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을 맡게 된 헌애왕후는 우선 김치양을 부릅니다. 김치양은 본래 헌애왕후의 외가쪽 친척으로 승려였습니다. 그러던 중 경종이 죽고 천추궁에 나가 있던 헌애왕후와 여러 번 밀회를 가지면서 사통하는 관계가 됩니다. 나중에 성종이 이를 알고 김치양을 처형하려고 했으나 헌애왕후가 간청하여 곤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가 섭정을 맡게 되자 그를 부른 것입니다. 헌애왕후는 그에게 합문통사사의 벼슬을 주었고 몇년 뒤에는 우복야 겸 삼사사에 오릅니다. 우복야는 육부를 총괄하는 상서성의 2품 벼슬이고 삼사사는 회계를 맡아보는 삼사의 3품벼슬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김치양에게 인사권이 집중되었음을 말합니다. 김치양은 요직에 자기 세력의 사람들을 앉히고 권세를 부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그에게 뇌물을 바쳤고 김치양은 그 뇌물로 300여 간에 달하는 화려한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헌애왕후와 대놓고 부부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kbs에서 방송된 드라마 천추태후를 보지 않은 편이지만 우연히 한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헌애왕후(천추태후)가 여러 신하 앞에서 김치양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여자도 사람인데 사람의 본성을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사실 뭐라고 말했는지 제대로 기억은 안나네요. 대충 저런 내용인 거 같은데.)
하지만 글쎄요. 저런 말이 나오려면 당시 고려가 여성의 재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고려는 여성의 재가에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혼으로 왕후가 된 사례가 있었을 정도였죠. 바로 헌애왕후의 친오빠인 성종의 제1왕비 문덕왕후 유씨가 바로 그 예입니다. 문덕왕후 유씨는 처음에는 태조의 손자이자 수명태자의 아들인 홍덕원군 왕규와 혼인했었습니다. 딸까지 낳았었죠.(이 딸이 목종 비 선정왕후 유씨입니다.) 그런데 홍덕원군이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고, 성종에게 시집가서 왕후가 된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성종의 왕위계승에 힘을 보태기 위해 광종의 딸이자 경종의 누이인 문덕왕후를 시집보냈다는 거였죠. 그리고 고려 말에도 정실은 아니지만 재가로 왕의 후궁으로 들어간 경우도 몇몇 있었죠.(충렬왕과 충선왕의 후궁 숙창원비(숙비)김씨, 충선왕의 후궁 순비 허씨 등) 문덕왕후의 경우 재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은 보이지 않았고 고려 말에 재혼으로 후궁이 된 여인들의 경우 부정적인 의견은 그녀들의 개인 행실의 문제지 재가가 문제가 아니었죠.
그렇다면 유독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경우가 문제가 된 건 왜일까요. 그리고 김치양이 정사를 농락하는 동안 목종은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앞서 말했듯이 목종이 왕위에 오른 건 18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김치양의 권세가 한창일 무렵 그는 성년이 됩니다. 이제 자신의 정치를 하고 싶을 때였으나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김치양이었습니다. 목종이 김치양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목종이 김치양을 몰아내려할 때마다 모후인 헌애왕후가 막아섰습니다. 마음이 여리고 효자인 목종은 그런 어머니를 거역할 수 없었고, 김치양의 권세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목종은 결국 정사에 뜻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남색에 눈을 뜨고 맙니다.
처음 목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내는 유행간이라는 이로, 남달리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이 용모가 아름답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화랑에 대한 설명을 생각해볼 때 아마 현재 말하는 미청년 타입이 아닐까싶네요. 목종은 그에게 합문사인이라는 벼슬을 주었고 왕의 총애를 업은 그 역시 김치양처럼 정사를 농단해갔습니다. 또한 유행간이 발해 출신의 유충정이라는 이를 목종에게 소개했는데, 그 역시 미모가 뛰어나 목종의 총애를 얻었고 고려의 정치는 김치양 일파와 이 두 미남자의 손에 놀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동성에 눈을 뜬 게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바로 목종에게는 자식이 없었다는 거였죠. 목종은 앞에서 말한 선정왕후 유씨 외에도 요석택궁인이라고도 불린 궁인 김씨를 후궁으로 두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서 아들은 커녕 딸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헌애왕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이 아이를 아들이 없는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큰 장애물 하나를 치워내야했지요.
당시 고려 왕실은 왕위 계승을 할 수 있는 왕족들이 부족했습니다. 25남 9녀를 낳은 태조와는 달리 그 후대의 왕들은 아들을 한 둘밖에 낳지 못하거나 아예 아들이 없는 경우도 있었고, 광종 대의 호족 숙청과 그 뒤를 이은 경종의 복수법 정책 등으로 왕족들이 거기에 딸려 쓸려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목종제위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 후보, 그러니까 목종과 가까운 친척이며 부모 둘 다 왕족인 사람, 그리고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왕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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