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3/07 03:37:02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검푸른 해협 - 1. 일본을 공격한다
"짐이 즉위한 처음에 무고한 고려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변란에 시달렸기에 즉시 전쟁을 중지하도록 하고는 그 나라를 되돌려 주었으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에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감격해 하면서 와서 조회하였는데, 의리상으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지만 정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다."
"일본국은 고려와는 아주 가깝게 있으며, 개국한 이래로 역시 가끔씩 중국과 통호하였다. 그런데 짐의 몸에 이르러서는 단 한 명의 사신이라도 보내어 통호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왕의 나라에서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에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짐의 뜻을 고하게 하는 바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통호하면서 결연을 맺어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용병(用兵) 하는 것을 어느 누구인들 좋아하겠는가. 왕은 이를 잘 생각하라"

예, 아주 좋은 말씀이십니다. 좋게 좋게 말 하다가 마지막에는 협박을 살짝 곁들였군요.

쿠빌라이 칸이 일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일단 1264년 고려 출신 승려 조이가 일본의 존재를 알려줬고, 집도 길도 황금으로 뒤덮여 있다는 지팡구 전설에 빠졌다는 것 등이죠. 지팡구 얘기는 참 전설적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전설일 뿐 -_-; 마르코 폴로가 정말 원나라에 갔는지부터가 의심되는데요 뭐.

팽창주의자인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 밖에 또 나라가 있다면 당연히 찔러볼 만 했습니다. 거기다 남송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효과도 있었죠. 거기에 쿠빌라이 칸은 서태평양부터 인도양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죠. 서쪽의 칸국들은 이제 자립해 원나라와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육상으로의 무역과 교통은 갈수록 힘들어졌고, 육상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한(-_-) 바다를 지배하려 한 것이었죠. 단지 지팡구 전설 때문이었으면 일본 외에 더 남쪽으로 가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베트남부터 저 바다 건너 자바까지 공격했었죠.

1266년, 마음을 정한 쿠빌라이 칸은 흑적, 은홍을 보내 일본에 사신을 보내라고 합니다. 고려로서는 그 조이가 참 짜증났을 겁니다. "본국을 참소하고 헐 뜯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고 돼 있군요. 일단 원종은 송군비와 김찬을 보내 함께 일본에 가게 합니다.

"이제 일본과 국교를 통하려 하니, 경은 사신을 인도해서 그들의 마음을 열고 깨우치게 하라.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일찍이 통호(通好)하지 않았다고 핑계하지 말라"

이런 협박까지 왔으니 뭐 어쩔 수 있었나요. 그런데... 쿠빌라이 칸의 걱정이 진짜가 됩니다. 사신들은 겨우 거제도까지 갔다가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돌아옵니다. 원종은 이 틈을 타 송군비를 보내 이를 변명합니다.

- 대마도 넘 멀었쪄요 ㅠ_ㅠ 어찌 감히 상국의 사신을 그런 험한 데로 데꼬 갈 수 있겠쪄요
- 점마들 풍습이 사나운데 뭔 일 나면 어쩐데요
- 우리 일본이랑 저언혀 안 친하고 대마도 놈들이 가끔 김해 오는 게 다예요

이런 거였죠. 헌데 여기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흑적이 가기 전에 재상 이장용이 겁을 준 거였죠. 일본에 가 봐야 득 될 거 하나 없고, 예전 수나라 때 얘기를 하면서 은근히 겁 줬고, 바람과 파도가 험하다고 제대로 겁 준 것이었죠. 흑적이 이에 겁을 집어먹은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풍랑이 치는 바다를 만만히 보지는 못 했을 겁니다.
후에 원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독단적으로 움직였다 하여 영흥도로 귀양 보내려 했는데 흑적이 말립니다. 그래도 의리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몽고에 돌아가서도 말을 잘 했는지 쿠빌라이 칸은 적당히 혼 내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이게 끝이 아니었죠.

1267년 8월 다시 반부를 보냅니다.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대한 문제를 원종에게 맡겼고, 계속 독촉했거든요. 반부는 몽고의 조서와 고려의 조서를 함께 들고 갑니다. 몽고 거 내용이야 크게 다를 게 없었고, 고려 거의 내용은 이랬죠.

