다가, 나중에 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양응거(楊應琚)를 사령관으로 파견하여 보이(普洱) 일대를 대부분 수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까진 다 좋았으나, 양응거 역시 공을 탐해 전공을 날조하고 무리하게 진군을 거듭하다 어려움을 겪는 일이 발생했다.
건륭은 이를 눈치채고 양응거를 목 베는 식견을 발휘하기는 했으나, 문제는 만족할 줄 모르고 전쟁을 계속 했다는 것이었다. 건륭 황제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지금이 대청제국의 전성시대인 것을 생각해 보라. 어떤 일인들 이룰 수 없겠는가? 미얀마의 도적들이 내지를 침략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그 간교한 무리들을 징벌함으로써 제국의 위세를 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중도에 멈출 수 있겠는가? 우리 제국은 지금이 전성시기이다. 보잘 것 없는 미얀마를 멸망시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리하여 건륭제가 파견한 지휘관인 명서가 현장으로 출동했고, 건륭제는 오만이 하늘을 찔러 명서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 출병한 우리 군대의 전력은 매우 강하여,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어 짐에게 승전보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의 도적들이 우리 군사의 위세에 눌려 죄를 반성하고 패배를 인정하더라도 명서 등은 절대 과분한 자비를 베풀어 항복을 가벼이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에 저들의 소굴을 뒤집어 괴수를 죽이고 악한 무리를 섬멸하지 않는다면, 국위를 떨칠 수 없게 되니 항복을 받는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의 군사가 아와(阿瓦 당시 미얀마 수도)까지 이르러 성을 격파하면, 곧 반역의 수괴를 참수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토벌하여 죄를 철저하게 응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을 적절하게 토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만을 영원히 굴복시키리라."
그러나 황제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현장의 명서는 큰 비와 적의 코끼리 부대, 군량의 부족등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허나 명서도 한계에 접어들어 퇴각을 시작했으나, 미얀마군이 퇴로를 막고 추격을 시작하자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명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부대를 나누어 주어 퇴각을 하게 했고, 본인은 홀로 수백명의 병사만을 이끌고 아군이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수만명의 적과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미얀마는 이 시점에서 평화를 유지하면 어떠하겠느냐는 제안을 전했지만, 건륭은 이를 거절하고 부항을 사령관으로 다시 한번 군사를 파견했으나 풍토병과 지리, 온갖 문제에 접어들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고 설상가상으로 사령관 부항마저 풍토병으로 자리에 눕자, 그때가 되서야 어쩔 수 없이 화친하였다.
두 차례의 미얀마 원정으로 청군은 부항, 운귀 총독 유조와 양응거, 장군 명서, 총병 왕옥정, 색주, 호대유, 이전, 덕복계, 이훈, 본진충, 입주, 엽상덕, 시위 부령안, 참찬대신 액이경색, 부도통 면강, 이주, 부도어사 부현, 호군통령 오삼태, 산질대신 갈포서, 부장군 아리곤, 경략 부항 등은 모두 살해되거나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다.
또한 당시 소모된 물자에 대해, 전쟁을 반대하던 인물인 서혁덕 등이 손실을 우려하여 미리 말한 바에 따르면, 그 지역까지 병사 1만여명이 출병할 경우에 모두 3만 8천필의 말이 필요하고, 녹기병 3만이 출병할경우 5만 7천필의 말을 필요로 하며, 병사가 4만 명이면 하루에 쌀이 4백석이 필요하고 말이 10만필이면 하루에 쌀 1천석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가 있다. 10개월동안 군사를 움직이면 42만석의 쌀이 소모되고 운송을 하는데 백만여명을 동원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는 추정치일 뿐이지만, 그만큼 많은 전비가 소모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3. 건륭 황제의 치세 당시 네팔의 한 부락이던 구르카는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급격한 세력 확장은 내부의 여러 문제를 가져오기 마련인데, 이를 해결하기 가장 좋은 일은 역시 그 내부의 불만은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구르카의 파도이살야(巴都爾薩野 - Bahadur Shah of Nepal)는 당시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이 어지럽고 분열되어 있자 티베트를 침략하여 재미를 보려는 야욕을 가졌다.
건륭은 성도 장군 악휘를 현장에 보내고 또다시 호언장담을 하며 구르카를 짐짓 꾸짖었다.
