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2/09 10:48:37
Name nickyo
Subject [일반] 8시 22분과 8시 59분사이
진웅은 화장실 거울에서 눈 밑으로 쭈욱 이어진 다크서클을 보고 생각했다. '더 자고싶다..'. 하지만 이내 샤워기를 찬 물에 놓고 머리를 세면대에 박았다. 한겨울의 냉수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뇌까지 에려오는 냉기가 있었다.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면서 머리를 감고나면 그나마 정신이 든다. 반도 채 뜨지 못했던 눈을 겨우 다 뜨게 한 뒤에야, 하루가 또 시작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진웅은 매일 9시까지 늦지 않고 출근을 해야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8시 22분의 버스가 그를 8시 57분과 59분 사이의 어딘가에 회사 앞으로 떨어뜨려 준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 확률은 9할 이상에 수렴했으니 완벽하다고 해도 맞을 터였다. 가끔 9시 00분이나 8시 56분에 도착하는 날에는, 왠지 이대로 땅을 밟는 순간 호그와트행 올빼미 버스가 나타나 날 태우고 가지는 않을까 싶은 기대도 한 적이 있지만, 내리자마자 비질을 하는 경비아저씨 덕에 현실감각은 하늘 높이 올라간 풍선이 뻥-하고 터지듯 그의 주변에 가라앉는다.




언제나 변함없이 8시 22분에 도착하는 5524번의 버스에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는 얼굴이 셋 있다. 아침부터 반짝이는 젤로 머리를 매만진 댄디한 버스기사 아저씨와, 봉두난발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폭탄머리를 한 맨 뒷자석 2층 창가의 백발 할아버지. 그리고 2인석 바로 앞, 내리는 문 맞은편의 로얄석(이 자리는 혼자 타는 사람에게 1등석과도 같다) 바로 앞 임산부 배려석에 다리를 꼬고 앉는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 어딜 봐도 임산부 같지는 않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같은 시각에 매일 만나는 얼굴들. 때때로 내가 조금 늦장을 부리거나 변덕스러운 부지런을 떨어 이 버스를 타지 않는날이 아니라면, 이들은 반년간 거의 빠지지 않고 이 버스안에 있었다. 만약 5524번 연대기 따위의 역사서를 집필한다면, 8시 22분의 연대표에 저 셋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그들의 정체나 삶 같은것도 부가설명이 된다면 더 좋을것 같았다. 저 백발 할아버지는 어느 미용실에서 폭탄을 터트려준 걸까, 버스기사 아저씨는 젤을 3일에 한통쯤 쓰는건 아닐까. 혹시 점심시간에 한번 더 셋팅한다든가. 저 다리꼰 여인은 출근일까 퇴근일까. 왠지 풍선껌을 좋아할 것 같다. 이런 궁금증말이다. 네이버 지식인도 모를. 출근길에는 이런 멍청한 망상들이 머리를 둥실둥실 떠다닌다. 시간이 참 잘간다.




"연애는 어른들의 유일한 꿈이자 장래희망이지."


하루는 진웅의 뒷 자석에 빨간 트렌치코트를 입은 멋스런 남성의 전화통화를 무심코 들은적이 있었다. 간혹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어떤 말을 툭 던졌을때 귓가에 쿡 박히는 일이 있다. 간사스러운 사람같으니. 나를 위해 해주는 수많은 조언과, 선인들이 남겨둔 멋들어진 명언들은 내 삶에 안착하지 못하고 언저리를 빙빙돌건만 이런 이야기는 잊혀지지도 않을만큼 한방에 쑥 하고 깊이 박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교과서나 교재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싶었다. 연애가 어른들의 장래희망이라. 어디서 들었나 곰곰히 생각하길 두 정거장. 그 남자가 내리고 나서야 진웅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드라마 연애시대를 떠올렸다. 거지같이 지루했지 정말. 명작이라고 해서 봤건만 이해할 수 없는것 투성이였어. 하고 이내 생각을 접는다. 그걸 이해하기에 난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 그리고, 손예진이 참 예뻤지.




그런데 참 신기하다. 생각을 접는다는 사고의 흐름뒤에 그 글자들은 다시 낭창낭창 뇌의 표면을 뛰어다닌다. 연애, 장래희망 , 꿈같은거. 뭔가 멋들어진 이야기들이면서 일상이기도 했다. 물론 그게 내 일상은 아닌것 같았지만..왜 어른의 장래희망이 연애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건 기회의 상실을 뜻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희망찬 꿈을 전부 헛된 망상이라고 여기고 살아야 하루를 버틸 수 있기 때문일까? 꿈을 향해 산다는 것에 부러움 대신 조소를 날리지 않고는 비참함을 피할 수 없어서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속에서 소용돌이 친다. 알게뭐람. 푹 하고 한숨을 쉰다. 연애. 연애. 연애. 하고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차갑게 내려앉은 밤 공기사이에 붙잡았던 우리사이라든가, 질척이고 끈적이게 귓가로 달라붙던 너의 입김이 떠오른다. 아아, 그땐 좋았지. 그래서 그렇구나. 그래서 어른의 장래희망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뜻한지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모를 우리의 달콤한지 씁쓸한지 질척거리는지 담백한지 애매한 관계가 그 다음날을 기대하게 해서 그런가보다하고. 솔직히 그 다음날 보다는 그날 밤이 더 기대되기는 했었던 것 같지만. 장래희망을 꼭 내일 아침을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 꿈꾸란 법은 없잖아?  탐닉할 쾌락은 잠시 사소한 것들을 잊고 살아있다는 것의 충실함을 느끼게 해 주었으니까 그걸로 충분한거 아니냐고. 물론 그 충실감을 잠깐 느끼고나면 맥이 탁 풀려서 침대옆에 벌러덩 쓰러지고는 했지만. 그런면에서 3S는 정말 인생에서 빠질 수 없었다. 술과 사랑과 섹스. 아하! 어른의 장래희망은 3S로 정정해 둬야겠다. 이런! 어느새 8시 58분이다. 삐익 하고 열리는 뒷문으로 황급히 내렸다.



