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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01 17:47
실은 그 손자의 아버지도 역대급 op....
심지어 그 손자의 첫째아들(문종)도 역대급 op....단지 너무 단명했을뿐..
13/09/01 13:28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왕위는 이미 제 겁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은 이성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지도..크크 잘 읽었습니다.
13/09/01 13:35
잘 읽었습니다!
저 정도라면 실력으로 보나, 당시 권세로 보나 왕위에 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네요. 태종을 싫어했던 이유가, 자신이랑 가장 비슷해서 라고도 하죠. 크크크
13/09/01 13:39
그런데 우리 민족은 긴 역사 속에서 왜 정복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부끄럽게도 제가 우리 역사에 크게 정통하지 못해서 틀릴 수도 있지만 고구려 이후로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시도 자체가 거의 없지 않았나요?... 물론 나라가 안정이 되면서 정복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겠지만 그래도 만주 지역 정도만이라도 복속시켜서 우리 영토로 확보해 뒀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13/09/01 13:42
시도는 꽤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죠. 제일 큰 문제는 우리나라가 결코 큰 나라가 아니었다는 점과 바로 붙어있는 중국이 세계최강국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다른문제는 만주같은게 별 필요없었단것도 있었겠네요. 구한말이나 되서야 종자개량+조선인 대거이주로 농사를 지을수있었죠. 또 그렇게 먹더라도 여러 유목민족들이 있었기에 지키는 것도 어려웠구요.
13/09/01 18:29
반도가 육로와 해로가 모두 열러 뻗어나가기 좋은 지형이 될 수도 있지만;;
한반도의 경우는 바로 위에 세계 최강국이 떡하니 있다 보니..
13/09/01 14:07
고려말 중국의 원명 교체기를 틈타 이성계가 요양지역을 잠시 정복한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통일왕조인 명이 들어서고 그지역을 군사작전없이 통보로 자신의 지역으로 했죠 사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도 원간섭기때 원의 직속령이었던 철령이북 지역을 명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하겠다고 통보 -> 우왕및 최영 반발 -> 군사작전 실시 -> 이성계및 급진파 신진사대부의 위화도회군 의 순서로 사건이 진행됩니다. 대륙으로 진출하기엔 중국및 주변 이민족들의 군사력이 너무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13/09/01 15:27
http://mirror.enha.kr/wiki/%EC%A0%9C1%EC%B0%A8%20%EC%9A%94%EB%8F%99%EC%A0%95%EB%B2%8C
고려 공민왕때 요동 진출 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나라 상황이 상황인지라 성만 함락시킨후 철수했다네요.
13/09/01 15:50
1. 대륙으로 진출하기엔 중국과 중국의 지배권을 몰아내던 북방 이민족의 힘이 컸다.
2. 고구려(초창기와 확장기)나 발해야 중심지가 압록강 주변이나 만주쪽에 있었지만.. 청천강 이남지역에 도읍을 세운 한반도 중심의 나라가 북만주쪽까지 뻗기엔. 개마고원쪽의 산맥이 엄청난 비효율을 초래한다. 그나마 압록강하류쪽은 뻗어나가기 좋지만 중원쪽 방향인데다가 1번의 문제로 수비에 급급.. 그럼에도 통일신라이후 꾸준히 북쪽으로 조금씩 진출하긴 했죠. 고려초창기/고려말기/조선전기 이렇게요 사실 두만강국경선도 청나라가 주장하던건 두만강 수계중에 아랫쪽 라인이었는데 북한이 두만강 수계중에 가장 위에 올려놓게 중공과 합의하긴 했더군요.. 오로지 우리나라의 영토에 관한 책이라면 '영토한국사'라는 책이 술술 읽히더군요.. 다만 여러 학설에 있어서 너무 우리나라에게 유리한쪽만 취한다는 점은 있지만 주변도서관에서 빌릴수 있으면 한번 대출해서 읽는거 추천.
