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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29 21:40:48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임진왜란 - 1. 조선의 전쟁 준비, 빛
+) 머리 아프네요. 실록이랑 이제까지 제가 봐 왔던 책들, 기타 다른 기록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진위 여부를 가리기 힘든 글들... 역시 임진왜란, 입문은 쉬워도 만만치 않습니다.
+) 저번 글은 그저 예고편이었는데도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휴우... 뭔가 각오를 해야겠네요. 저번에 저 때문에 기분 나쁘셨을 성야무인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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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선 좋게 좋게 봐 봅시다. 일단 상식 하나는 깨구요.

당시 조선의 방위체계는 크게 두 가지가 나옵니다. 진관체제와 제승방략 체제. 이 중 진관은 각 성에서 방비하는 거죠. 제승방략은 그 관의 병력들을 다 모은 후 중앙에서 장수가 와서 이를 지휘하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전쟁 준비 관련에서 제일 까이는 게 이 제승방략이죠. 보통 "적에게 등을 보이고 퇴각하는, 즉 패배하는 모습을 일단 보이고 시작하는" 체제라는 건데요. 여기서 의문이 보이죠. 이게 맞다면 최전방의 병력들은 적이 나타나면 일단 뒤로 병력을 물려야 되거든요.

실제 상황과 대입해 보겠습니다.
일본군이 상륙한 직후, 부산진첨사 정발은 자기 휘하의 전함을 가라앉히고 성으로 들어가 농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대포진첨사 윤홍신도 그랬겠죠. 이 둘은 전쟁 극초반에 전사합니다.
뒤이어 동래산성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좌병사 이각이 모입니다. 이 중 박홍과 이각은 도망가고 송상현은 맞서 싸우다 전사하죠. 그 후 밀양에서는 밀양부사 박진은 요격하려다 패하고 후퇴합니다. 김해부사 서예원 역시 적과 교전하고 패하고 후퇴하죠. 뭐 이 양반은 삭탈관직 당한 걸 보면 그냥 도망간 거 같지만 -_-;

이게 경상남도에서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제승방략과 끼워보면 이상하죠. 정발과 윤홍신은 박홍과 같이 동래산성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농성하고 전사했습니다. 동래산성이 집결지라면 이상하죠. 혹은 동래산성이 집결지가 아니라 그 후방이었으면 송상현 역시 작전대로 후퇴하지 않고 독단으로 남은 거구요.
결론은 간단하죠. 제승방략은 그냥 적이 보인다! 뒤로 후퇴~ 하는 체제가 아니었다는 거죠.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시 얘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간략한 경과
그럼 시작해보죠.
1587년, 대마도 도주 종의지, 소 요시토시는 통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합니다. 이미 이 때부터 히데요시는 선조의 입조, 그러니까 명 대신 일본을 섬기기를 요구한 듯 합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 양국에 한 발씩 걸친 대마도는 이걸 그대로 전달하기 힘들었죠. 그래서 나온 게 통신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에선 계속 반대하다가 겨우 89년 통신사 파견이 결정됩니다.

한편, 히데요시는 큐슈 정벌에 20만을 투입, 압도적인 대군을 보여주면서 전투 한두번으로 큐슈의 최강 다이묘 시마즈가의 항복을 받아 냅니다. 1590년에는 동쪽의 강국 호조 가문을 역시 20만을 투입해 말려죽이죠. 현재의 도쿄가 있는 부근입니다. 멸망한 호조 가문 대신 그 지역을 맡은 게 우리가 잘 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죠. 한편 오우슈라 불리는 일본 동북쪽을 통일한 다테 마사무네 역시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면서 일본을 통일하죠. 이 20만의 병력은 일본 역사에서 찾기가 힘든 대병력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의 상황은 후삼국시대의 호족들보다 더 했거든요. 그저 히데요시의 힘에 의해 굴복한 무리기는 했지만, 일본사에 찾기 힘들 정도의 대병이 그의 손 안에 모인 거죠.
글쎄요. 예행연습이었을까요?

