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3년, 최우는 최린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지만 길이 막혀 돌아옵니다. 꽤나 의미 없는 일이죠. 고려는 고립됐습니다.
최우는 몽고군이 물러나자 아껴두었던 정규군을 육지로 보냅니다. 상장군 이자성은 그들을 이끌고 용문창(개경 근처의 군량 창고)를 점거한 거복과 왕심을 토벌합니다. 이어 5월에는 동경(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산과 이유를 토벌하죠. 이 때 이자성은 강행군으로 지친 병력을 쉬게 하자는 말을 뿌리치고 이렇게 말 하며 돌격합니다.
"그 말이 옳지 않다. 만일 피로한 군사가 쉬면 더욱 게을러질 것이고, 날을 끌며 오래 대치하면 적이 우리의 실정을 알아 다른 변이 날까 두려우니 급히 공격함만 못하다"
이에 미처 대비하지 못 한 반란군은 쉽게 토벌됐죠. 그들은 근처의 여러 군을 끌어들여 세력을 불리려 했지만 이자성이 선수를 쳐서 큰 피해 없이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자성은 1차 침공 때도 소수로 적에 맞서 싸워 고려군이 반격할 실마리를 제공했던 이입니다. 이외에 충주의 반란 등 곳곳의 반란을 토벌할 때도 그가 쓰였죠. 인격은 모르겠지만 장수로서의 능력은 상당했던 듯 합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물론 그가 이끈 고려 중앙군 역시 몽고와의 싸움에서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1. 서경 탈환
"글안적을 평정하고 차라를 죽인 뒤에 고려에서 사신을 한 사람도 보내지 않으니, 그 죄가 하나요, 사신을 통해 훈계하는 말을 전해 반성하도록 타일렀는데도 번번히 활로 쏘아 돌려 보내니 죄가 둘이요, 너희가 저고여를 모의하여 죽이고 만노의 백성이 죽였다고 일컬으니 죄가 셋이요, 너희에게 진군을 명하고, 곧 이어 너희 대신에게 입조하라 명하였으나 너희가 감히 항거하고 해도로 들어가 숨은 것이 죄가 넷이요, 너희 민호를 현재의 수효대로 하지 않고 번번히 감히 망녕되게 아뢰니 죄가 다섯이다"
+) 글안은 거란입니다. 여요전쟁 때 왜 빼먹었는지 모르겠는데 거란이라는 말은 글안에서 나온,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죠.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표준말로 쓰였을 경주 쪽 사투리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오버일까요? 경상도에서는 ㅓ가 ㅡ로 바뀔 때가 많거든요.
살리타가 죽은 것에 대한 몽고의 충격은 꽤나 컸습니다. 그 외에 금나라를 정리하고 동진국의 포선만노를 토벌하고 뒷정리를 해야 해서 고려 문제는 잠시 뒤로 밀려났죠. 대신 저런 협박만 해 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애가 탄 것은 서경에 남은 홍복원이었습니다. 어차피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겠다고 확실히 말 한 상황, 거기다 그가 아직 고려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위치가 애매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고려를 버린 매국노였죠. 고려의 중앙군은 각지에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있었고, 그 최종목표는 바로 그였습니다. 이는 서경 주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침공에서 몽고군이 쉽게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서경까지를 자기들이 확실히 잡고 있어서였으니까요.
죽을 바에야 선수를 치겠다는 건 모든 반란의 공통된 요소죠. 홍복원과 필현보, 조숙창은 서경에 있던 선유사 대장군 정의와 박녹전을 죽입니다. 이 때 죽은 정의는 이전에 서경의 반란을 진압한 이로 서경 토박이이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최우는 홍복원 등을 회유하러 파견된 것이었죠. 그가 대동강에 이르자 그의 종이 가지 말자고 말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분연히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명을 받고 나왔는데 감히 잠시라도 지체하랴? 죽는 것은 본디 타고난 분수이다"
홍복원도 그의 인품을 알아서 반란군의 대장으로 모시려 했지만 그는 끝내 거부했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때가 5월, 최우가 토벌군을 보낸 것은 12월이었습니다. 총대장은 북계 병마사 민희, 여기에 최우의 가병(家兵) 3000이 동원됩니다.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투는 쉽게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서경에 병력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고, 몽고와의 전투에서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데다 고려 최정예라고 봐도 될 최우 직속의 병력이 움직였으니까요. 서경은 철저히 파괴됐고, 남은 주민들은 섬으로 옮겨집니다. 고려 제 2의 도시이자 마음의 수도 평양은 이렇게 버려집니다.