"우리 나라가 신하로 몽고를 섬겨 정삭을 받든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 황제께서는 어질고 밝아서 천하로 일가(一家)를 삼아, 지금 귀국과 통호(通好)하려는 것은 황제가 그 공물을 이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가 복종하였다는 이름으로 천하에 높아지려는 것이오. 귀국이 만약 국교를 통한다면 반드시 후한 폐백으로 보답할 것이니, 사신 한 사람을 보내어 가보는 것은 오직 귀국이 알아서 하시오"

원종도 제발 말 들어라고 빌었을 겁니다. 일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분명 일본을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죽어나가는 건 고려였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반부가 돌아온 것은 1268년 7월, 그가 들고 온 소식은 그리 반가운 게 아니었습니다. 교토로 가기는커녕 큐슈의 태재부, 다자이후에 5개월이나 처박아 둔 채 제대로 대접도 안 해 줬거든요. 이 다자이후는 앞으로 계속 나오는 곳이니 기억해 두세요. 반부는 최대한 대륙의 사정을 말 하며 일본을 설득하려 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릴 없이 돌아온 그, 원종은 그를 몽고에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했지만 쿠빌라이 칸 역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벌 준비는 곧바로 시작됩니다. 10월, 몽고에서 사신이 와 고려의 병력과 해군을 사열합니다. 그 전에 재상 이장용이 몽고에 가니 이런 말을 들었죠.

"(영녕공) 왕준이 그러던데, 니네 나라에 군사 4만+1만이 있다며? 내가 그래서 1만 빼고 4만을 동원해 우리 도우랬는데 넌 또 아니라고? 내가 사신 보내서 확인해본다? 4만명 있으면 니가 죽고 없으면 왕준이가 죽겠지. 쫄리면 다이하시든가."

그러면서 왕준을 불러 다시 확인하게 하고, 이장용에게 다시 병력을 확인하고 보고하게 합니다. 핑계는 참 좋았습니다. 이제 한 집안이 됐으니 고려가 어려운 상황 있으면 몽고가 도울 것이고, 몽고가 필요하면 고려도 도와야 된다는 거였죠. 그러면서 쌀 3~4천 석과 전함 1천 척을 요구합니다.

이장용은 해 보겠지만 기한에 맞추기 어렵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 예전에는 4만의 군사가 있었으나, 30년 간에 병화와 역질로 거의 다 죽어서, 1백 호나 1천 호가 있을지라도 헛된 이름일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쿠빌라이 칸의 대답이 걸작이죠.

"죽은 자야 있겠으나, 태어난 자가 없으랴"

-_-

이장용은 몽고군이 철군한 이후 태어난 자는 아직 어리다고 했지만, 쿠빌라이 칸은 고려가 송, 일본과 가깝다는 이유로 준비를 강요합니다. 왕준의 5만 대군 드립이 낳은 결과였죠. -_-; 그래도 왕준도 고려인이라서 그런지 사정을 설명하려 하긴 했던 것 같습니다. 이장용은 "보면 알겠지"라며 말립니다.

+) 이 때 고려에서 송까지는 3일, 일본에는 단 하루 걸린다고 야단을 떨고 있었습니다. 아니 대체 몽고에 항복한 고려인들이 뭔 말을 한 거죠? -_-;

그렇게 보게 된 고려의 사정은 정말 처참했습니다. 쿠빌라이 칸도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30년간의 대몽항쟁과 왕준이 말한 5만 명은 온데간데 없고, 긁어모을대로 모아도 1만이며 배는 다 새로 만들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려는 정말 강화도 하나만 믿고 버틴 거였고, 그나마 있던 병력이나 군수물자를 없앤 거야 몽고군 자신이었죠 =_=;

+) 이를 생각하면 몽고군이 강화도를 직접 치지 못 한 건 강화도에 고려군 5만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쿠빌라이 칸은 탈타아와 왕국창, 유걸 등을 보내 고려의 상황을 확인하는 한편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피고 군함을 만들라고 강요합니다. 이 때 제주도에는 100척이 할당되었습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은 다시 원종을 압박해 12월에 사신을 보내게 합니다. 여기에 이전에 왔던 흑적이 포함됩니다. 고려에서 보낸 것은 신사전과 진자후였죠. 참고로 이 때 김준이 죽습니다.

