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이 아이를 불쌍히 여깁니다.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따져보면 자기 사촌 동생이자 조카였으니까요. 그래서 유모를 정해서 아이를 궁에서 길렀습니다. 아마 순이란 이름을 지어 준 것도 성종이겠지요.
유모는 어린 순에게 항상 '아버지'라는 말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종이 어린 순을 찾자 아이는 성종의 무릎 위에 오르며 '아버지, 아버지'라고 불렀고(실제로는 '아빠'에 가까웠겠죠. 돌쟁이 아기였으니까요.)성종은 이런 순이 가여워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성종은 아이를 친아비에게 보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왕순은 친아버지 왕욱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왕순이 5살이 되던 해 왕욱은 귀양지 사수현에서 사망합니다. 왕욱은 죽기 전 어린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그 금을 술사에게 주어 사수현에 있는 서낭당의 남쪽 귀룡동(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와룡산 일원)에 장사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으라는 말을 남깁니다. 아버지가 죽자 아들 왕순이 술사에게 가서 그 말대로 엎어서 묻어달라고 하니 술사는 "무엇이 그다지도 바쁜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려사에 보면 안종 왕욱이 시문과 지리에 능통하였다고 했는데 아마 풍수에 관련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왕욱에 대한 얘기가 나올 일이 없을테니 여기서 그 후의 일을 정리하면 나중에 아들 왕순이 왕이 되자 아버지를 추증하여 안종 효목대왕이라는 시호와 묘호를 바치고 능을 건릉으로 이장합니다. 또 후에 효목이라는 시호를 효의로 고치고 헌경, 성덕이라는 시호를 더 올려서 안종 효의헌경성덕대왕이 됩니다. 능호도 건릉에서 무릉으로 바꾸었구요.
아버지가 죽은 후 왕순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997년 10월, 이번에는 왕순의 사촌 형이자 외삼촌, 그리고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성종이 사망하게 됩니다.
성종은 제1비 문덕왕후 유씨(광종의 딸, 경종의 친누이), 제2비 문화왕후 김씨, 제3비 연창궁부인 최씨 등 세 부인을 두었지만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딸만 둘 얻었을 뿐이었습니다.(이 두 딸은 나중에 모두 현종의 왕비가 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궁에서 길렀던 선왕 경종의 외아들, 그리고 성종 자신의 외조카(누이인 헌애왕후의 아들이니까)인 왕송에게 자신의 왕자시절의 봉호인 개령군을 주어 일찌감치 왕위계승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성종이 죽자 왕송이 왕위에 오르니 제7대왕 목종입니다.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18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후인 헌애왕후 황보씨가 섭정을 맡습니다. 그리고 현종 왕순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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