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1/04/25 05:20:00
Name 츄츄호랑이
Subject [일반] 불편한 음악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노트엔 그날이 이런 문장으로 적혀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뒤에 나는 자취를 시작하게 됐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론 무엇이든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무슨 법칙처럼, 그렇게 적고 나서야 밤에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이젠 누구도 나의 하루를 기억해주지 않으니, 내 작은 노트만이 내가 하루를 살았단 증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지하철은 그리 한산하지도 붐비지도 않았다. 불편한 음악.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이었다. 라디오를 맨, 시각장애인 한 명이 동냥 바구니를 들고 지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지갑을 뒤적거렸다. 천 원. 분명 나에겐 큰돈이 아니었다. 아깝다는 생각에선지, 불편한 음악 탓인지 내 손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개찰구만 넘으면 이제 금방 방이야. 누구도 기다리지 않지만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교통카드가 찍히지 않았다. 나는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역무원 아저씨께 부족한 돈을 건넸다. 천 원을 그냥 가지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 꺼진 원룸에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조용히 문 앞에 기대어 앉았다. 천 원. 불현듯 화가 났다. 거슬러 받은 동전들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소용없었다. 나는 동전들을 다시 주어 저금통에 넣었다. 현관 센서등 불빛이 두 뺨에 흘렀다. 엄마가 보고싶어. 엄마랑도 아빠랑도 같이 살기 싫다고? 작은 내 노트에 적힌 엄마한테 전화하지 말 것이라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지하철에서 들었던 불편한 음악이 귓가에 웅웅 울리는 것도 같았다. 불 꺼진 방 안에서 그렇게 황망히 앉아 있다가, K에게 나와 줄 수 있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K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사람을 그렇게 불러도 돼? K가 특유의 심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불러내서 미안해.
무슨 일이야? 라고 묻는 K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혼자 방에 있기 무서워서......
그리고?
그리고?
내가 되묻자 K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너도 같이 어두워진다는 기분 들지 않니? 라며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없는데.
그렇지만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면 오히려 어두워진 내가 안심되어버려. 그래서 안심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이렇게 어둡게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스위치를 찾으면, 이번엔 불 켜는 게 무서워지는 거야.
너는 하나도 진지하지 않아.
진지해?
지금 10시 반이야. 라는 K의 대답을 듣자 나는 어쩐지 우리 대화가 엇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응.
왜 나를 부른 거야?
......돈 때문에.
돈?
천 원.
넌 날 좋아하지 않아.

그건 우리가 헤어지던 날 K가 했던 말이었다. 마음이 아파야 하겠지만, 이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K가 떠날 때까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홀로 앉아서 이번엔 저금통에 있는 동전들에 대해 쓰기로 했다.
캄캄한 방 안에서 어두워 오돌오돌 있을 동전들을 생각하니 꺽꺽 울음이 나왔지만.


엄마가 보고싶어...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1/04/25 06:03
수정 아이콘
좋네요. 아주. 고맙습니다.
11/04/25 06:50
수정 아이콘
피지알 주최 신춘문예나 해봤으면 좋겠군요.
얼마나 좋은 글들이 쏟아질지~
11/04/25 10:18
수정 아이콘
언제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하시네요.
특히, 지난 번의 [헤어지는 방법]이라는 글 잘 봤어요.
연재해주세요. ^^
츄츄호랑이
11/04/25 13:21
수정 아이콘
어두울 때 쓴 글은 환할 때 다시 보면 안 되는 거 같아요...!
넘팽이
11/04/25 14:14
수정 아이콘
제가 잘 이해를 못했는데요, 그러니까 천 원과 k양과 헤어진다는것과의 상관관계가 있나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8678 [일반] 좋아하던 배우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24] 늘푸른솔솔7071 11/04/25 7071 0
28677 [일반] 애프터스쿨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13] 세우실5770 11/04/25 5770 0
28676 [일반] 임재범이 맛이 갔다..? [20] sinfire12955 11/04/25 12955 0
28675 [일반] 한때 열심히했던 게임이 서비스종료됬네요.. [58] parallelline10074 11/04/25 10074 0
28674 [일반] 심심풀이로 보는 90~2000년대 앨범 판매량...top50 [41] 후푸풉11432 11/04/25 11432 0
28673 [일반] 산장. [4] Love&Hate6149 11/04/25 6149 0
28671 [일반] [피겨]김연아 선수 쇼트 공개 연습영상 (풀버전) [27] 달덩이5593 11/04/25 5593 0
28670 [일반] 이지아씨 드레스 팬픽 [23] epic9248 11/04/25 9248 0
28669 [일반] 야 그런거 없어 [27] Cand8180 11/04/25 8180 8
28668 [일반] 참치라면에 대한 소고 [11] 낭만토스7926 11/04/25 7926 0
28667 [일반] [수동재생] 대학교 구타 [51] 단 하나7878 11/04/25 7878 0
28666 [일반] 불편한 음악 [7] 츄츄호랑이6127 11/04/25 6127 1
28665 [일반] 중국이 부러운 점 한가지 [41] 사람two8747 11/04/25 8747 0
28664 [일반] 30살이라 말한다.. [5] 나, 유키호..5721 11/04/25 5721 0
28663 [일반] (잡담)우유도둑! 걸려들었어! [32] 스웨트7753 11/04/25 7753 0
28662 [일반] [EPL] 아스날 vs 볼튼 [청량리 선발] [182] V.serum4595 11/04/25 4595 0
28661 [일반] 너 요새 말투가 좀 바뀐 것 같아. [18] nickyo7627 11/04/24 7627 3
28659 [일반] 1박2일의 연기자 vs 스태프 대결이 눈에 거슬립니다. [84] 홍승식14059 11/04/24 14059 0
28656 [일반] 2011 롯데카드 프로야구 중계불판 -2- [560] EZrock4847 11/04/24 4847 0
28655 [일반] 임진왜란 해전사 - 완. 원흉(元兇) [27] 눈시BB7901 11/04/24 7901 5
28654 [일반] 2011 롯데카드 프로야구 중계불판 [284] EZrock3065 11/04/24 3065 0
28651 [일반] 에바사마의 일본 자전거 일주#23 (아카네짜으앙) [1] Eva0104205 11/04/24 4205 1
28648 [일반] 맨유 우승의 8부능선은 넘었다고봐야... [25] 케이윌7600 11/04/24 760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