사신단은 3월에 돌아옵니다. 너무 빨리 갔다 왔죠? 그들은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돌아옵니다. 빈 손으로 오긴 뭐 했는지 대마도인 둘을 붙잡아 왔죠. 쿠빌라이 칸은 기뻐하며 이들을 도로 대마도로 돌려보내고 사신을 다시 보냅니다. 이 때가 6월, 이번 조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죠.

"나라가 중국에 조회하여 온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짐이 너희 나라가 와서 조회하게 하려는 것은 너희를 핍박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함이다"

참 말은 잘 한다니까요.

그 이후에도 일본 정벌에 대한 압박은 계속됐습니다. 다만, 쿠빌라이가 아직 일본을 확실히 친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죠. 고려의 병력과 수군을 빌려 남송이든 일본이든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두려 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고려의 준비가 너무 지지부진했고, 임연의 난이 벌어지는 등 강화도에서 나온다는 기본적인 요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결국 쿠빌라이 칸은 동녕부를 떼는 한편 원종에게 병력을 지원하는 채찍과 당근을 함께 씁니다. 이어 고려로 보낸 병력을 눌러 앉게 하고 둔전을 만들죠. 헌데 겨우 고려왕을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니까 터진 삼별초의 난 =_=;;;

몽고 내에서도 일본 말고 고려를 치네 마네 하는 얘기가 계속 나왔고, 홍다구는 그걸 부추깁니다. 정말 탈타아 없었으면 또 다른 대몽항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진도의 삼별초가 토벌되고 있던 1271년, 원에서는 조양필을 보냅니다. 그는 1272년 정월에 돌아왔는데, 이 때 일본의 사자 12명(원사에는 26명)과 함께 돌아옵니다. 쿠빌라이 칸은 이번에도 기뻐했지만 딱히 좋은 소식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쿠빌라이 칸은 곧 사신을 돌려보낸 후 일본 정벌 준비를 대대적으로 시작합니다.

우선은 삼별초가 급했습니다. 일본 정벌을 위한 기지인 합포 등이 공격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삼별초 토벌이 준비되는 1272년까지 원나라 군사에 대 준 쌀이 10만 9천여섬이었고, 방문하는 사신들에게 17000여섬, 둔전을 위해 준 종자도 15000여섬이었다고 합니다. 원군에게는 1인당 1일 3두씩을 주기로 했는데, 흔도는 이를 4두까지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참다 참다 못 한 고려에서는 쿠빌라이 칸에게 직접 이 비용을 줄여 달라고 요구했고, 나중에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으니 쌀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쿠빌라이 칸이 보기에도 정말 막장이었는지 무려 쌀 2만섬을 구휼을 목적으로 줍니다. =_=;;

어찌됐든 제주도의 삼별초 토벌을 통해 상륙전에 대한 예행연습도 해 봤고, 세자와 쿠빌라이 칸의 딸이 결혼함으로써 두 국가는 하나의 집안으로 묶였습니다. 때는 1274년 5월, 홀도노게리미실 공주-_-;는 이렇게 몽고인으로서 고려의 첫 왕비가 됩니다.

그 다음 달에는 원종이 훙합니다. 참 박복한 왕이었습니다. 쿠빌라이 칸과의 외교전 말고는 쉴드 칠 구석이 없긴 합니다만... 참 불행한 왕이었죠.

이제 세자 왕심, 충렬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려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그에게 닥친 것은 일본 정벌이었죠.

이러는 동안에도 일본의 반응은 도무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냥 무시 무시, 다자이후까지 가기만 해도 다행인 상황이었죠. 그나마 삼별초와 고려에서 몽고의 소식을 들었기에 신에게 비니 전국의 무사들에게 경계를 내리니 하긴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너무 조용했죠.


당시 일본의 지배자는 이제 막 싯켄이 된 호죠 토키무네. 스무 살도 안 된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일본 역사 이래 최초, 그리고 최대의 외침에 맞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게 됐습니다.

