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집 책장에 쌓아둔 원피스를 집어들었다.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18~23권정도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비비의 모험'에피소드(23권타이틀). 그리고 56권부터 60권까지 이어지는 '정상전쟁' 에피소드. 오늘은 정상전쟁 에피소드를 읽기로 했다.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흰수염의 대사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네어귀에 투쟁의 붉은 글씨로 재개발을 반대하던 곳에는 개미한마리도 없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토지이니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말라는 모 기업의 플랭카드와, 창문이 깨지고 콘크리트벽이 너덜해진곳에 '철거'라고 써있는 커다란 X자만이 여기저기 그려져있다. 남몰래 슬쩍 플랭카드를 넘어가니, 이미 부서진건물은 밖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많았다. 그 옆에는, 커다란 철옹성이 세워지고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는 주상복합 시설이 지어지고 있었다.
중학교시절에 본 WWF의 스톤콜드, 커트앵글, 더 락, 숀마이클스 같은 레슬러 스타들이나-지금도 여전히 스타이기도 하지만- 고교시절 세계에서 가장 발차기가 빨라보였던, 괴물중의 괴물 크로캅이나 크지 않은 체구의 검은 피부로 더 큰 상대를 엄청나게 농락했던 어네스트 후스트가 기억난다. 저게 사람인가 싶을만큼 무서웠던 그들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몇 년전에 테레비만 켜면 나왔던 연예인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어릴 때 꼬깃꼬깃 구겨진 커다란 천원짜리로 산 만화책 '용소야'같은게 너덜너덜한 것들은 익숙한듯이 어색하다.
그런것들이 아마도 내 역사일 것이다. 친구들과의 싸움, 장난, 우정. 학교의 공부. 좋아했던 아이의 '꺼져' 라는 말. 담배 한모금에 콜록거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자전거도 못타는 녀석이 친구 오토바이를 타겠다며 교회의 빨간벽돌벽에 엔진을 개조한 택트를 들이받은것. 그 사이에 없어진, 예쁜 여동생 둘을 둔 미인 아주머니가 운영했던 단골 책방이나, 자리를 옮긴 태권도장. 이름이 바뀐 교회. 사라진 반 지하의 친구집 같은 것들이.
많은 것들이 갔다. 흰수염의 대사가 읽고 싶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괴물이라 불린다 한들, 나 또한 심장 하나 달고있는 한 사람일 뿐이라고. 어린시절 나의 영웅들도, 손길이 닿았던 낡은 골목도, 웃고 떠들던 교정도 어느새 역사가 되어 남겨지고, 변하고, 사라진다. 무엇인가는 쇠락해가고, 무엇인가는 남겨지며, 무엇인가는 벌써 사라져버렸다.
아련함이란 얼마나 소중한 마음인가.
지금보다 조금 어릴적에는 새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멋지고 편리한 주상복합시설이나, 새로 만나는 화려한 친구들. 처음 겪는 노는 문화들이나, 새롭게 등장하는 멋진 스포츠 스타들. 길가에 울려퍼지는 최신 유행가. 이런게 좋다고. 젊음이란 이런게 어울린다고. 그런데, 그런것보다 소중한 것이 어쩌면 아련함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것이 쇠락해간다. 시간이 흐른다. 그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시간과 함께 변해가는 것은 때때로 숙성되어간다. 그걸 그저 쇠락한다고만 생각했던, 그래서 새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그 날들에 후회를 심는다. 어쩌면, 철거표시가 된 집들도 누군가의 역사였을테니까. 비록 좋은가격에 더 큰 행복에 대해 기대할만큼 괜찮은 대우를 받고 나간다 한들, 그 거리의 추억은 이제 점점 묽어지는 수채화처럼 누군가의 기억에서만 희미해져 갈 테였다. 나는 그런것들에 쇠락이라는 대신 숙성이라고 말하고 싶어지곤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시간에, 언젠가는 낡아질 우리들이 그저 새것이 나올때까지 쓰임새있는 것들로 사는 것이 아닌, 그 안의 역사를 남기고 싶다고. 그래서, 우리는 쇠락해가는 것이 아닌 조금씩 깊게 숙성되어 가는거라고. 한물 간 슈퍼스타도, 약해진 파이터도, 결혼을 앞둔 동창들도 모두모두 오늘도 역사가 되어 성숙해 간다고.
그렇게 생각하고나니 많은것들이 아쉬워진다. 짧은 사랑에 대한 슬픔이나, 옅었던 친구의 기억들이 씁쓸하다. 그것들이 조금 더 숙성되어 남아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한다. 분명히 그 시간동안 변화를 겪으면서, 마음이 바뀌면서, 그렇게 오래 엮이고 부딪히고 긁히면서, 조금씩 사람으로서 시간을 견디어내는 동안에 나오는 맛들이 있을거라고. 마치 저온의 물로 12시간이고 15시간이고 내리는 더치커피의 묽은 듯 은은한 향이 되어, 강렬한 에스프레소가 있던 자리를 대신해 줄 거라고. 쇠락해간다고 , 끝으로 향해간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고. 모든 쇠락의 과정을 사랑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나도 쇠락해 갈 테니. 그 세월에 부던히 깍여나가는 길이 삶이되어 역사로 남을거라고.
변해가는 거리도, 지나가버린 사랑도, 잊지못할 많은 기억도. 조금씩 추억이 되어 차곡차곡 쌓인다.
누군가는 쇠락해 가는 , 떠나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당연한 것이라고. 젊음이 다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할테다.
나이 60의 사람들이 더 이상 발디딜 곳 없어 내일에 벌벌 떠는
쇠락해 가는 그대들이 죄인처럼 여겨지는 곳에서
철 없는 반항아마냥 그 시간이 남긴 세월을 그린다. 쇠락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많은 길들을. 역사를. 그 삶의 아름다움들을.
세상에 오직 새것과 젊음이 가득한 그 곳에 과연 행복이 있을까하며.
무엇인가를 남겨줄 수 있다면, 그저 이렇게 세월에 깎여나간 트인 손과 주름진 얼굴로 지나온 발걸음의 역사를. 힘써 세운 것들의 무너진 잔해를, 점점 바뀌어가는 쇠락해버린 사랑하는 것들을. 그 추억을 남겨주면 좋겠노라고.
언젠가 스러질 우리들의 모양새가
쇠락해가지 않고 숙성해 가기를.
철없이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