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 6월, 최우는 큰 결정을 합니다. 서쪽의 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이었죠. 처음 나온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개경이 포위될 무렵 재추회의를 열어 강화도 천도를 깊게 논의했고, 강화도가 어떤지 사람을 보내려 했는데 몽고군에 붙잡히기도 했었죠.
그 동안에도 상황은 참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살리타는 고려왕의 직접 항복을 받지 않은 게 좀 찜찜하긴 하지만 고려가 확실히 항복했다고 여기고 다루가치 72명을 남기고 갑니다. 이 때 왕정과 같이 온 몽고의 사신 도단은 "내가 고려의 국사를 통할할 것이다"면서 참 짜증나게 굴었죠. 그를 환영하는 연회에서도 왕과 나란히 앉으려 했고, 자기를 접대하던 민회적을 제대로 못 한다고 때려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양반이 누군고 하니 강동성에서 거란의 유민을 토벌할 때 몽고의 원군을 요청한 자였습니다. 야율유가 쪽 사람이었던 모양이네요.
3월에는 살리타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물건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욕 먹고 사신은 억류당합니다. 이 때 고려에서는 수달 가죽 1만장 중 977장만 보냈고, 1000명씩 요구한 처녀 총각은 아예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사신으로 간 지의심은 "고려는 일부일처제예염"이라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미친 듯이 많은 양이었고 고려에서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살리타가 가만 있을 거라 생각할 순 없었죠. 또 이 달 살리타의 요구에 따라 수군 3천명과 배 30척을 몽고에 보냅니다. 자기들에게 부족한 수군을 요청한 모양인데, 다행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딱히 쓰지 못 합니다.
5월에는 살리타의 금선(금을 입힌 끈) 2필과 함께 친서가 도착하는데, 수신인은 고종이 아닌 최우였습니다. 편지에는 그를 일컬어 영공이라 했는데, 최우는 "나는 영공이 아니다"면서 왕정에게 주었죠. 서로 안 받겠다고 반사만 계속 하다 결국 이규보가 답장을 쓰는 걸로 마무리 됩니다. 몽고는 고려의 실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는 거였죠.
6월에는 왕비 유씨가 죽어서 안혜왕후로 추증하고 장사지냈고, 이 달 천도를 결정합니다. 아무리 최우가 밀어붙인 일이라지만 반대가 없을 순 없었죠. 유승단은 이렇게 말 합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섬김은 이치에 당연한 일이다.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저들 역시 무슨 명분으로 매양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을 버리고 종묘사직을 돌보지 않은채,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스럽게 세월만 끌며, 변방의 장정들은 칼날에 다 죽고 노약자들은 끌려가 종이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이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한편, 다른 자도 아니고 최우 직속의 야별초에서도 반발이 일어나죠. 별초지유 김세충은 한밤중에 문을 밀치고 들어가 최우에게 따집니다.
"개경은 태조 때부터 역대로 지켜 온 것이 무려 2백여 년이 되었다. 성이 견고 하고 군사와 양식이 족하니, 힘을 합하여 지키어서 사직을 호위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를 버리고 가면 장차 도읍할 땅이 어디냐"
이후 전쟁의 추이를 보면 최우는 시키지 않았는데 야별초에서 소수라도 자원해서 육지로 간 일이 많습니다. 그들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거겠죠. 하지만 마침 딸을 최우에게 시집 보낸 대집성이 "아녀자 말이나 들으며 대의를 막으려 하니 죽입시다 ㅡㅡ"고 했고, 최우도 그에 따릅니다. 이쯤 되면 반대할 사람이 남지 않았죠. 고종도 머뭇거렸지만, 최우는 천도를 실행합니다.
당시 개경의 인구는 10만호, 최우는 수레를 차출해 자신의 재물들을 강화도로 옮겼고, 날짜를 정해 백성들도 모두 강화도로 가게 합니다. 또한 늦는 자는 군법으로 참하겠다며 강요했죠. 하지만, 자기들이 가고 난 다음의 방책에 대해서는 생각한 게 없었습니다. 그저 각 도에 사람을 보내 백성들을 섬이나 산성으로 옮기게 했죠.
이 때 몽고의 사신들이 도착합니다. 그들은 4일간 머물다 돌아갑니다. 그 뒤가 어찌 될 지는 짐작할 필요도 없었죠.
하필 천도 중에 계속 비가 내렸고, 강화도에는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아 고종도 객사에 머물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숙을 해야 됐습니다. 뒷 일이 어찌 될 지 훤히 보이는 상황이었죠. 그 때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달관과 양가의 부녀들로서 맨발로 이고 진 자까지 있었으며, 갈 곳을 잃고 울부짖는 자들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7일에 강화에 이르러 왕은 객관에 들었으나, 백관들은 유숙할 곳이 없었다"
남아서 개경을 지키는 장수와 병력이 없진 않았지만, 사기는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틈을 타 또 반란이 일어납니다. 어사대의 하인 이통이었죠. 그는 근처의 초적들과 노예들을 불러 반란을 일으켰고, 김인경은 도망갑니다. 이통은 여러 절에도 협조를 구하며 세력을 불렸죠. 이에 최우는 급히 삼군을 편성해 개경으로 보냅니다.