필현보는 강화도로 끌려와 요참, 허리를 베는 형벌을 당했습니다. 조숙창 역시 다음 해에 처형되죠. 반면 홍복원은 극적으로 도망갑니다. -_-;
하지만 최우는 그의 가족들을 우대해 줍니다. 아버지 홍대순과 동생 홍백수에게는 관직을 내려 줬고, 딸에게는 최우 자신이 중매를 서 줬죠. 몽고로 도망간 홍복원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겠습니다만... 그게 마음대로 되진 않죠.
이런 저런 반란 토벌이 모두 끝나자 최우는 다음 단계를 시작합니다.
2. 피난 아닌 천도
그 해 12월, 강화도에 외성이 세워집니다. 이는 다음 해까지 이어져서 모든 도의 백성들을 징발해서 궁궐과 여러 관청을 지었죠. 물론 그 재료는 모두 육지에서 옮겨졌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한 것은 백성들이었죠. 2월에는 성대한 연등회를 열었습니다. 이 전에 불이 붙어 수천 채의 건물이 불 탄 적도 있습니다만, 강행했죠. 안 그래도 좁은 강화도에 피난민들이 잔뜩 들어섰으니 큰 길이 있을 리가 없었죠. 그는 근처의 민가를 헐어 길을 넓힙니다.
이 때의 모습을 고려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때는 천도한 초창기이나, 대체로 구정과 궁전과 사사의 이름을 다 송도(개경)를 본떴고, 팔관ㆍ연등ㆍ행향ㆍ도량은 한결같이 구식(舊式)에 의거하였다."
이 해 5월, 김취려는 세상을 뜹니다. 참 웃으며 보기 힘든 이 시절 웃게 해 준 몇 안 되는 명장이었습니다만, 나이가 든 후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 한 채 강화도에서 세상을 뜬 게 참 안타깝죠.
최우는 이런 안타까움을 느낄 새도 없이 이런저런 일들을 벌입니다. 그의 위세는 차고 넘쳐서 왕이 그를 진양후로 책봉할 때도 예물이 부족하다고 거부하고 다른 날짜를 택할 정도였죠. 그걸 축하하기 위해 육지에서는 각 주, 군마다 온갖 선물들이 올라왔고, 그는 한 술 더 떠 그의 집을 리모델링합니다.
개경의 목재부터 집과 동산을 꾸밀 소나무, 잣나무들이 육지에서 대거 수송되고, 그 집의 크기가 무려 수십리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걸 옮기다가 빠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죠.
그렇다고 왕이었던 고종이 뭘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재도량을 지어 몽고군이 물러나라고 기도만 하고 있었죠. 남경, 현재의 서울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가 800년은 간다는 예언 때문에 차마 옮기지는 못 하겠고 임시 궁궐을 지어 거기에 왕의 옷을 넣어 두기도 했죠.
2차 침공 후 강화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강화도 천도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계속 거기에 붙박혀 있겠다는 의지였죠. 강화도는 수도로서의 요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섬이었습니다. 다만 딱 하나, 애초에 물길로 식량을 수송했기에 각지의 세금을 큰 문제 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죠.
황폐해진 본토를 복구할 생각도, 개경에 언젠가 돌아갈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강화도를 더 수도답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죠. 대체 언제까지 그럴 생각이었을까요?
3. 재침
1234년 11월, 몽고는 마침내 금을 멸망시킵니다. 이로써 몽고는 고려에 다시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죠. 거기다 동진국을 멸망시키고 그 일대의 여진족을 복속시킴으로써 동쪽에서도 고려를 찌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조정에서 한 것은 없습니다.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서북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섬으로 보낸 것 정도겠죠. 청북, 강동 6주 지역은 이미 사람이 없어시다시피해서 정주 부사가 의주를 겸하여 다스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뭐 의미 없는 일이었죠. 다만 2차 침공에서 잘 싸운 경기도 광주의 세금을 면제하고, 처인성의 부곡민들을 평민으로 올려준 정도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몽고에서는 고려 침공군이 다시 구성되었습니다. 이번의 총대장은 당고, 죽은 살리타의 부장이었던 그가 총대장이 된 것이었죠. 그리고 선봉은 다름 아닌 홍복원이었습니다.
1235년 7월, 5년을 끈 몽고의 3차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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