"너희 구르카는 변두리의 작은 부락에 불과하므로, 마땅히 법을 지키고 안거하면서 태평한 복을 누려야 함이 마땅한데도, 이처럼 불손한 행동을 함부로 한다면 대성황제께서 인자하셔서 호생지덕을 구현하신다 하더라도, 이 같이 교활하고 사악한 무리는 절대 가볍게 용납할 수 없으며, 반드시 대군을 보내 토벌하여 제거할 것이다. 네가 이 서신을 받아 읽고 속히 병사를 철수시키고 니알람과 제롱 등의 땅을 전부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군을 보낼 것이고, 너희는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으리라."
건륭은 구르카를 절멸시켜야 된다며 현지 사령관들이나 티베트가 별도로 화친을 맺지 못하게 했고, 현장에서 승리의 소식이 들어오자 몹시 좋아했다.
그러나 실상은 고도의 사기술로, 현장에서는 티베트와 청나라 사령관, 구르카가 적당히 합의하여 적이 물러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던 건륭제는 몹시 기분이 좋아 사령관들을 승진시켰고, 구르카의 조공사절단이 베이징에 오자 대단한 환대를 하였다.
물론 구르카는 격파된적이 없기 때문에, 1791년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공격, 마음껏 털어버리고 물러났다.
4. 건륭 말기, 베트남에서는 완(阮) 씨 삼형제가 권력을 장악했고, 후 레 왕조의 마지막 군주, 민종(愍宗) 여유기(黎維祁)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이 되었다가 이후 청나라로 도주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자신들의 적이 완광평(阮光平)이라는 인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없었고, 막내였던 완문혜(Nguyen Hue)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면서 이야기를 나눌때 혼란을 주기 위해 가짜 인물을 만들어 공갈을 친것이다. 어찌되었건 청군은 이 '완광평' 을 무찌르기 위하여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사령관이었던 양광 총독 손사의(孫士毅)는 적이 전략적 이유로 물러나는것을 자신의 군략이 신출귀몰하여 적을 무찌르는것으로 착각하여 적을 너무 깊숙히 공격하다가, 술을 마시던 중 반격을 당하자 놀라 겁에 질려 달아났고 자기 혼자 살자고 다리를 무너뜨렸다. 이에 강 건너 남아 있던 제독 허세형과 총병 장조룡 등 1만여 청나라 군은 퇴주로 불가능한 상태로 완군에게 처참하게 살육당하였다.
5. 대만의 임상문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무능한 청군은 상대도 안되는 전력의 반란군에 연거푸 패배를 당하였다. 이에 건륭제는 직접 민절 제독 상청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도록 했지만, 상청 역시 화신에게 뇌물을 잘 줘 줄을 잘 탄 인물일 뿐이었다. 결국 상청은 진압은 커녕 전공을 날조하고 적을 만나면 줄행랑을 높으면서 일을 키웠고, 결국 건륭제는 복강안을 사령관으로 하는 또다른 부대를 파견한 후에야 간신히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
6. 건륭 39년, 백련교 지파, 청수교의 영수 왕륜이 반란을 일으켰다. 청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봉기를 진압했는데, 이 과정은 대단히 잔혹했다. 봉기군을 진압한 서혁덕은 건륭에게 이러한 보고를 올렸다.
"매일같이 관군을 이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담하여 수색, 체포 작업을 진행했다. 모든 집을 순서대로 하나씩 돌아가며 구석구석 뒤지고, 움 속이나 도랑까지도 찾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그 안에 숨어있던 비적들은 잡히는 대로 연일 끌려가 죽음을 당한 것이 그 수를 헤하릴 수가 없었다. 불을 지르거나,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임청 구성의 거리마다 시체가 가득 쌓여 길을 메웠다.'
이 끔찍한 참상에 대해, 강희 시대의 기조대로 주모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관대하게 처벌하자는 주장을 올렸다. 하지만 건륭은 '관용을 베풀기보다는 모두 죽이는것이 낫다' 는 요지로 전부 주살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봉기민들은 어린아이부터 80세 노파에 이르기까지 처참하게 도륙되거나 노비가 되어 변경으로 비참하게 끌려갔다. 건륭은 이 일에 직접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까지 지시하며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7. 건륭 시대에 이르러 청은 준가르를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후, 건륭은 준가르 포로들을 모조리 학살하라고 공식적인 지시를 내렸다.
