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블루>
- 이상(理想)이란 파도가 치고 간 자리에 남겨진 사람 (스포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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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블루>가 리마스터링 되어 감독판으로 개봉했습니다. 저는 영화회 사람들이랑 함께 보러갔지요.
제가 <그랑블루>를 처음본 건 대학시절 수업 시간 때였는데요. 그 때도 저는 주인공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뭐 이렇게 무책임한 녀석이 다 있냐?!” 하며 분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5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만났지만, 지금도 그 때의 심정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이 영화를 소화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크게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첫 번째는 저와 같은 입장이고 또 하나는 ‘로망’의 관점이겠죠. 처음 이 영화를 소개해 주신 교수님께서는 이 영화가 자신의 ‘로망’을 담고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별로 공감하진 않았죠.
영화 속 주인공인 자크는 부모님을 잃고 돌고래를 가족 삼아 컸습니다. 미국인인 어머니는 자크를 낳고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버렸고,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잠수를 하다 목숨을 잃었죠. 자크가 그 누군가보다 돌고래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해는 갑니다. 부모를 잃은 그는 그리스의 바다와 돌고래가 자신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죠.
세계 잠수 챔피언인 엔조는 자크에게 집착하는 친구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볼 때 엔조도 정상이 아니죠. 바다 속 깊이 침잠하려는 그의 욕망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엔조는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바다 속 깊이 도달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트로피는 그저 부상에 불과하지요. 엔조가 자크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자크의 뛰어난 잠수 능력과 대결하고 싶은 승부욕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크이기 때문입니다. 엔조와 자크는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맹목적 이상추구를 함께 공유한 사이이죠.
문제는 남겨진 사람입니다. 자크의 애인이자 그의 아이를 가진 조안나는 자신의 터전(뉴욕)을 포기하고 자크의 곁에 머뭅니다. 바다와 돌고래를 자신의 가족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인간적인 가족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자크에게 조안나는 항상 차선입니다. 자크의 눈물을 조안나는 모두 끌어안으려 하지만 그는 무심하게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자크는 자신의 욕망의 파도가 조안나를 치고 나가도 멈추지 않습니다. 엔조와 자크가 깊은 바다 속에서 인어를 만나고 황홀경 속에 욕망을 채워갈 때, 남겨진 안나는 눈물 속에서 허우적댑니다.
이루지 못한 경지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요. 엔조와 자크는 끝없는 욕망에의 추구로 전설에 오릅니다. 그곳은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 영광의 주변에는 부서진 파편들이 존재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이지요. 남겨진 자들에게 명성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사람의 온기 속에서 위안을 얻는데 말입니다.
자크의 욕망, 그의 바다와 돌고래에 대한 집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그를 키웠고 살게 한 것이 바로 그것들이지요. 그래서 끝끝내 안나의 손을 뿌리치고 죽음의 장소에 뛰어든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필연이었을까요. 조안나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끌어안아 주었듯이, 자크도 조안나의 아픔에 조금은 닿아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이상이 파멸의 길이 되는 건 남겨진 자의 아픔 때문입니다. 영광에 오른 자리의 주위에 남겨진 자가 없다면 그저 전설의 비석만 남겠죠. 하지만 조안나와 그의 아이는 남겨졌고, 파멸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상(理想)은 아름답고 빛나지만, 너무나 이기적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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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개봉한 <그랑블루>는 감독판이라기 보다는 오리지널판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 진출할 때 분량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상당 부분 편집이 됐는데, 이번에 개봉한 것은 편집 전의 버전이죠. 프랑스에 개봉했을 때는 원래 이 버전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랑블루>는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입니다. 제가 위에서 쓴 감상에서 주인공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툴툴댔지만 사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입장에 대해 고민하게 하죠. 이상과 현실, 욕망과 타협, 자연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 따위를 작위적으로 자르지 않고 그 경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경계 위에 관객을 세우죠.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랑블루>는 영상도 아름답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에 부여된 캐릭터성도 훌륭하고 매력이 있죠. 많은 분들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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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년 전에 쓴 감상
http://blog.cyworld.com/cisiwing2/2650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