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것은 세상 책임이 아니다.
정학 기간이 끝나 일주일 만에 돌아간 학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1학년 전체 합숙 훈련 실시에 관한 알림' 이었다. 우리는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미래의 가능성도 냉정하게 따져 봐야지. 한때의 감정에 휩쓸려서 섣부른 선택을 했다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
"이미 결정했어."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지금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단 말이다."
물론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뭐라 말을 잘 못하겠지만."
나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지금 학교에 다니면서 깨달은 게 있어. 무슨 잘못이 있는데, 그걸 사람들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긴다고 해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잘못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거나, 잘못을 인식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인간이 필요해. 나는 그 때문에 지금 학교에 있고 싶어."
"그렇게 한심한 학교니? 그렇다면 정말 이 아빠가....."
"그런게 아니야. 내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찡그리고, 아련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왜 너일 필요가 있지? 게다가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너는 아직은 무력한 아이에 불과한데."
무력?
내 눈앞에 순신과 가야노와 야마시타와 히로시가 나타나, 헤실헤실 웃었다.
나도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애들보다 먼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밖에 없어."
아버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어서, 내가 늘 보았던 익숙한 표정이 떠올랐다.
체념과 조소.
우리 고등학교 선생들이 곧잘 짓는 표정이다.』
『눈을 부릅떠라. 귀를 기울여라. 감각을 갈고 닦아라. 그리고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마라. 경이로운 질주를 보여주기 위해 몸을 가뿐히 하라. 누군가가 멋대로 정한 서열. 그들에게 이식된 열등감. 진부한 상식. 과거의 하찮은 영광. 흔해빠진 미래를 약속하는 보험. 모든 것을 내던져라. 리셋 버튼을 계속 눌러라. 몇 번이든 제로로 돌아가라. 요네쿠라가 입을 열었다. 언어가, 온몸을 파고든다. 지금, 방아쇠가 당겨진다. 우리의 혁명이 시작된다. "너희들, 세상을 바꿔 보고 싶지 않나?"』
-가네시로 가즈키 저. REVOLUTION No.0 에서 발췌.
나는 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을 매우 좋아한다. 일탈과 방황, 순수와 미성숙함, 폭발할듯 울컥거리는 에너지와 지독한 현실을 동시에 잡아낸 세계. 그 무게를 완전히 가볍게 만들며 웃는 그의 이야기까지. '레볼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 스피드'까지 그가 쓴 더 좀비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싶은 유쾌함이 있었다. 단순히 재팬 청춘소설의 유쾌함이 아니라, 처절하리만치 명확하게 그려낸 현실과, 현실에 무력한 청소년들의 열정과 일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어'에 대해 그럼에도 기발하리만치 상식을 부수며 저항하는 모습. 그것이 비록 우리의 기준으로 실효와 실익이 없더라도 손과 발 끝부터 가슴 깊숙히까지 퍼지는 청량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레벌루션 no.0은 이런 더 좀비스 이야기의 완결작이자, 더 좀비스 결정 전의 이야기이다. 차별과 억압, 상식과 주입이 만연한 '학교'속 폭력에 대한 아이들의 변혁과 저항을 너무나 유쾌하게 풀어낸 이번 권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무거웠더라면 학교에대한 본격 저항혁명 소설이 되었을테고, 조금만 더 가벼웠다면 아무나 쓸 법한 청춘 추억팔이 소설이 됐겠지만, 이 작가는 그 이상의 기량을 가지고 있고, 훌륭하게 써 내었다. 명확하게 사실을 그려내는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순수에 가까운 저항의 방법들. 그리고 그 시원스러운 행동들. '바보같다'고 느끼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야기. 정말이라면 어른이 되버린 내가 조소하겠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부러울 것만 같은 용기를 담은 이야기는 언제나 무언가를 자극한다.
우리는 언제나 변혁을 이야기한다. 변화를 원한다. 현실에서 더 나은, 더 나은. 그러면 안되. 그래야 해 하면서. 요즘은 더욱 그렇다. 흔히 이슈되는 FTA나 나꼼수사태부터, 정말 많은 사소한 일들까지. 그때마다 대안과 조소, 현실은 함께한다. '상식적으로, 그럴리가, 무력하잖니. 될리가없어. 현실이 그래. 현실이 그래. 현실이 그래.' 가네시로 가즈키는 재일교포 출신 소설가로서 자신의 청춘을 투영하여 '현실이 그래'라는 말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리고 그 저항이 얼마나 무력한지마저 그려낸다. 그러나, 적어도 그 저항을 이뤄낸 등장인물들의 영혼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에 소름이 돋고는 한다. 매번 이런 바보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다. 나는 과연 변하고 싶었을까? 나는 용기 있었는가? 사실은, 현실이라는 핑계속에 내 작은 신념을 내팽개치고 안주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편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에.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그동안 도망치기만 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가. 우리는 저항하고 있는 것일까. 난, 점점 비겁하기만 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현실이란 이름아래 비판받을 수 없음을 익히 알고서 조용히 숨죽이는게 아닐까. 그렇게,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려 각오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내 안에 가진 변혁의 불꽃을, 남에게 뿌려줄 열정의 불똥을 제 발로 잿밥더미로 만들려 열심히 두드리는 것은 아닐까. 사춘기를 금세 다시 끌어오는 듯한 이 책이 참 고맙다. 내가 뭐라고 현실의 모든 대안을 완벽하게 내놓을 수 있을까? 그저 내 영혼이 시키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부딪혀 박살나는것이, 두렵고 겁이 나 피하기만 했던 현실이라는 엄격하고 배배꼬인 곳에서 조금은 후회를 덜 수 있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남들 눈치보느라, 불가능할거라, 말이 안될거라 생각했던 일들은 어쩌면, 그저 내가, 네가, 우리가 피하고 싶었던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P.S:책의 광고는 아니지만, 스토리 전개상 레볼루션 no0->no3->플라이대디플라이->스피드 정도로 보시면 적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