"이 반도들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마라. 단지 늙고 약한 이들만 남겨라. 우리는 이전 원정들에서 너무 관대했다. 우리군이 예전처럼 행동한 후 철수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말 뿐이 아니었다. 실제 학살을 자행한 장수들은 칭찬을 받고 고위직을 얻었으며, 그저 목초지를 점령하고 다른 백성들이 도망치도록 방관한 장수의 경우 처벌을 받았다. 건륭은 설사 러시아 영토로 준가르 잔당들이 도망친다 하여도 추격해 죽이라고 명령했다. 또한 건륭은 '강한 장정들을 선별하여 죽이고' 단지 여자들만 종복으로 주라고 지시하며 인종 말살을 위한 치밀함까지 보였다.
1756년의 경우, 조정에서는 항복을 조건으로 준가르 배성들에게 기근 구제용으로 곡식, 가축을 주자고 건의했으나 이에 대해 건륭은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서 암묵적으로 고사 작전을 시행했다. 오직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만 남아, 다른 몽골 부족이나 만주족 기인들에게 노예로 분배되다. 청나라의 분견대는 '반도'들을 추격해 수천 명 단위로 학살을 자행했고 건륭은 광기를 잠재우기는 커녕, 되려 이를 선동질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작은 도둑들이 아니다. 그들은 잡아서 처형해야 한다. 지도자와 추종자들을 구별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들의 부족 안에는 수많은 도적이 있다. 이들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몽골족에게나 상인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시베리아에 있던 러시아 지사들은 만주족 군대가 장정,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학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757년에 이르러, 건륭제는 준가르가 투르키스탄쪽으로 붙는것을 경계하여 조금 더 완화된 정책으로 그들을 내지로 이동시키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만약 조금이라도 구실이 발생하면 학살을 반복했다.
건륭은 이렇게 자신이 준가르를 말살할 의도가 없다고 변명했다.
"이전에는 준가르를 말살할 의도가 없었다. 이들을 일소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항복하고는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것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달, 장군 자오후이와 슈허더는 건륭제에게 반도들을 '없애는 일'에 충분한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았다. 위원은 성무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수십만의 인구 가운데 40%는 천연두로 죽었고, 20%는 러시아와 카자흐 영토로 달아났으며, 30%는 대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다른 이들에게 보내졌다. 수천 리 안에 준가르 천막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전투의 '승리' 가 있고 난 후면, 어김없이 건륭은 청조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구각이며 자신이 비할데 없는 군주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온갖 휘황찬란한 열병식, 가두행진, 연희, 판화, 지도, 그림, 시, 비석, 노래를 만들었다.
"건륭연간의 후반기는 군사적 승리 이후 그야말로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놀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마크 앨리엇, '건륭제'
건륭 황제는 몸소 시를 짓기를 대단히 좋아하였고, 남순 중에도 여러 시인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의 시적 재능은 범용한 수준이었다.
1. 청나라의 문자의 옥은 대단히 유명하지만, 왕조의 안정을 위한 사상검열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근대 이전 문명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건륭제 시기의 문자옥이 새삼스레 유명한 까닭은 그 정도가 심히 괴악하기 때문이었다. 건륭 16년, 건륭이 남순을 하면서 벌인 죄악 다섯가지를 열거하여 비난하는 문서가 나돌자 건륭 황제는 기겁하여 이를 조사하였다.
그런데, 조사의 범위가 점점 커지면서 엮어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각지의 관리들은 자신들의 공적을 증명해보이려고 사적인 감정으로 거짓인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원한을 대신 분풀이 해버리려는 사람, 이에 놀라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 윗선의 압력때문에 허위진술을 하는 사람들 억울한 피해자가 점점 늘어나, 그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공식적으로 체포된 사람만 천여명을 넘겼으며, 조사를 받은 사람은 아마 10배는 많았을 것이다.
이에 어사 서성은 "요란하게 조사하여 백성들을 곤란하게 할 것이 아니라, 최초 유포자를 찾으면 되는일이다." 고 지적했으나 건륭 황제는 대노하여 서성을 꾸짖었다.
"고작 만주의 노예일 뿐인 네가 이 같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구나. 만약 네 조상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느냐? 그 문서를 보고 퍼뜨린 자들부터 차례로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범을 찾아내겠는가?"