90년 3월. 조선 통신사는 출발합니다. 히데요시는 그냥 왔구나 하면서 질질 시간을 끌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죠. 이 때 황윤길이나 허성은 보물 같은 것에나 관심 가졌는데 김성일은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히데요시가 대접도 박하게 하고 중간에 왠 어린애 안고 놀자 버럭하기도 하는 등 당당했다고 하죠. 일본인들도 김성일을 우러러 봤다느니 그러는데...
돌아와서 한 말이 전혀 달랐죠. 황윤길은 히데요시가 침략할 것이다!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그럴 인물이 못 된다! 그리고 김성일은 나중에 류성룡과의 대화에서 백성들이 불안해 할 까봐 그랬다는 말을 했다고 하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잘 아는, 당파 싸움 때문에 무조건 반대되는 말이 나왔다는, 조선은 전쟁 준비 따위 없이 당파 싸움만 했다는 인식이 만들어집니다. -_-; 마침 정여립의 난의 후유증이 이어지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글쎄요... 그럴까요? 시간을 좀 더 뒤로 돌려서 명종 때부터 가 보겠습니다.

2. 판옥선과 화포
삼포왜란 이후 왜구에 대한 방비에 대한 논의를 하죠.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전선이었던 맹선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기나긴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작은 함선을 많이 만드느냐, 소수의 큰 함선을 만드느냐였죠. 오랜 논의 끝에 거함거포...가 아니라 소수의 큰 함선을 만드는 시스템으로 굳어집니다. 그게 바로 판옥선이죠. 판옥선은 기존의 갑판 위에 한 층을 더 올리고 그 위에 작은 누각을 만듭니다. 그래서 板屋船이죠. 노를 젓는 격군은 아래층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갑판에서도 위에서 아래로 활과 화포를 쏠 수 있게 했죠. 후에 일본이 나름 대형선박을 동원해도 갑판에 올라야 되는 상황이죠. 단병접전에 강한 왜구를 상대하기 위한, 활 등 원거리 무기에 강한 조선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판옥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명종 때인 1555년 이후. 임진왜란 때는 1차 출동 때부터 이미 맹선이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화포는 어떨까요? 세종 때까지 개발한 총통류를 1세대 총통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천지현황 화포를 개량해서 장군화통, 일총통, 이총통, 삼총통 등으로 분류했다고 하는군요. 이후 여기서 더 발전된 형태가 나타나는 게 명종 때, 특히 위에서 언급한 1555년대 전후입니다. 이렇게 개량되서 나온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지현황 총통 시리즈죠. 1583년에는 전라좌수사 김지가 승자총통을 개발하죠. (실물 유물 중에 가장 이른 시기가 1575년이라고 하니 개발 시기는 더 빨랐겠죠) 이 승자총통은 이후 시전부락 정벌 등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후 임진왜란에는 기타 소형 총통류를 제치고 확실하게 주력으로 자리매김했죠. 이 승자총통류도 크게 세분화되어서 별승자총통의 경우 조선 수군이 많이 쓴 걸로 보이는데 기존 총통보다 작으면서 길이는 더 길어서 명중률을 향상시킬 수 있었죠. 그리고 소승자총통은 현재의 가늠쇠와 가늠자, 개머리판이 있는, 조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였습니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 개발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는데 1587~8년 사이에 제작된 유물이 많다고 하는군요. 조선의 자랑 중 하나인 비격진천뢰 역시 임란 중 개발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 역시 있으며 결정적으로 조정의 지원을 못 받고 싸운 조선 수군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중에나 들어왔다는 중국의 불랑기포도 이미 임란 30년 전에 "자체제작"했구요.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수군 편제도 변해서 경상좌수영은 축소되고 경상우수영은 70~100척을 거느리는 대규모 수영으로 변모하구요. 임진왜란 과정에서 경상좌수영은 농성하고 우수영이 요격한다는 대응이 실제 이루어졌습니다. -_-; 결과는 논하지 맙시다.
아무튼 세종 이후 문에 치우친 조선을 생각하면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이미 상당한 무기체계 개발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정말 신기할 정도로 명종과 선조 때에 말이죠. 특히 비격진천뢰나 승자총통류의 개발을 보면 임진왜란에 대비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개발된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화포 개발을 주도한 이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 멀게 보면 삼포왜란부터, 최소한 을묘왜변이 일어난 1555년을 기점으로 조선의 방어체계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거겠죠.