조염경, 이자성, 최근으로 편성된 삼군은 강화도를 떠나 승천부에서 반란군을 깨뜨렸고, 별장 이보를 밤에 보내 "관군을 격파하고 왔으니 성문을 열어라"고 적을 속여 성에 진입해 이통을 죽입니다. 어쨌든 반란 토벌 하나는 참 잘 했네요 -_-;
내친 김에 이자성은 충주로 향합니다. 지광수는 벼슬을 받고 떠났지만, 우본은 상을 받았음에도 충주로 돌아가 반란을 계속 지휘하고 있었죠. 관군이 근처까지 다다르자 내분이 일어나 "주모자의 목을 베어 항복하겠다"고 알려 왔고, 이자성은 "그렇게 하면 니들은 다 살려주겠다"며 반겼습니다. 이에 그들은 우본의 목을 베어 바치죠. 하지만, 이자성은 아직 그들을 믿지 못 해 이틀을 성 밖에서 지냈고, 이후 성으로 들어가 반란군을 평정합니다. 이미 위험을 깨달은 건장한 노비들은 도망간 상태였죠. 성 내에 남은 이들이 반란에 가담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본만 잡으면 나머지는 살려준다고 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_-;
눈에 띄지 않았지만 참 열심히 싸웠던 충주의 천민들은 이렇게 아군의 손에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충주의 저항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충주는 대몽항쟁에서 가장 열심히 싸운 지역으로 남게 되죠.
충주의 반란 진압이 완료된 것은 9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반란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살리타는 그 달 다시 압록강을 건넙니다. 2차 침공의 시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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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차 침공의 원인에 대해 원사는 고려가 다루가치 72명을 모두 죽여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최우가 다루가치들을 없앨 계획을 세웠고, 내시 윤복창과 민희, 최자온이 파견됩니다. 하지만 서경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였죠.
"그렇게 한다면, 우리 서경이 반드시 평주(平州)처럼 몽고 군사에게 전멸을 당할 것이다"
이에 그들은 최자온을 가둬버립니다. -_-; 민희와 서경 유수 최임수 등은 도망갔죠. 북계 여러 곳에서 다루가치들을 무장해제 시키려던 윤복창은 그들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우가 밀어붙였는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보면 실패한 것 같아요. =_=; 당시 서경 등 북계 지역은 고려에서 파견된 관리도 있고 다루가치도 있는, 고려땅인지 몽고땅인지 확실하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만약 다루가치들을 다 없애려 했다면 살리타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는 곧 쳐들어 옵니다. 고려사에서 책임 회피를 위해 (몽고에서 트집 잡았다고 하려고) 은폐했을 수도 있겠지만, 다루가치를 죽이려 했다는 것 자체는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원사에서는 홍복원이 서경에 있으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반란을 알렸고, 그 동안 홍복원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해 몽고군이 오길 기다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도 그가 몽고군을 불렀다고 하죠.
이렇게 본다면 최우가 다루가치들을 죽이려 시도했지만 잘 되진 않았고, 이런 움직임을 본 홍복원이 바로 몽고에 알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불안했던 살리타는 바로 들어왔겠죠. 어쨌든 강화도로 천도한다는 것 자체가 몽고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로 보기에 충분했습니다.
문제는 몽고군은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지금도 강화도와 한반도를 가르는 해협인 염하, 소금강은 그냥 건너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살리타는 이에 대한 계획이 없었죠. 대신 살리타는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본토를 불태워 고려왕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려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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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전쟁은 참 시작부터 머리 아프게 만듭니다. 이후 쭉 계속되죠.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 잘 한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지휘하는 이들은 살아야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민중사관을 넣는다 해도 이를 무시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고려가 살기 위해 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만 살기 위한 것인지의 문제가 걸리죠.
몽고의 공물 요구가 너무 지나치기는 했습니다. 이를 그냥 넙죽넙죽 주고만 있을 수도 없었죠. 하지만, 최우는 결코 항복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가 제대로 항복하면 자기의 가치는 크게 떨어집니다. 후에 몽고는 대리국을 정벌한 후에도 실세를 숙청하고 왕을 세웁니다. 그 편이 다루기 더 쉬웠죠. 고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왕이 뻔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자기는 몽고에 아무런 이용 가치가 없었죠. 이런 딜레마는 삼별초까지도 이어집니다.
김세충이 천도를 반대하자 최우는 그럼 어떻게 몽고군을 방어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그는 아무런 대답을 못 하죠. 이게 당시에는 물론 현대에도 이어지는 딜레마입니다. 1차 전쟁의 추이를 보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경까지 포위된 상황까지 갔으니까요.
앞으로 천천히 얘기해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