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릉은 조선 숙종과 그의 계비 인현왕후, 두번째 계비 인원왕후의 능입니다. 보면 꽤나 이상한 구조의 능입니다. 단순히 왕과 왕비 둘이 함께 있는 능이라서가 아니라 그 배열이 특이합니다. 업로드된 사진을 보면 가장 왼쪽에 있는 단릉이 인원왕후의 무덤이고 그 오른쪽에 나란히 놓인 쌍릉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입니다. 셋이 같이 있다지만 하나는 어쩐지 곁방살이하는 느낌입니다. 더군다나 정자각이라든가 홍살문도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에 맞춰져있구요. 즉 애초에 명릉은 숙종과 인현왕후 둘만을 위한 능이였던 거죠.
1701년 인현왕후가 37살의 나이로 죽자 숙종은 명릉을 만들고 인현왕후 옆자리를 비우고 표시하여 나중에 그 곳에 자신이 묻히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1720년 숙종이 죽고 생전에 정해놓은 그 자리에 묻혀 숙종과 인현왕후 쌍릉이 이루어집니다.
영조 33년인 1757년 3월 26일 숙종의 두번째 계비이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가 죽습니다. 당시 나이는 71,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었고 묫자리 또한 정해져 있었죠. 지금 인원왕후가 묻혀있는 곳에서 약 400보 떨어진 자리가 원래 인원왕후가 정해놓은 자신의 묫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니, 문제가 이미 있는 상황에서 인원왕후가 죽은 거였죠. 인원왕후가 죽기 한달 전에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죽었거든요. 그래서 한창 능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홍릉이었죠. 나중에 영조도 같이 누울 자리였기에 그 공사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능을 만든다? 왕릉을 만든 다는 건 단지 무덤 봉분 하나만 덜렁 만드는 게 아니라 주변 석물에 정자각을 비롯한 온갖 부속 건물에 등등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원래 정해놓은 인원왕후의 묫자리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을 벌채하려면 또 막대한 비용이 들 게 뻔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그런 역사를 동시에 할 만큼 그리 부유한 정부가 못됐죠.
결국 영조는 인원왕후를 명릉 근처의 언덕에 묻고 명릉에 포함시켜버렸습니다. 봉분이나 주변 석물은 새로 만들어야 했지만 부속 건물은 기존에 있던 걸 그대로 쓰면 그만이니까요.
인원왕후는 어떤 심정일까요? 왕세제 시절부터 보호해왔던 양아들이 자신을 팔자에 없는 곁방살이를 시키는 것에 언짢아할까요, 아니면 예정보다 더 가까이 남편 곁에 있게 된 것을 기뻐할까요.
다음은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입니다. 위에서 홍릉은 원래 정성왕후와 영조의 능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만 결국 정성왕후만이 그 곳에 잠들어있죠. 그 사연에 대해서 말해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