이리하여 혐의자들은 물론 조사가 지지부진한 관원들까지 굴비 엮듯 끌려가 고난을 당하였고, 이 문제는 2년 후 강서의 한 부자가 범인으로 잡혀 능지형을 받는 일로 끝났다. 그동안 고초를 겪였던 대다수 사람들이 별 관련도 없었던것은 물론이다.
2. 건륭 21년, 산동 사람인 유덕이 '흥명흥한'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하도 총독은 이 자를 잡아 곤장을 두들겨 때려죽이겠다고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건륭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때려 죽이는것" 은 강도가 너무 약하니, "더 고통스럽게 죽일 것" 을 요구하였다.
3. 건륭 40년, 광서의 글방 선생 오영은 성군이신 황제께서 만곡의 은혜를 베풀지만, 빈민들에게는 이것이 미치지 못하는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이 나름대로 대책을 궁리해서 흉년에 대비한 사창제도와 의창제도, 도적을 없애기 위한 연좌법, 잡곡 재배의 권장, 땡중을 줄이는 일 등 여러 정책을 생각하여 정성껏 이를 작성해서 황제에게 바쳤다.
그런데 문구 중에 "성상의 덕은 크고 넒었으나, 그 은턱은 널리 미치지 못했다." 가 있었는데, 황제는 '대청제국의 전성기이자 태평치세인 자신의 치세의 은턱이 감히 널리 미치지 못했다고 쓴 것이다' 고 생각하는 옹졸한 식견으로 이 글을 바라보았고, 또 문구 중에 클 홍(弘) 이라는 글자가 있는것을 보고 황제의 본명인 '홍력' 을 무엄하게 썻다고 여겼다.
오영은 물론 황제를 기만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그저 몰랐을 뿐이며 나름의 충심으로 글을 지어 바쳤지만 글자 하나 잘 못 쓴 탓에 능지처참으로 찢겨 죽었고 자신의 아들, 조카가 몰살 당했으며 어린 아이들은 노비가 되었다.
4. 강소성에 살던 채현이라는 선비는 평소 의협심이 깊고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어 자신이 평생 작성한 시와 산문을 모아 책을 냈는데, 이 내용 상당수가 지부, 어사들의 횡포와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관리들은 이 책을 샅샅히 조사하여 '붉은 색을 잃으면 순수한 색이 아니거늘, 이종이 왕을 칭하는구나.' 라는 구절에 불충한 의도가 있다고 우겨 대었다.
물론 채현은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기에 자신의 무죄를 확신했고, 영특한 황제가 진상을 파악 할 것이라 여기며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당당히 조사를 받으러 걸어갔다. 그리고 처참하게 살해되어서야 관청의 문 밖을 지날 수 있었다. 채현의 가족들은 흑룡강으로 끌려가 노비가 되었다.
5. 건륭 42년, 선비였던 왕석후는 계속 과거에 도전했지만 물을 먹자 그 후엔 저술에 집중하였다. 그는 학문적 열정으로 자전을 만들었는데, 이 자전에 "강희자전에 나오는 시운은 1만자도 넘으나, 학자들이 많이 알지 못하고 사전을 제대로 사용할 줄을 몰라, 매번 힘들게 읽고 나서도 망연할 따름이다." 라는 구절이 있었다. 왕석후는 그저 학문적 의도로 아쉬움을 토로한 일에 불과했으나, 건륭은 심히 괘씸하게 여겨 그를 죽이고 왕석후의 처와 며느리, 손자를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6. 안휘성 사람이었던 정수류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왕원이 중병으로 반백치가 되어버리자, 너무나 비통하여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을 비판하는 글을 작성했는데, 자신을 조물주와 비슷하게 여기던 건륭은 이것이 몹시 방자하다고 여겨 정수류의 목을 베었다.
7. 황제가 이렇게 기를 쓰고 사람을 죽이자 그 밑의 관리들도 공적을 세우기 위해 따라나섰다. 건륭 50년, 양강 총독 살재는 유우기라는 문인이 쓴 서적에 "명(明)월을 마주하여 좋은 친구로 삼고, 청(淸)풍을 마시니 취기가 돋는구나." 문구가 있고, 감히 방자하게 건륭 황제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았다고 고발하였다.
