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요새 말투가 많이 바뀐 것 같아."
"응?"
두 남녀가 츄리닝을 입고 포차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오뎅국물, 라면, 제육볶음, 계란말이, 홍합, 쏘주 댓병. 기름진 머리를 모자로 가린 남자와, 뒤로 넘겨 질끈 묶은 이마가 반들반들한 여자. 둘이서 이렇게 소주를 푸고 한 상 가득 안주를 채워놓으면, 보통 무슨 사연이 있는건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런건 없다. 우린 그냥 술을 좋아하고 잘 먹는데다가, 운동선수 못지않은 대식가 일 뿐이다.
"말투우~바뀌었다고!"
"난 모르겠는데?"
적당히 취기가 올라온 누나의 말은 조금 귀엽게 꼬여갔다. 일하면서 알게된 이 누나는 자뻑도 심하고 장난도 심하지만 싫어할 수가 없다. 나이차이도 거의 7살이 넘게 나지만 정말 친구같고 재미있다. 남자친구와 전화만 하면 서로 화내고 짜증내고 욕하다가 응 응 으응~하면서 콧소리를 내는 이상한 커플. 내가 본 커플중에는 제일 재미있다. 이 누나는 참 촉도 좋아서, 내 말투를 딱 잡아낸다. 워낙에 오랫동안 같이 일하면서 부대끼기는 했다지만 속으로 움찔, 하고 놀라긴 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제각기 느낌이 다르다. 내가 만나던 사람의 말투는 언제나 말 끝이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랬어요. 응. 그랬었거든요. 하며 말꼬리를 흐리고, 목소리가 잦아들어가는 듯 했던, 그 담담하고 차분한 말이 참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무언가를 읊조리는 듯,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약간 건네어 주듯이 부드럽고 잔잔하게 다가오던 말들이 지금에서야 참 커다란 매력이었다고 불현듯 떠올랐다.
"누나 우리 그만 가자. 나 집가야해."
"야! 가그이는 어으디를....찌짐방가 짐방!"
"아 이 망할여자야 크크크크 나 내일 일해야해 누나는 진짜 한참어린 동생앞에서 무슨추태야!!"
이미 비어버린 소주병들과 안주접시를 싹 치우고, 다시 그 위에 소주병 두어병과 순두부찌개 하나, 그리고 쓸데 없는 시시콜콜한 장난들을 테이블에 펼쳐두고서야 누나는 헤롱헤롱거렸다. 겨우 누나를 들어내다시피 끌어내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재빨리 계산을 하고 역으로 헉헉대며 뛰었다. 막차가 가까워진 지하철을 간신히 타고나서 생각해보니, 결국 그 날도 난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일부러 멀리까지 찾아가서 술을 먹자고 불러내고 남에게 못했던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다 하려고 했는데, 우물쭈물 거리다보니 누나의 이야기만 듣고는 같이 웃고 같이 욕하고 서로 놀리고 그러다가 말투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앗! 하면서 숨어버렸다. 나는 내가 만났던 그 사람과 대화만큼이나 문자도 많이했었다. 우린 정말 많은 말들을 나누었다. 당신의 말은 참 편안했고 고요했다. 무슨 말을 해도 숲 속에서 옆에 앉아 귀에 속삭이는 것 처럼, 편안하고 따뜻하고 간지럽지 않은 그래서 참 마음이 놓이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투를 난 닮고 싶었던걸까?
다음날, 이 사이트에서 알게된 분들 몇 분에게 이메일과 쪽지를 쓰다가 다시 흠칫하고 놀랐다.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쪽지와 이메일을 쓰는 것이었는데, 다 쓴 뒤에 오타가 있나 다시 쭈욱 읽어보자, 그 사람의 말투와 글이 섞여있다. 나는 재빨리 그 부분들을 슥슥 지워내고 다시 써냈다.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몇 번을 다시 써도 처음의 문체, 말투가 맘에 들었지만 그걸 그대로 적어낼 수는 없었다. 썩 맘에 차지 않는 쪽지와 편지를 보내고 나니 힘이 좀 빠지더라. 굳이 잘 써야 할 것도 없었는데, 어쩐지 그런 말투가 배어나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편안한 그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나서 멍하니 우리가 만났던 날들의 언젠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 목소리가 다시 듣고싶어져 그 사람의 강의가 올라오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강의목록을 클릭했는데 어라? 가만보니 내가 그 사람에게 이제 당신과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날의 강의가 올라와있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난 그 사람을 언제든 원할 때 볼 수 있다. 편리한 일인것 같으면서도, 참 멀쩡히 잘 산다- 하는 생각에 맘이 묘하게 배배 꼬인다. 강의는 그 뒤로도 몇 개가 더 올라와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는 플레이를 눌렀다.