------------------

타이틀에 대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Je ne sais quoi
12/03/07 03:54
수정 아이콘
쿠빌라이 칸이 말은 참 잘 하는군요 -_- (2) 물론 눈시님이 잘 해석한게 더해졌겠지만..
12/03/07 04:22
수정 아이콘
이 당시 일본은 정치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제가 사실 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일본이나 미국같은 나라들은 지금와서야 강대국이지 얘들 역사란 게 근대 이전에는 그닥 배울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신경 끈.....
12/03/07 05:04
수정 아이콘
가마쿠라 막부 시대인데
싯켄이라는 것은 대장군밑에 있는 비서와 같은 사람이고요
당시 일본은 천황를 중심하는 조정이 있고요(公家 공가라고도 합니다.), 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막부가(武家 무가라고도 합니다.) 있었는데 가마쿠라시대에는 둘이 힘이 비슷하거나 막부가 좀더 힘이 쎘죠
아무튼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씨가 대가 끊기면서 싯켄인 호죠씨가 실권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싯켄이 대장군 마음대로 세우고 할수도 있었죠 당시 대장군에 임명된 사람들은 황족들이나 후지와라 같은 귀족들로 세웠죠
Siriuslee
12/03/07 14:19
수정 아이콘
몽고 침입이 있기 이전부터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경우에는
관서(서일본)은 쿄토의 덴노를 중심으로한 조정과 지방장원체제, 관동(동일본)에는 막부를 중심으로한 무사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가마쿠라 막부 1~3대 쇼군까지)
하지만 쇼군인 미나모토가문이 3대째에 자손이 끊기게 되면서..

덴노가 기회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황을 너무 유리하게 판단하고 (전쟁준비없이) 칙명을 내려서 막부 토벌을 천명했는데,
2대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미망인인 호죠 마사코와 장인인 호죠 토키마사(1대 싯켄)가 무사들을 규압하고 교토로 공격해서 조정과 장원들을 모두 무너트리게 됩니다.(덴노는 귀양..)

이때 이후로 정권은 싯켄인 호조가문이 실권자, 쇼군은 바지사장 정도로 정치체재를 확립하죠.
(이번 본문에 소개된 실권자인 호조 토키무네는 8대 싯켄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이은 다음 세대는 바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 쇼군은 아시카가가문이 장악했지요.
이때가 진정한 전국시대.. 하극상이 판치던 세대이죠.
무로마치 막부를 종료시킨 인물이 그 유명한 신장 - 오다 노부나가 이고..
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익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뜸을 들인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밥을 먹어서-_-
에도 막부.. 시대가 시작됩니다.
에도 막부는 유신세력에 의해 전복되고 드디어 덴노가 다시 정치 일면에 두각됩니다(메이지 유신)
그 다음은.. 다들 아시는 제국주의로... 우리나라포함 동아시아를 식민통치하다가 태평양전쟁 및 (처음이자 마지막) 핵무기를 맞고 항복합니다.
루크레티아
12/03/07 17:35
수정 아이콘
일본 정벌에 대한 쿠빌라이칸의 열정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는 정말 원종이 줄 하나는 기차게 선 것 같습니다. 역시 인생은 줄을 잘 서야....;;

일본사에 대한 리플이 많이 나와서 감히 첨언하자면, 일본의 역사는 사실상 섭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명한 쇼토쿠 태자 역시 일본에서 최초로 섭정을 행한 인물입니다. 당시에 일본에선 권력싸움 때문에 동아시아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 덴노가 즉위할 정도였고,(물론 이전에 히미코라는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일본 학계에서도 그리 인정하진 않습니다.) 스이코 덴노는 선덕여왕이나 측천무후와는 다른 '레알 궁중 규수'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소가氏 가문의 쇼토쿠 태자가 섭정을 한 것이죠.

