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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9/02 08:39:37
Name 王天君
File #1 movie_image_(1).jpg (87.1 K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일대종사 보고 왔습니다.(스포 살짝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논하기에는 그의 영화세계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미천합니다. 필모그래피 중 챙겨본 것은 ‘중경삼림’ 하나 뿐이니까요. 감상을 쓰기에는 이 영화를 꼼꼼히 이해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평소의 딴지 잡는 식의 감상과는 달리, 좀 더 겸허하게 써야할 것 같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에 초점을 맞추는 Eternity의 리뷰가 더 맞을 것 같기도 하군요.)

왕가위 감독은 왜 이미 시리즈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캐릭터인 ‘엽문’의 이야기를 굳이 또 내놓은 걸까요? 이소룡의 스승이자 영춘권의 고수로 익히 알려진 인물의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할 의도였을까요? 왕가위가 보고자 했던 부분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시대적 격변 속에서 하나 둘 잃어갈 수 밖에 없는, 그럼에도 최후까지 무언가는 지키고 있었던 한 장인의 인생을 말이지요.  덧없어서 아름다운, 덧없이도 아름다운 그런 것들 말입니다.

어느 최고수의 무림지배 이야기는 아닙니다. 민족주의 정신을 주먹에 담아낸 영웅의 이야기도 아니지요. 영화 일대종사는 주인공 엽문의 ‘의지와 선택’에 관한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의지와 선택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운명, 우연 같은 불가항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엽문이란 인물이 무술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자부심과 어느 정도 낭만적이었다는 정도 뿐입니다. 한 인물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가 그려내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이라면, 이는 실패한 전기영화일수도 있습니다. 위대하지 않은, 서사시의 주인공이라니요.

오히려 왕가위 감독은 엽문,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감싸고 요동치는 시대 자체를 주목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 때도 있었지, 북방과 남방으로 나뉘어 고급 술집에서 합을 겨루며 무공을 가늠하던 황금기가 번쩍였는가 하면, 수상한 시대, 지조를 잃고 외세에 몸을 기대던 자와 이를 꾸짖는 자가 뼈와 살로 부딪히던 암흑기도 있었다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품에서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타락이나 변절이 아니라, 세월의 풍파에 조금씩 풍화되어 가는 거암의 설움 같은 것입니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있는 저 무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애처로운지요.  개인적으로는 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근대 무림 판타지’ 정도로 보고 싶군요.

모든 무협영화가 그렇지만, 특히나 이 영화에서는 왕가위 감독이 무술을 ‘이기기 위한 몸짓’ 이상으로 보여주려 고심한 티가 역력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쓰러트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각 동작 속에 서로를 섞고 그것을 일련의 안무처럼 만드는 선문답에 가깝게 보입니다.  특히나, 궁이와 엽문이 서로 대결하는 모습은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무예가 가장 돋보이는 순간입니다. 서로의 콧날이 스치고, 손과 손을 마주잡는 클로즈업 장면에서 우리는 엽문과 궁이가 서로의 자존심을 넘어서 무언가를 교감하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시대가 변하고, 무언가를 나눌 수 있던 무술의 의미는 일성천의 형의권처럼, 상대방의 파괴를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갈 수 밖에 없지만요.

영화 속 인물들은 무술인의 지조를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들이 먹고 살고,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가져가는 것은 무술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앗아갑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결코 흘려보낼 수 없던 찰나의 순간과 조그마한 연심의 조각입니다. 번영의 시대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단추 하나에 담아 건네주는 엽문을, 복수에 모든 인생을 걸고 과거의 연모를 나즈막히 고백하는 궁이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세속의 파도에도 그들이 놓지 않았던 낭만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낭만속에서 서로의 흔적을 확인할 때, 희미했던 애상이 뚜렷하게 떠오를 때, 슬픔을 애써 삼키는 그들의 모습은 우아하고, 또 애절합니다. 이런 것이 왕가위 스타일이라 불리는 것일지도요.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경박한 무협영화에 질렸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거기에는 울림이 있고 뭉클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또한 가슴을 쎄하게 통과하는 듯한 스산한 느낌에 무덤덤한 인생이 조금은 다채롭다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묵직한 이야기입니다. 담고 있는 로맨스와 무술 둘 다 말입니다.

* 송혜교씨 이쁘게 나오더군요. 기품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걸 능히 해내는 모습에 뿌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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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자유
13/09/02 08:50
수정 아이콘
좋은 감상문이네요. 저도 많이 공감합니다. '무엇이 낭만인가? 혹은 무엇이 사랑인가?' 어떻게 보면 왕가위 감독의 영화 면면히 흐르는 흐름이 이것일수도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묵직함에는 공감을 하지만 문제는 기존의 영화에 비교하면 그리 애잔하지도 그리 낭만적이지도 않아서 실망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스치고 지나간줄 알았는데 어느새 마음속에 머울져서 문득 떠올랐을때 내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감정이 격해지거나 요동하거나 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그런 느낌이 없다고나 할까요?
너무 사랑해서 흠모해서 그럴지도 모르죠. 그사람이 만들어온 영화들을요. 그래도 여전히 제게는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싶은 감독 1순위 입니다.
王天君
13/09/02 13:33
수정 아이콘
개인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기존의 왕가위 영화보다는 조금 더 거시적인 이야기였다고 봅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요소가 부족했을지도요. 애초에 일대종사는 추스릴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어떤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사람과 시대에 관한 이야기 같거든요.
13/09/02 09:19
수정 아이콘
저는 이동진님 말처럼 대사들이 꾀 오글거렸어요
王天君
13/09/02 13:35
수정 아이콘
한껏 멋을 부린 영화니까요. 저는 그것보다도, 대사가 너무 은유적이어서 가끔은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는 지 따라가기가 버겁더군요. 이를테면 궁이의 아버지와 엽문이 나누는 대화 장면들이요.
Abrasax_ :D
13/09/02 10:27
수정 아이콘
제 감상과 거의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에 장쯔이의 모습에서 눈물이 살쯕 나더라고요. 근래 본 영화 가운데 가장 만족했습니다.
王天君
13/09/02 14:30
수정 아이콘
자신있게 추천하기는 그렇지만, 여운이 진하게 남는 영화였습니다.
누렁이
13/09/02 16:20
수정 아이콘
저도 근래 본 영화 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왕가위의 무협물?!하고 봤는데 보다보니 완벽하게 로맨스 영화로 이해가 되더군요;;
이 영화 역시 꿉꿉합니다. 화양연화나 2046이랑 연작이라 해도 될 정도로.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담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또 시대과 만남이 어떻든 사람은 고독해질 수밖에 없을 거란거. 퉁퉁거리면서 사람을 날려보내는 무도가 이렇게 쓸쓸하게 보이는 영화도 처음이더군요. 특히나 장쯔이의 기차 격투신은 정말.....흔해빠진 표현이지만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뭐 대사 스타일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저도 "무슨 뜻이지?"하고 생각하다 다음 대사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는데..무협에 시대물이라면 가능한 시도였다고 봅니다. 스타일에 익숙해지니까 오히려 더 뭉글뭉글한 감정이 잘 살아나더군요. 장쯔이와 양조위가 직설적인 현대어로 대화를 나눴다면 맛이 떨어졌을 것 같은. 그나저나 흡사 장예모의 "영웅"을 떠올리게 하는 그 포스터 좀 제발ㅠㅠ처음 개봉했을때 왕가위 영화인지도 몰랐어요 저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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