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들을 봐야 합니다.
링크를 걸면 너무 양이 많아져 제 아이디 검색을 해주세요.
지금까지 항상 응원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하고, 이번 편의 목표는 20댓글을 돌파해보는 겁니다. 하하. 그럼 재밌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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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한 두 방울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던 비가 장대비가 되는 것은 순식간 이었다. 굉장히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여름이 이른 봄날에 이런 장대비라니. 장대비가 만드는 소음이 연주의 말소리를 먹먹하게 먹는다.
“응?”
“그러니까...”
연주는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편하게 말해봐.”
내 독려가 효과가 있었는지 주저하던 연주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선배는 살면서 제일 힘든 일이 뭐였어요?”
예상보다 깊고 진지한 질문이다. 직감적으로 연주가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힘든 일을 겪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글쎄? 여러 가지가 있었지.”
대답하는 내 얼굴은 분명 착잡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25살.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나름대로 많은 풍파를 겪어봤다면 겪어봤다. 물론 그것들을 전부 연주에게 말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 중 하나의 얘기를 골라 연주에게 들려주었다.
“어릴 적에 절친했던 친구 한 명이 있었어. 정말 친했지.”
그리움과 죄책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최대한 그것들을 꾹 참고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기억이 안나. 하지만 마음만은 정말 잘 통했어.”
“여자... 여자 아이였죠?”
그리움과 죄책감 사이로 비친 작은 연정을 읽어낸 모양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사실 친구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그 애를 좋아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애가 병에 걸렸어.”
연주가 ‘아.’아고 탄식을 터뜨렸다. 말하지 않아도 큰 병이란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것은 그 아이가 단지 목숨이 달린 큰 병에 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척수성 근위축증. 뭐 그런 명칭의 병이었는데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래. 처음 판정받았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 근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라고. 가벼운 물건도 혼자 들기 힘들 정도고. 나중에 가서는 혼자서 걷지도 못했지.”
갑자기 내리는 장대비가 만든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들이킨 술기운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다. 가슴을 조여 오는 죄책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참회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그 애가 다시는 내게 보지 말자고 절교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거겠지. 그때 내가 그 애를 외면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후.”
깊은 회한으로 얼룩진 한숨을 토해낸다.
“그때 난 무서웠던 것 같아. 눈앞에서 좋아하던 애가 그런 모습이 되고, 또 금방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그래서 절교를 받아들이고 그 애한테서 도망쳤어.”
“...”
연주는 놀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침묵했다.
그때 그렇게 도망쳤으면 안됐는데... 이 일 이후로 나는 내게 이별을 통보하는 여자를 붙잡지 못했다. 그땐 그렇게 도망쳐 놓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은 붙잡는다는 것이 죄스럽고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9개월 전 정말 좋아했던, 그렇게 잡고 싶었던 여자도 결국 그냥 보낸 것은 다 그런 이유였다.
짧은 것은 1년도 채 안된, 긴 것은 10년 정도 전의 기억들과 감정들이 얽혀 미묘한 기분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됐어?”
“네.”
대충 짧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사실 더 덧붙일 것도 없는 얘기다.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를 연주에게 해주는 이유는 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연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지.
“이제 네 얘길 해봐.”
“선배한테 조금 미안할지도 모르겠어요. 선배에 비하면 저는...”
연주가 말꼬리를 흐린다. 아마도 나에 비해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원래 자기에게 닥친 일이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이미 과거의 얘기일 뿐이고.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잖아. 너는 지금 겪고 있는 고민이고.”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연주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연주는 술을 받자마자 그대로 꿀꺽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연주는 속 시원하게 자기 고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사실 저 경영이라든지 경제라든지 이런 쪽으로 진학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다.
“제가 진학하고 싶었던 건 미술이었어요.”
똑 부러진 성격 덕에 과제든 시험이든 잘 해내는 연주였지만, 연주와 미술을 생각하니 또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림에는 제가 조금 재능이 부족했죠. 그래도 저는 그림이 좋았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못된다면 그림을 옆에서 지키며 볼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되길 바랐어요.”
미술과 관련된 과로 진학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주는 지금 전혀 다른 과에서 다른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대충 어떤 문제인지 감이 잡힌다. 반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미술 쪽으로 제가 진학하는 걸 원치 않았어요. 미술 쪽은 솔직히 돈이 많이 들거든요. 부모님은 그저 제가 빨리 돈을 벌어 독립하길 바라셨어요.”
말을 잇는 연주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답답한 심정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그 답답함에 나도 덩달아 가라앉아 그 기분을 풀려고 자작으로 술을 들이켰다.
“그래도 저는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후.”
한숨과 동시에 연주는 또 한 번 술을 들이킨다. 확실히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그때만큼은 술만 한 것이 없다.
“기운 내. 꼭 꿈과 관련된 과에 진학해야 꿈에 다가가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술을 마시게 할 순 없었다. 술이 위로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때만큼’이다. 그때가 지나고 술이 깨면 모든 것은 그대로다. 괴로운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술의 위로가 아니라 사람의 위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주의 마음이다.
“기왕 경영과로 와버린 거. 돈 왕창 벌어서 미술관이라도 차리면 되잖아. 그게 언제가 되었든 죽기 전에만 이루면 그 꿈 이룬 것 아니겠어? 단지 가는 방법이 조금 특이할 뿐인 거지.”
위로를 건네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위로를 듣는 연주도 그랬던 것일까? 약간이지만 작게 웃음 짓는다.
“그러네요. 고마워요 선배. 도움 됐어요.”
“그나저나 신기하네.”
“뭐가요?”
나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봄에 장맛비라니.”
아스팔트 바닥을 뚫을 듯이 무서운 기세로 내리던 장대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에취! 혀, 형!”
어디 있다 왔는지 현중이 녀석이 어느새 돌아와 가게 문에서부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쫄딱 비를 맞고 젖어서 재채기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웃겼다.
“에이씨! 이렇게 그칠 비인 줄 알았으면 좀 더 기다릴걸. 괜히 편의점은 갖다가...”
피식.
그런 현중이를 바라보는 연주와 내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18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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