이런 섭정은 다른 나라 같으면 보통 왕족이 하기 마련인데, 일본은 잘 나가다가 왕권이 약해진 9세기부터 갑자기 힘센 귀족 가문이 섭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섭정 가문으로 유명한 것이 후지와라 가문이죠. 섭정도 참 집요한 것이, 고려시대의 경원 이씨보다 더 집요하게 덴노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서 아들을 낳자 원래 있던 황태자를 폐위하고 그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합니다. 그리고는 그 황태자에 다시 딸을 시집보내서 아들을 낳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덴노가 어리면 섭정(셋쇼), 덴노가 크면 관백(간바쿠)라는 지위를 유지하면서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그러다가 막부가 세워지고 귀족들과 덴노 정부가 몰락하자 이번엔 위의 가마쿠라 막부의 예와 같이 쇼군이 섭정의 위치를 대신하게 됩니다. 덴노의 중앙 조정에서 최고의 실권자 자리를 쇼군이 차지하는 행태가 된 것이죠. 그러다가 또 쇼군이 부재를 하니 쇼군의 위치를 대신하는 싯켄의 등장...;; 어떻게 보면 덴노를 건드리지 않고 최대한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일본 특유의 정치 체계가 이런 섭정 정치를 부른 셈입니다.
12/03/07 20:59
수정 아이콘
여기서 나오는 호죠씨가 노부나가의 야망 하면 나오는 그 호죠씨 맞나요?
막부의 실권자까지 했던 가문인데 시간이 지나서 영지가 줄어든건가요.
미나모토는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활약했던 가문이 맞는거 같은데 그 형도 얼마 못가 대가 끊기는군요.
12/03/07 21:49
수정 아이콘
그럼 가마쿠라 막부에서 무로마치 막부로는 어떻게 넘어가게 된 건가요?

무로마치 막부를 오다 노부나가가 멸망시킨 것이나
헤이케 - 겐지 싸움을 통해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진 것은 드라마나 만화책을 통해서라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는데
저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막부가 바뀌었다면 뭔가 중심이 되는 인물이나 사건 같은 게 있었을 거 같은데..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5795 [일반] 21세기 최고의 기타리스트 존 메이어의 새 싱글! [22] 브릿덕후4183 12/03/07 4183 0
35794 [일반] 현재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이벤트중입니다. [33] linux7994 12/03/07 7994 0
35793 [일반] 나인뮤지스/뉴이스트/2NE1의 티저와 빅뱅/정진운의 MV가 공개되었습니다. [14] 효연짱팬세우실4532 12/03/07 4532 0
35791 [일반] 검푸른 해협 - 1. 일본을 공격한다 [21] 눈시BBver.27740 12/03/07 7740 4
35790 [일반] 제주 강정마을을 알고 계신가요?(경찰, 구럼비바위 발파 허가) [84] SkinnerRules7166 12/03/07 7166 5
35789 [일반] 10대 청소년들이 여가부 디도스 공격.. [39] Eva0105679 12/03/07 5679 0
35788 [일반] 가장 기대되는 오디션 프로그램 [40] 난 애인이 없다6130 12/03/07 6130 0
35787 [일반] 김화백의 웹툰 진출, 그리고... [45] 거간 충달7318 12/03/07 7318 0
35786 [일반] [연재][WWE 계층] Remember Wrestlemania - 1 - [7] EZrock3725 12/03/07 3725 0
35785 [일반] PK지역은 20~40대의 투표참가에 따라 선거판도가 요동칠 듯 보입니다. [34] 타테시4339 12/03/07 4339 0
35784 [일반] 아주 유명하지도, 인기있지도 않은 가수를 좋아하는 이유 [15] 로렌스4906 12/03/07 4906 1
35783 [일반] 김재호 판사가 "사실상" 청탁 잠정결론 [47] 타테시5782 12/03/06 5782 0
35782 [일반] 괜찮았던 애니 음악 [18] 눈시BBver.26591 12/03/06 6591 0
35781 [일반] 2012년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대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14] 타테시4079 12/03/06 4079 0
35780 [일반] 20대의 정치, 정치성향 [21] 信主4421 12/03/06 4421 5
35779 [일반] 이런 감정 처음입니다 [41] 엔투스짱5346 12/03/06 5346 0
35778 [일반] 울고 싶어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14] RookieKid3798 12/03/06 3798 0
35777 [일반] 픽업과 연애 #5. 전 쉬운 여자가 아니랍니다. [22] Love&Hate26498 12/03/06 26498 5
35776 [일반] 실직(?) 했습니다. [8] Sue4321 12/03/06 4321 0
35775 [일반] 요상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이야기 [20] 아르바는버럭6737 12/03/06 6737 0
35774 [일반] 기억에 남는 만화들 [61] 눈시BBver.210076 12/03/06 10076 0
35773 [일반] 2011년에 저평가 받았던 영화 5편 [54] 불쌍한오빠7878 12/03/06 7878 0
35772 [일반] [야구]LG, 박현준-김성현 퇴단조치, KBO에 영구제명 요청 [69] giants5297 12/03/06 5297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