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 읽어두면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글
흔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혼자 사는 남정네의 집에 놀러오는 대부분의 처자들은 개인 생활에 간섭하려 하더라.
집 냄새나. 밥은 먹고 다니냐. 저 책은 뭐야 왜 여자가 헐벗고 있냐. 이 열어본 페이지 목록은 뭐냐 이런걸 니가 왜 보냐. 등등.
물론 본인이야 순진무구에 퓨어한 플라토닉 계열이라서 문제가 될만한건 '별로' 없지만 여튼 이런걸 찾고자 하는지 항상 뒤적뒤적.
어쨌든 그런거야 늘 있는 일이기에 난 오늘 처음 온 얘가 뭘 하건 신경끄고 주방에 앉아 (가스레인지 위치가 기묘해서 좌석 요리가 가능)
재미없는 오뎅국이나 끓이면서 해장으로는 오뎅탕이 좋을까 하고 고추가루 및 기타 첨가분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묻더라.
"오빠도 컴퓨터에 그런거 많지?"
물론 본인은 항상 사전 예약제로 대실 및 출입허가를 내주고 또한 ♀사람이 온다고 하면 깔끔하게 정리된 2번 하드만이 반길 뿐이기에-
"야 그런거 없어. 그냥 아프리카로 무한도전이나 보자."
그러나 답이 시원찮았는지 한마디 하더라.
"흐응. 찾아서 나오면 어쩔래?"
물론 이런 아마추어 계집애가 몇번 마우스 딸깍딸깍 한다고 비밀의 문이 열릴 정도로 허술한 나도, 내 컴퓨터도 아니다.
몇년을 같이 한 전우인데 서로의 의중을 모를까. 나도 녀석을. 녀석도 나를 신뢰한다. 그렇기에 나는.
"안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안나오면 내가 맛있는거 사줄께! 대신 나오면 오빠가 사!"
"그래그래. 술은 깼냐?"
말했듯이 별거 아닌 일이다.
비록 이공계는 아니지만 문과 남정네들의 숱한 도전 속에서도 딱 두번 함락되었을 뿐인 그걸 찾을 수 있을리가 없지.
여하튼 인간이 동물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는 점 중 하나가 학습하고 성장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처음엔 단순 숨김 폴더가 털리자 두번째는 페이크성 더미 폴더 사이에 녀석을 숨겼고 지금은 아예 하드를 따로 관리한다.
최악의 경우 1번 하드가 발각되더라도 앞선 숨김+더미가 어떻게든 해결해주리라. 하드도 발견될 리 없는데 왜 뒤를 걱정하랴.
아니. 애초에 부품이 있다 한들 저게 램인지 하드인지 비디오카드인지 닌텐도 DS인지 구분은 하겠는가.
"아 이거 하드네 히히. 나 이거 연결할줄 알지롱!"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큰일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말자. 이런데서 내색을 보이는 것이 아마추어. 말해두지만 난 프로다.
그냥 적당히 자료보관 운운하며 대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런게 있었던가 하고 고개만 갸웃해주는 정도면 족하지.
물론 적당히 뜸을 들이기 위해 중불로 조리되던 오뎅탕의 화력을 급작스레 강한불로 바꾸는 것은 이번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야 다 끓은것 같은데 상 좀 펴!"
"배부르당 좀 있다 먹으께~"
....큰일이다. 살짝 당황해줘도 좋지 않을까. 실제로 더미라곤 해도 포맷한 하드라서 윈도우 안의 잡다한 폴더처럼 숨기진 못했...
아니아니. 걱정하지 말자. 쿨하게. 시크하게. 현실적으론 고작 1번 잠금이 해제된 정도다. 이 정도는 흔한 일이지. 쿨하게 가자.
"야 이거 안먹을거면 그냥 집에 가. 너 돈도 안받고 재워주고 아침에 이렇게 해주는데 뭐야"
"이히히 당황했다 당황했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무섭다. 작금의 세대에 도의라는 것은 정녕 존재하지 않음인가. 이러니 소를 누가 키우겠는가.
일단 마냥 오뎅탕을 졸이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 불이나 끄자. 맛은 괜찮네. 그러고보면 라면이랑 오뎅탕 정도긴 하지만 나도 제버...
...아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던게 아니다. 그저 솔직한 감상일 뿐.
"안먹을거면 나 약속있어서 나간다..."
"구라 즐요! 하루종일 놀아준다며!"
큰일이다. 허언을 섞어도 녀석의 마음도 손도 쉬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정도로 해야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설마 녀석은 나보다 더한 프로이며 녀석에게 내 수준은 그저 아마추어였던 것일 뿐인가. 내 사전 조사는 그렇게도 미흡했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하드는 벌써 녀석에게 길을 열어줬고 여기까지 온 이상 숨김 폴더따윈 군침도는 먹이감이리라.
오호라 통재라. 왜 요즘의 윈도우는 폴더마다 패스워드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인가.
허나 여기서 더 첨언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파트너를 믿고 그저 지켜봐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힘이 되는 응원일지니.
야. 안돼. 그거 아냐. 그거 누르지 마. 왜 하필 거기서 또 거길 보냐. 야. 야.
마치 작년의 WBC를 보는 기분이다. 9회말 1점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2사 만루 주자는 2,3루.
쉽게 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한방이면 게임이 끝나는 이건 그야말로 승부처다. 이 상황에서 투수 교체따윈 상책이 아니리라. 녀석을 믿자.
하지만 내 싸인이었던 몸쪽 꽉찬볼(숨김+더미)은 노련한 타자의 패기와 불안한 당시 상황에 떠밀려 결국 실투가 되기에 이르르고,
깨끗하게 휘두른 방망이에 공은 하염없이 높이 올라간다. 우익수 키를 넘기는 아치. 아아, 저 상황이면 이미 틀렸군. 좋은 시합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보았다. 모니터에 뜬 미리 보기들과. 순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새침스레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그 찰나의 동작을.
그리고 또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오뎅탕을 재촉하며 시원하게 먹은 후 화창한 햇살 아래 한적한 주말 캠퍼스를 함께 걸었던 그녀.
그렇게 그녀는. 봄바람과 함께 철없는 계집애에서 상대를 배려할 줄 알며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숙녀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쯤에서 내가 감명깊게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로 하자.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결코 오늘날의 신세대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다."
-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 교육학 박사 하녹 매카시 -
봄내음 나는 수필들이 많길래 숟가락 얹어봅니다. 날씨 좋네요 야.
덤으로 더 이상 그쪽 이야기가 오가는 일은 없었지만 맛있는건 그날 사줬습니다 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