"어?"
화면이 탁 뜨고 칠판 앞에 그 사람이 서있다. 붓기가 빠지지 않은 눈에 화장도 살짝 떠 있다. 목소리도 조금 쉰 것 처럼 상태가 안좋다. 촬영강의 전날이면 그렇게 신경을 쓰던 사람이 왜 이렇게 상태가 안좋은걸까 생각하게 되더라. 근데 강의가 딱 시작하면서 , 그 사람 입에서 그 말이 나오더라. 선생님 모습이 참 초췌하고 안좋죠? 선생님이 사실 좀 안좋은 일이 있어서 잠을 잘 못 잤어요. 그래서 좀 상태가 좋아지면 강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여러분 시험 하루라도 빨리 준비 할 수 있어야 하니까...조금 보기 그래도 강의 열심히 따라와야해요.
계속 무서웠던게 있었다. 당신이 남겨둔 여러가지를 툭 툭 떼어내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궁금함이 있었다. 난 당신에게 무엇이었을까하는 그 궁금증. 마지막엔 오로지 그것 하나만이 신경쓰였다. 당신도 아팠을꺼야, 아냐 그럴리 없어. 이 말들이 계속 머리안에 떠다닌다.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사는 당신이 있다. 그래서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참 화가 났고, 여전히 당신에게 다시 말 한마디 건네려 하지 않은 내가 있게 했다. 근데 왜 그날 하필 그랬나요. 혹시 안좋은 일이 있는걸까. 그렇다면 그 안좋은 일이 뭘까. 왜 눈이 저렇게 부었을까. 하며 마음 한켠의 기대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당신도 나처럼 슬퍼했나요. 당신도 내가 소중했나요. 혹시 당신도 힘들었나요?
바보같은 상상이 지겨워 강의를 꺼버렸다. 그 다음에 올라온 강의 두어개를 보니, 다시 눈도 큼지막해지고 목소리도 돌아왔다. 거 참 이겨내는것도 빠르네- 하고 생각했다. 슬프고 힘들때는 일이 약이 된다고 그러더니 그 말이 딱 맞구나. 그러고보니, 자신을 떠나가는 사람은 안 잡는다는 것도 그렇구나.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데 남자도 아니면서 말 하나는 잘 지킨단 말이지. 이런 저런 생각에 눈을 빙글빙글 굴리다가,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여먹기로했다. 그러고보니, 그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며 매번 라면을 먹는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 핀잔마저 참 편안하고 차분하게 건네어주고는 했다. 때때로 조금 야속해 하는 듯한, 아쉬워 하는듯한, 혹은 가끔 부리는 투정어린 말들이 다 그립다. 내가 그 사람을 닮아가는 동안에 그 사람은 나와 무언가 닮아갔을까? 내가 남겨둔 것이 아직 있을까? 헬로키티통 안에 든 귀여운 비타민을 보며, 이거 못 먹겠어요. 너무 예쁘다. 하며 가끔 정말 좋을때 콧소리가 섞여서 말 끝이 올라가던, 차분함 속에서도 그 기뻐함이 진심처럼 느껴지게 말할 줄 알던, 어른스러웠지만 아이같았던 당신은 여전히 그 비타민을 가지고 있을까.
길지도 짧지도 않은 문자로 밥 먹었냐고 묻지 못할 사이가 된 지금에야, 그 사람의 말투가 참 좋았음을 느낀다. 문득 지난 메세지를 통신사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 한층 더 그렇다. 착하고 돈 많고 예쁘고 성실하고 참하고 몸매좋은게 내 이상형인데, 거기에 말투가 편안하고 차분하며 머리카락이 얇아서 주변 냄새가 잘 배는, 그래서 머리에 항상 무언가를 뿌리려 하는 여자가 이상형이 되겠구나 싶다.
우리 동네 거리에는 벌써 꽃잎이 대부분 떨어지고 나무들엔 분홍색과 녹색의 잎이 어우러져 싱그럽다. 당신에게 우리 동네의 꽃이 참 예쁘다고 자랑했었는데, 이 거리에서 당신의 그 떨리는 말로 신나할 모습에 조금 웃어본다. 그럴리 없음에 조금 더 웃어본다. 그 잦아드는, 담담하고 조용하지만 작은 일들에 행복해했던 당신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너무 그립다. 봄보다 가을이 좋다던 당신에게 내가 자랑했던 이 동네의 꽃을 보여주지 못했음이, 분명히 가을보다 봄이 좋아질 거라고 이야기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이, 이 모든것을 말해줄 약간의 떨림이 있을 그 목소리가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