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두번 보았을 때, 그 전 날밤에도 잠을 못 잔적은 없었다.
3년을 만난 아이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받고도, 잠은 잘 왔다. 원망스러울 정도로 잘 왔다.
처음으로 타인의 입 안을 알게 된 날에도 잠은 잘 왔고
병원에 쓰러져 실려가 본 날에도 잠은 잘 왔다.
학교 일짱이 내일 학교에서 널 죽여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을때도 불안함과 잠은 같이 찾아왔고
친구 오토바이를 부수고 그 변상금을 부모님께 말해야 하는 날의 전날 밤에도 참 편안히 잤다.
그런데 한 2주는 잠을 못자고 있다.
그녀는 정말 한 순간에, 봄과 함께 민들레 꽃씨가 나풀거리며 하늘로 사라지듯 모든 흔적을 지웠다. 아니, 지우지 않았다. 그녀는 내 안의 흔적은 그대로 둔 채로 그냥 훌쩍 떠나버렸다. 흔히 주말 황금시간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하는 유학도 아니요, 평일 저녁의 눈물을 쏟아내는 불치병으로 하늘나라에 간 것도 아니고, 찌질한 인디밴드의 찌질한 이별가사만큼 딱 그만큼 내게로부터 사라졌다. 왜 나는 머물수 없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사람을 앞으로 믿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지냈던 시간은 너무 진실되었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나에게만 한다는 이야기들이 내 삶을 자극했다. 때로는 동정도, 동경도, 슬픔도, 분노도, 화도, 존경도- 그리고 그것들을 다 아우른 위에 올라오는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계속 만드는 그녀는 참 진실되었다. 그래, 사실 지금 사람을 앞으로 믿을 수 있을까 라며 상처받은 것 마냥 슬퍼하는것도 그녀 입장에서는 웃긴 일일 수도 있다. 그녀는 날 좋아한다고 한 적도, 사랑한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그냥 내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법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그 이야기들이 너무도 가련하고 깊은.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어서 묻어둘 수 밖에 없는 삶의 이야기들을 해 주었으니까. 나 밖에 없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으니까. 내가 처음이라며 웃었으니까. 한강 야경을 함께 보기로 했으니까 친구들과는 가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내가 오늘 이날까지, 그리고 아마도 내일과 모레까지 착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 사람은 훌쩍 사라졌다. 전화도, 문자도, 이메일도 아무런 답변도 없다. 전원이 꺼진것도 아니요 수신확인을 안 한것도 아닌데 그녀는 날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다. 대체 왜 이러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나한테 이럴수가 있냐고 그런 이야기 한 마디 하지 못 한채 난 멍하니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돌 처럼 단단했던 믿음은 하룻 밤이 지나고 눈 밑에 거뭇한 기미가 내려올 때마다 조금씩 깍여 나가고, 조각조각이 되어 허공을 떠다닌다. 이 세상에 정말 그 사람은 있는 것이었을까, 내가 느꼈던 체온은 진짜였을까, 그 사람과 기울인 술잔은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사람은 정말 깨끗하게 내게서 사라졌다. 여름과 가을, 겨울과 다시 봄까지 쓰여진 책의 페이지가 있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책장이 북 하고 찢어져 있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어떤 글도 쓰여지지 않고 있었던건지 이제는 모르겠다.
처음엔 걱정이 되었다. 단지 바쁠거라고 위안을 삼다가도 혼자 사는 여자가 밤 늦게 퇴근하느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에 무슨 일 있냐고, 바쁜거냐고, 괜찮냐고, 뭐하냐고, 아프냐고, 그렇게 많은 말을 물었다. 그 말들이 전부 허공을 떠돌다 스러진 뒤에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 화가 울컥하고 솟아서, 홧김에 며칠을 연거푸 술을 먹으며 전화를 걸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없었고, 전화를 받지도 않는 그 사람. 그렇게 간이 걸레가 되어 그 다음날 손가락 까딱 못하겠을 즈음엔, 걱정도 화도 아닌 그저 궁금증이 그 자리를 덮어 차지했다. 하루를 푹 쉬면서 기억이 나는 약 스무해간 내가 잘못한 일들을 역순으로 되짚어 보는 일은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과, 그 사람은 내가 죄 많은 인간임을 알아채고 멀어진 걸까 하는 멍청한 상상까지 이어졌다. 앞으론 사소한 일이라도 나쁜짓을 하지 않겠다며 반성하는 나는 마치 신에게 회개하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뭐 이딴 찌질이가 다 있지 하는 생각의 저편에는 그만큼 필사적으로 그 사람이 필요한 내가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겨우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을 하고, 커피를 배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노래를 하고, 운동을 하고, 그렇지만 잠을 못잤다. 여전히 바쁜 낮이 지나 밤이 되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눕는 순간, 그리고 망할 스마트폰이 배개 옆에 함께 누워있는 동안에 어두컴컴한 방 안의 허공을 바라본 채 다시 속은 울컥거린다. 걱정이, 화가, 억울함이, 궁금증이, 슬픔이, 그럼에도 괜찮다는 쿨한 척 애쓰는 병X인 나와, 받을때까지 열통이고 스무통이고 전화를 걸어가며 좋아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비슷한 수준의 병X인 내가 있다. 그렇게 새벽 네 다섯시가 되어서야 겨우 두어시간을 잔다.