전화왔어요 전화왔어요 메롱 사실은 문잔데~


-사내 공지사항대로, 오늘 회사 전력공사문제로 업무진행이 불가합니다. 내일 진행하는 미팅에 오늘안건을 함께 논의하겠습니다- 팀장 킴.


하하. 개판이네. 콧등을 쓱 문지르니 콧물이 나왔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PoeticWolf
12/02/09 11:3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표현력이 좋으시군요(평가가 아니라 부러워서 하는 말임;;)
제 생각에 모든 사람의 꿈은 '사랑'인 거 같아요.. 특히 결혼하고 자식낳고 살다보면 그게 너무 갑자기 구체화가 되는 바람에 꿈을 사는 줄도 모르고 '이게 현실이야' 하면서 쫓기듯 살게 되죠; 그러다가 그 현실이 없어졌을 때야 '아 그때가 행복했네' 라고 하는 거 같아요; ㅜㅜ 으흑; 행복하고도 행복한 걸 느끼지 못하는 게 비극이네요.
그리고 이런 소설 형식 되게 좋아요. 제가 미숙하기도 하고 반응도 안 좋고;;; 혼자 하기 뻘쭘해서 잘 안 하게 되는데, 되게 반갑네요!
별로네
12/02/09 11:50
수정 아이콘
이후 진웅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만일 저라면,
대박!!! 올레~!!!!! 를 외치며 잠시 춤을 덩실덩실 춘 후에 전력신이 내려주신 12시간의 자유를 극대화 시킬 방안을 모색해볼것 같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와이프의 하루 스케줄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는 전화보고 따위는 해서는 안 되겠죠.
사티레브
12/02/09 12:11
수정 아이콘
아 .. 예전엔 이런글 되게 자주썼는데 요즘은 왜 셋째단락을 못넘기고 지워버리는지 ㅠ 부럽습니다
놀라운 본능
12/02/09 12:37
수정 아이콘
머눈에는 머만 보인다고

주식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ㅡㅡ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5238 [일반] 최강희호 1기 출범.. 대표팀 명단 발표 [83] 여자박사6267 12/02/10 6267 0
35237 [일반] 참... 머리 좋은 사람들.. (이른바 나철수관련) [20] 곰주5363 12/02/10 5363 0
35236 [일반]     Ace of Base 2 - '첫사랑의 배신' [2] Ace of Base5173 12/02/10 5173 0
35234 [일반] 대몽항쟁 4부 끝과 시작 - 1. 최씨 정권의 끝 [4] 눈시BBver.25194 12/02/10 5194 1
35233 [일반] 아래의 열차이용중 제일 뒷자석 의자 논란을 보고,, [168] 부끄러운줄알아야지10337 12/02/10 10337 0
35232 [일반] [대안학교] 노는 아이들의 기적. 서머힐 [8] 스타핏4302 12/02/10 4302 0
35231 [일반] MBC 노조가 <제대로 뉴스데스크> 1회를 방송하였습니다.. [23] k`6167 12/02/10 6167 1
35230 [일반] 가슴에 내려앉는 시 모음 9 [2] 김치찌개2925 12/02/09 2925 1
35229 [일반] 어디까지 미화될까 - 무신 + 못 다한 이야기 [10] 눈시BBver.27758 12/02/09 7758 0
35228 [일반] 제목은 달지 않겠습니다. [459] 웨브신14303 12/02/09 14303 0
35227 [일반] 내일 시작하는 Mnet 보이스 코리아 [32] 달리자달리자5096 12/02/09 5096 0
35226 [일반] 사회적 약자를 고려한 서울시 지방직 임용채용 [98] 영혼의공원6849 12/02/09 6849 0
35225 [일반] 동쪽의 아름다운 왕국이야기 [본격 happyend님 따라하기] [10] nickyo3436 12/02/09 3436 0
35224 [일반] 말보로 담배값 인상, 해외 담배 먹튀논란 기사를 보고.. [110] 왕까부리6585 12/02/09 6585 0
35223 [일반] [미드종영] 하박사님, 안녕히 가세요. [41] Absinthe 5793 12/02/09 5793 1
35222 [일반] 마눌님의 일본사설번역 (16) - 결혼상대의 이상과 현실 [2] 중년의 럴커3676 12/02/09 3676 0
35221 [일반] 8시 22분과 8시 59분사이 [13] nickyo4829 12/02/09 4829 0
35220 [일반] MLB 감독들이 선정한 현역 최고의 유격수 [26] 김치찌개6626 12/02/09 6626 0
35219 [일반] 고종은 과연 무능한 군주인가 [38] 김치찌개5272 12/02/09 5272 0
35218 [일반]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재미있는 기록들...마지막 [4] 자이체프7245 12/02/09 7245 1
35217 [일반] 대몽항쟁 3부 - 완. 다가온 파국 [20] 눈시BBver.24697 12/02/09 4697 3
35216 [일반] [!!ROCK!!] 1969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우드스탁 락페 [4] Absinthe 6791 12/02/09 6791 0
35215 [일반] [생활의 지혜] 리필펜 [16] Toppick5029 12/02/09 5029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