2. 시전부락 공략 작전
8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꽤나 큰 의의를 가집니다.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 이후로 조선의 북방에 대한 정책은 최대한 돌봐주자였습니다. 토벌하는 것은 여러 준비가 필요하고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이들을 돌봐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일 것이다... 라는 거였죠. 세조 때만 해도 신숙주 등이 어느 정도 토벌하긴 했습니다만 이후 조선은 극도의 문약이 시작됩니다. 태평성대라는 성종 때도 각종 무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지고 오랑캐를 토벌하는 것에도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여러가지 폐단과 함께 군사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사실상 이후 토벌에 대한 기록은 없다시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나온 것이 시전부락 공략 작전이죠. 이 때 그 유명한 녹둔도 전투 등으로 여진족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일은 쳐들어온 적장 니탕개의 목을 베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조는 정말 간만에 대규모 토벌을 계획하고, 성공합니다. 목을 벤 것만 229급. 이전 토벌에서 10급만 베어도 잘 했다 하고 100급을 베면 우왕 굳 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큰 승리였습니다. 이일, 신립, 원균-_-(이 때는 후방의 보급부대에 있어서 공을 세웠다는 증거 자체가 없습니다) 등 임진왜란 때 볼 수 있는 장수들이 대거 참전했고 이순신도 이 전투를 통해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삼포왜란과 을묘왜변, 니탕개의 침략 등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선조는 국방력에 대해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승자총통이 보편화되는 등 북쪽 오랑캐를 대처하는 확실한 메뉴얼이 완성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못 가지만요 -_-;

3. 카운트다운
1589년. 불차채용이 시작되었습니다. 위아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능력 있으면 추천하라는 거죠. 여기서 각 대신들이 몇 명씩을 추천하는데, 이순신의 경우도 유성룡과 이산해에 의해 추가로 추천이 올라왔죠. 6개월 후에 최종 결정이 내려져서 병사 및 수사로 보내게 되는데, 이에 대해 선조는 조선을 구하게 될 발언을 하게 됩니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1589년 7월 28일)

이순신과 함께 이름이 오른 이경록은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우고 역시 백의종군한 장수였습니다. 이순신 인생의 오점이라고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녹둔도 전투는 -_-; 정 반대로 선조에게 크게 박힌 거죠. 여기서 이순신은 정말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됩니다. 그가 정읍 현감이 된 것은 89년 12월, 종 6품입니다. 그런데 90년 8월 갑자기 선조는 종 3품 첨사직에 올리려고 하죠. 현감은 지방 수령 중 제일 낮은 직책이죠. 그런데 첨사는 군사직에서 수사 바로 밑입니다. 파격적인 승진, 당연히 사간원에서는 딴지를 겁니다. 그렇게 급히 올리면 안 된다구요. 이에 선조는 91년에 진도군수 -> 가리포첨사 -> 전라좌수사로 순차적으로 올려 버립니다. 이 방법이 임명해놓고 부임하러 가기도 전에 또 올리고 하는 방식이었죠.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딴 놈은 몰라도 이순신만은 올려야 된다고 무마시켰죠. 선조의 의지는 굳건했습니다.

이 때 이름이 오른 인물들 중에는 임란 당시 밀양부사가 된 박진, 부산진첨사 정발, 의병으로 활약한 손인갑이나 남원성 싸움에서 50명으로 죽으러 들어간 이복남의 이름도 보입니다. 행주산성에서 권율과 싸운 조경도 이름이 올라왔고 이경록의 경우 나주목사에 임명되죠. 이순신 외에도 능력 있다고 할 만한 장수들은 이렇게 남쪽으로 최대한 임명된 것이죠.

불차채용은 통신사를 보내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유교답게 순서 잘 따지는 조선에서는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고 김성일이 "전쟁 없슈" 하기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지명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런 장수들을 왜적이 쳐들어올 경우 주요 전장이 될 곳에 배치해 둔 것이죠. (이경록이 임명된 나주는 을묘왜변 당시 왜구가 쳐들어 온 곳이었습니다)

91년 1월. 통신사가 돌아오고 예의 그 말을 하며 선조를 헷갈리게 합니다. 하지만 대마도 도주 종의지와 왜승 현소는 계속 침공 사실을 통보하고 외교적으로 해결하길 간청하죠. 7월, 선조는 명에 일본의 명분인 "정명가도"를 알리며 전국에 전쟁 준비 지시를 내립니다. 특히 경상우감사 김수는 전쟁 덕후라는 비난까지 들으면서 강압적으로 준비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다면서 반대가 계속되었고 12월에는 그만두게 하죠. 김성일은 몇 차례에 걸쳐 시폐 10조를 올리며 계속 반대하네요 -_-;

하지만 이런 전쟁 준비 분위기는 끝나지 않아서 이순신은 조정의 명에 따라 각 관포에게 점검을 지시하고, 제대로 점검 안 하고 보고한 김완에게 벌을 주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거북선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결코 이순신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상병영에서 군관이 파견되어서 이런 것들을 확인하기도 했죠. 이순신이 한 것은 전라좌수영이 보유해야 할 선박과 무기들을 점검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림으로 나온 거북선의 초기 형태 역시 기존 판옥선에 한 겹을 덮어 씌운 다음 앞에 용머리를 단 것 뿐이었죠. 기존의 판옥선을 폐기하면서 새로 만든 것이거나 원래 있던 것을 개조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수영들에서도 마찬가지로 행해졌습니다. 원균은 부임하자마자 각 관포들을 모두 확인해야 했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직접 관포들을 다 둘러봅니다.