그런데 유우기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우기는 순치제 시절에 살던 사람으로, 건륭제의 이름 따위는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유우기가 생전에 신통력을 가져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대죄를 지은 탓에, 유우기의 고손자는 관청에 잡혀와서 지독한 심문을 당했다.
8. 한림학사였던 호중주는 "근심스러운 심정으로 흐리고 맑음(濁淸)을 논하네." 라는 글을 썻는데, 건륭은 감히 성스러운 국호인 청(淸)을 더러운 글자인 탁(濁)의 뒤에 썻다고 호중주를 죽였다.
9. 서술기라는 시인은 "내일 아침 다 함께 청도에 가고자 하네." 라는 구절을 썻는데, 건륭은 그야말로 억지 해석 끝에 "명나라를 부흥시키고 청조를 무너뜨리자." 라는 뜻으로 파악하는 신묘한 통찰력을 보였다. 문제는 서술기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점인데, 건륭은 무덤을 파 서술기를 죽이고 그 자식을 능지처참했으며, 남은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10. 건륭은 이러한 '불온서적' 들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모조리 책을 검열하고 압수하고 불태웠다. 추정되는 숫자로 이때 검열 등으로 소실된 책은 모두 3000종, 총 70000여권에 달하며, 일부 내용이 고쳐진 책은 가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다. 명나라 말기의 역사를 다룬 책, 변방의 문제를 다룬 책, 국방의 문제를 다룬 책, 민족 등을 다룬 책, 송나라 시대나 원나라 시대를 다룬 책들은 그 내용이 적건 작건간에 모조리 불타버렸다.
청제국 전역의 장서가들은 모두 조사의 대상이 되어, 수시로 관리들이 집에 드나들며 검열을 벌였다. 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책방에도 전문요원들이 출몰하여 일일히 수색을 벌였고, 조금이라도 특이한 책이 발견되면 바로 압수해버렸다. 책방 주인이야 억울한 일이지만, 처벌받지 않는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특히, 조상들의 문제 때문에, 여진이라는 글자, 요동이라는 글자가 있기만 해도 모조리 태워졌다. 조정에서 임시로 불온서적을 보관하던 방략관은 책으로 넘쳐났으며, 도저히 넣어둘 공간이 없어 앞뜰까지도 책을 산처럼 쌓아놓았다. 당시 문인들은 "서간으로는 절대 교우하지 않았으며, 우연히 쓸모없는 종이를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불살라 버렸다."
11.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민간 희곡에까지 검열의 손길이 미쳤다. 시와 책이 문인들의 작품이라면, 희곡은 민간의 창작 예술이다. 하지만 건륭제 시대, 민간의 희곡들은 모두 조정의 검열을 당해, 대사를 고치거나 내용을 바꾸어야만 했다.
12. 우습게도 이러한 건륭 황제의 문화대혁명 탓에 고증학(考證學)이 융성하였다. 시국을 조금이라도 논하게 되면 목이 달아날 판이니 그런 문제를 논의할 순 없었다. 한대와 당대의 도량형이나 고대 역사 기록 중에 내용이 상충되어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는 일 같은 경우엔 억울하게 몰릴 일 같은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 지식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학문에 열중하게 되었다. 물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질 상황이 도저히 안되었으니 이러한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13.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풍류 군주를 자처하던 건륭은 그림에 대해서도 욕심을 내었다. 문제는, 그가 그림을 보는 방식이다. 건륭은 그림을 보고 ‘건륭감상(乾隆鑑賞)’,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 ‘고희천자(古希天子)’, ‘삼희당정감새(三希堂精鑑璽)’, ‘의자손(宜子孫)자자손손 좋아라)’ 등의 문구와 수장인을 남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위대한 화가인 조맹부의 걸작은 건륭제의 만행에 처참하게 희생되어, 그 그림은 어린아이가 마구 찍어놓은 듯한 도장과 여백의 미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은 황제의 친필로 희생되었다. 마이클 설리반은 이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어 다음과 같은 평론을 남겼다.
“지칠 줄 모르는 원기왕성한 사람이요, 탐욕스러운 미술품 수집가며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가였으며, 자신의 제국의 역할의 한 기능으로서 중국의 미술 유산 위에다 자신의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두도록 결정했던, 바로 그 지칠 줄 모르게 제기를 쓰고 낙관을 한 바라 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