13/09/01 13:51
태조가 자칫 역성혁명이란게 나라를 꽁(?)으로 먹었다는 인식이 강한데
이정도는 해야 한 나라 창업주는 될 수 있다는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13/09/01 14:30
제 머리속의 이성계의 이미지는 어렸을 때 위인전 본 것때문에 불세출의 신궁 이미지였는데 지금와서 이성계의 활솜씨에 대해 정사로 전해지는 것들을
찾아보면 위인전이 오히려 담백하게 느껴질 정도더군요;;
13/09/01 15:19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한 채 계속 저항해오므로 아군은 성을 포위했다. [마침 태조가 활이 없는지라 종자의 활로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면상을 명중시켰다.] - <고려사> 공민왕 19년 봄 정월
================================================================================================ 적장 처명(處明)이 자기 용맹을 믿고 계속 항거하자, 태조가 이원경(李原景)을 시켜 “너 하나 죽이기는 문제가 아니지만 너를 살려 쓰려고 하니 빨리 항복하라.”고 설득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원경이 “너는 우리 장군의 재주를 모른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화살 하나로 꿰뚫어 버릴 것이다.]”라고 을렀지만 그래도 항복하지 않자 [태조는 그의 투구를 활로 쏘아 날려버린 후] 다시 이원경을 시켜 설득했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태조가 다시 그의 다리를 쏘니 처명이 화살을 맞고 퇴각]했다가 잠시 후 다시 와 싸우려고 하자 [태조는 이원경을 시켜 “네가 만약에 항복하지 않으면 네 얼굴을 쏘아버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처명이 결국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고 말았다. - <고려사> 지용수 열전 ================================================================================================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전진하다가 멀리서 적의 등등한 기세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 해가 이미 기울었는데 태조가 험한 길에 접어들자 적의 정예 기병이 과연 튀어나왔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 20발을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柳葉箭) 50여 발을 쏘았는데 모조리 적의 면상을 맞춰 죄다 거꾸러뜨렸다.] 적과 세 번 맞부딪쳐 힘껏 싸워 섬멸했는데 그 땅이 진흙탕이라 피차간에 모두 빠져서 서로 엎어지고 자빠졌지만 나와 보니 죽은 자는 모두 적이었고 아군은 한 사람도 부상하지 않았다. - <고려사> 변안열 열전 ================================================================================================ 우리 군사들이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일컬으며 다투어 피하였는데, 태조가 그의 용예(勇銳)함을 아깝게 여기어 이두란에게 명하여 사로잡으라 하니, 이두란이 사뢰기를, “만일 산 채로 잡으려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傷)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얼굴 위에까지 단단한 갑옷으로 덮어서 활을 쏠 틈이 없었는데,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쏠 테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즉시 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 나가며 쏘니 바로 그의 투구 꼭지를 맞히었다. 투구를 맨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니 그 사람이 급히 바로 쓰는지라, 태조가 곧 쏘아서 또 투구 꼭지를 맞히자 투구가 마침내 땅에 떨어지므로, 이두란이 즉시 쏘아서 죽였다.] 이에 적의 사기(士氣)가 꺾이므로, 태조가 앞장서서 분격(奮擊)하매 적의 날랜 선봉(先鋒)이 전부 죽으니, 적의 통곡하는 소리가 1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 <동국통감> 신우 6년 ================================================================================================ (출처는 모두 네이버 지식백과 입니다.) 양궁왕 이성계.txt
13/09/01 16:06
제가 잘 몰라서 여쭙는데,
조선을 건국한 왕이 된 인물에 대한 평가와 묘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장수로서의 업적은 몰라도 이런 종류의 일화에 대한 것은 미화와 과장을 거친 내용일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훨씬 정교한 장비와 활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지금의 양궁 선수들도 저런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고, 여러 역할을 해야 하는 장수가 그 시대의 장비를 가지고 전시에 저런 활약을 보인다는 건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것 같은데요.
13/09/01 16:15
현대의 언론기사나 전쟁기록 조차도 미화나 과장,잘못된 기록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한국전쟁때의 공중전 기록 같은 경우 파일럿의 증언뿐 아니라 심지어 항공카메라로 확인하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측에 기록된 미그기 격추대수와 북한/소련측에서 기록된 격추기록이 상당히 차이난다고 합니다.
13/09/01 16:19
네, 사실 그래서 제가 느끼기에는 이성계의 활 실력이 출중하였을 것은 짐작이 가능하나, 이런 종류의 묘사는 심한 과장일 것이라 여겨져서요.
좀 심하게 말하면,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13/09/01 16:27
고려사 같은 경우 세종~문종때에 왕명을 받아 씌여졌고 동국통감같은 경우에도 조선 성조때에 왕명을 받아 씌여진 책이니 둘다 이성계가 미화됐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13/09/01 16:29
저도 잘 모르지만 중국사에서도 이런 면모가 어느 정도는 나와있다고 서술한 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엔하위키에서였던가 그래서 신뢰도는 조금 많이 떨어집니다.
13/09/01 16:45
이성계가 좀 더 고분고분한 성격이었으면 이순신 취급 받았을지도 모르죠. 이순신 성깔이 좀 있었다면 이씨왕조 세컨드시즌이 있었겠고
13/09/01 18:41
음...뻘플인데 신불해님, 피지알에도 계셨군요 흐흐 반갑습니다.
특히나 제가 꽤나 좋아하는 무장 이성계에 대해서라니 더 반가운 글이네요
13/09/01 19:22
역시 이성계...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긴데, 우리나라 먼치키급 장수 중에 고려 유금필(유검필?)도 포함되겠죠? 귀양 중에도 적을 격퇴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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