그러다가 운 좋게 2시쯤 잠이 든 날, 놀랍게도 꿈에서 그녀가 나왔다. 너무나 생생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녀는 완벽하게 구성되어 등장했다. 내가 예쁘다고 느꼈던 청치마에 흰 티셔츠를 입은 누나는 영문을 모르겠는 가시덤불 안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조이는 가시덤불에서 쑤욱 다리를 빼냈다. 핏물이 배여나오는 다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분은 환히 웃으며 덤불 밖으로 뛰었다. 지금에서야 그 가시덤불은 어쩌면 내가 투영된 것이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어쨌거나 뜬금없이 푸르고 높은 봄 느낌 나는 하늘과 초원으로 그녀가 피투성이 다리를 하고 걸어가는 뒷 모습을 본 뒤에는 다시 씬이 바뀌어 나는 카메라의 위치에서 그녀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원래 꿈이라는게 그렇게 정처없는 것이지만, 그 뒤에는 되려 현실적이어서 더 뭉클했다. 그녀와 생생하게 만나왔던 현실의 장면들이 그려지고, 그녀와 가고 싶었던 놀이공원이 등장하고 놀이기구를 둘 다 못 타는 주제에 롤러코스터 같은걸 타보자고 웃는 우리가 있었다. 겨울바다를 좋아하는 그녀를 마지막 겨울의 동쪽 해안 모래사장에서 살며시 춥지말라고 뒤에서 껴안아주는 내가 있었다. 이 집 음식이 맛있다며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우리가 있었다. 함께 돌아가지 못함이 못내 아쉬워 몇 개의 지하철을 그냥 보내는 우리가 있었다. 그게 꿈일줄은 몰랐다. 정말로.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SSibal.
아침 8시에 눈을 떴더니 내 방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살면서 어떤 꿈보다도 기분이 나쁘고, 착잡하고, 화가나고, 슬픈, 정말 억울한 꿈이었다. 다시 눈을 꽈악 감고 제발 잠이 들기를 바랬다. 한 시간동안 꿈인지 상상인지 모르게 그녀는 계속 머리속에 남겨져있었고, 나는 그 꿈을 잊지 않기 위해- 혹은 그 행복을 잊지 않기위해 필사적으로 되새겼다. 정말 필사적으로. 한시간 내내...그리고 다시 눈을 떴지만, 역시나 그녀는 없었고 내 핸드폰은 원망스러울 만치 조용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다시 검색하고 지우고, 등록하고 지우고, 결국 여전히 핸드폰에 남아있다.
그 뒤로 다시 4시 이전에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무서웠다. 이렇게 그녀가 날 칼처럼 싹둑 잘라내었는데 내 머리속에 계속 그녀가 떠오르는 것은 너무 힘든일이다. 바쁘고 지치게 살며 아주 조금씩, 몇 그램씩 그 사람을 만들던 마음을 덜어내어 버려야 하건만 그 꿈으로 인해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같았다. 또 꿈을 꾼다면 견딜 수 있을까 그 상실감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떠오르는 아쉬밤쿰 이라는 유머가 사실은 엄청나게 슬픈 이야기라는 것도 처음 느꼈다. 그 사람을 잊어야 하는데, 널 잊어야 하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널 잊어야만 하는데. 다신 누나를 찾지 말아야 하는데.
이유를 알면 나도 가위로 싹둑 잘라내듯 그 사람을 내보낼 수 있을까.
다음에 만나는 사람이 아무리 깊은 이야기로 진정성을 전달해 주더라도
이제는 그것들이 무섭기만 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안아달라고 할 수 있다면
그때는 그냥 그렇게 떠나가지 말라고 꼭 말할텐데.
잠이 오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을 꿈에서 볼까 무서워서. 빨리 잊어야 하는데 계속 울컥거리는 내 맘이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