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호란 알껍질을 깨기 시작한 현대전
캉브레 정면을 향하는 좁은 전선에 영국군은 무려 400대의 전투 가능한 탱크가
그리고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개조된 별도 전차가 100대.
보병은 2개 군단급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보통 이런 작전에는 거의 1주일에서 길게는 몇달간 예비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포격은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상대방에게 어딜 공격할줄
다 알려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쓴 포탄 가격을 생각하면 효율성은 낮았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반기 되면 아예 포격 시작되면 안전한 벙커나 후방으로 병력을 빼서 포격 동안 쉬게 하다가
포격이 멈추고 상대가 공격하면 그 때 병력을 배치하는 수법까지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작전에서는 진격로에 위치한 상대 방어 시설만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2차 대전에는 자주 사용된 방식이었습니다. 이게 가능하게 된 이유는 바로 항공정찰이 좀더 정확해지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래서 대충 찍어서 포를 쏴도 꽤 확률 높게 상대 방어 시설을 제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월 20일 6시 포격이 멈추고 500대의 전차와 2개 군단은 순식간에 그 난공불락이었던 힌덴부르크 선을 뚫고 5km를
뚫고 들어 갔습니다.
이 작전에 새로운 전술 역시 포함 되었는데 바로 항공기를 통한 폭격이 적극적으로 진격로 개척을 사용되었습니다.
-영국군 주력 전투기 S.E.5a-
이런 작전 양상은 1차 대전에 대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이미지와 많이 달랐습니다.
1달간의 포격, 포격이 멈추면 호룰라기 소리와 함께 우르르 뛰어나가는 병사들. 그러나 철조망과 진흙밭에 막히고
상대방 기관총에게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서 후퇴라는 이미지와 말이죠.
상대하는 독일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시기 되면 사실 몇 km 뺐기고 뭐고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예측된 범위의 전선을 내주면서 진격하면 진격할 수록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주는 소위 종심방어교리가 점차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캄브레 전투 부터는 1차 대전 양상이 아닌 2차 대전과 현대전과 전쟁 양상이 닮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참호 속에서
수많은 인명의 피와 노력을 빨아 들이며 전쟁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죠.
2) 독일군의 반격
캉브레 전투는 하지만 완전히 현대전은 아니었습니다. 작전 초기에 성공에 곧 영국군은 자신이 더 뭘해야 하는지
잊어버렸습니다. 무선기가 사용되었지만 그 수는 소수고 아직 신뢰도 떨어져 유선이 더 사용되었기에
빙을 비롯한 영국군 장군들은 추가적인 상황 판단과 명령에 혼선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독일 처럼 하급 장교의 작전권 재량을 발휘하도록 훈련되지 못한 영국군 입장에서 치명타였습니다. 괜히 2군 사령관
플러머가 아주 제한적인 목적만 부하들에게 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전형적인 상황이었던 거죠.
영국군은 7km 가량은 일주일 동안 진격했지만 곧 공세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젠 독일군의 역습이 시작될 차례 였습니다.
- 빙의 상대 폰 데어 마르비츠 독일 2군 사령관=
마르비츠의 접근도 빙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포격은 기습적으로 짧게, 그리고 비행기를 공격에 적극 이용한다.
하지만 문제는 독일군은 공세의 선봉에 설 전차가 없었다는게 유일한 차이었죠.
그러나 전차보다 이 때만 해도 더 치명적이고 훌륭한 부대가 탱크를 대신해줄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차보다 방어력은 좋지 못했지만 더 유연하고 똑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이미 러시아와
이탈리아가 k.o 당해서 러시아는 완전히 전쟁에서 떠났고 이탈리아는 1년간 전쟁 참여가 불가능하게 몰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1918년 봄 독일군 대공세에서 이들은 전설이 됩니다.
바로 그들은
[돌격대] 였습니다.
- 사실 이들이 가진 다른 독일군과 차이점이라는 건 높은 확률로 영국제 루이스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 하지만
수류탄, 총검, 도끼, 루이스 기관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잘훈련되었으며 전황판단과 재량권을 가진 하급 장교들의 지휘를 받으며
연합군 방어진을 무력화 시키는 집단이었습니다.
이 때만 해도 맨몸이 기계도 이기는 시기였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