4. 전쟁의 시작
흥미로운 링크를 두 개 달도록 하겠습니다. 데프콘으로 유명한 김경진님의 각종 배경자료를 맡았던 신재호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김병륜님의 글입니다. 이글루스 닉네임은 번동아제시네요.
http://lyuen.egloos.com/4571363
고문서 관련 포스팅을 자주 하시는데 경상도 지역 군적부를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속오군 편제가 없으니 임란 후는 아니고 임진왜란 때 점령된 지역도 나타나니 임란 중도 아니죠. 1591년 전쟁 직전의 문서가 아닐까 추정하시더군요. 여기서 경상좌수군의 육군 전환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수군 관포의 병력이 배와 사수, 격군이 아닌 보병과 기병으로 나타났거든요.
신립이 수군을 육군으로 바꾸자고 주장했고 이순신이 반대했다... 정도만 나오는 게 통설인데 이 문서는 최소한 경상좌수군에서는 이루어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게 해 줍니다. 특히 임란 직후 경상좌수군의 상황을 보면요.
http://lyuen.egloos.com/3944517
이 글은 전쟁 초기 조선 병력 동원에 대해 의문을 품는 글입니다. 맨 위에서 말한 제승방략, 까이기는 하지만 이게 전쟁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건 지금도 힘들죠. 애초에 이일과 신립의 병력도 불명입니다. 신립의 경우 8000이라고 하는데 이게 제승방략에 의해 해당 지역에 모인 병력인지 신립이 한양에서 데리고 간 병력인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엔하위키에서는 "원래 이끌고 갈 필요가 없는 8000의 경군까지 끌고 갔다"는 식의 서술이 있는데 출처를 모르겠네요. 이일과 신립이 급히 나가는데 서울에서 모을 병력이 없어서 유생이나 종들도 데리고 갔다는 식의 기록이 특히 징비록 등에 많지만 애초에 제승방략은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가는 것이지 병력까지 끌고 가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이후 한강 등에서의 방어전을 보면 일만 이상의 병력이 나오듯이 병력 자체가 없는 것도 아니었죠. 제승방략을 많이 까는 게 징비록의 시각입니다만 이렇게 여러 곳에서 의문과 오류가 나오고 있죠.

이런 의문들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임란 당시의 대처를 다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위에서 다루었듯 부산진첨사 정발과 다대포진첨사 윤홍신은 적이 보이자 당연하다는 듯이 농성에 나섭니다. (사냥하다가 제대로 준비도 못 하고 당했다는 기록도 있긴 하죠) 그리고 적이 상륙한 지 채 하루나 이틀도 되지 않았는데 양산과 울산 군수의 병력이 동래산성에 도착하고 당연히 경상좌병사 이각도 입성합니다. 덤으로 경상좌수사 박홍도 여기 합류하죠. 밀양에서는 박진이 경상우감사 김수와 함께 적을 요격하고, 김해부사 서예원은 맞서 싸우려다 도망가고, 죄를 씻기 위해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된 김성일은 따로 요격을 시도합니다. 한편으로 경상우수사 원균은 백 척에 달하는 병력을 모은 후 부산포에 요격을 위해 출동하구요. 대구에서 상주 일대의 병력 역시 집결해서 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죠.
이 모든 것들이 임란 극초기에 행해진 것들입니다. 그냥 허둥지둥하고 도망만 갔다는 현대의 인식과는 괴리가 있죠. 물론... 저 중에 이각과 박홍은 동래산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상주일대에 모인 병력 역시 뿔뿔히 흩어집니다. 하지만 저런 상황에서도 병력들이 제대로 모인 것을 생각하면 시스템 자체는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은 제승방략의 메뉴얼대로 이루어졌을 것이구요.

5. 결론
명종은 문정왕후의 섭정에 휘말리고 내시나 갈구는 왕으로, 선조는 당파싸움만 조장하는 왕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 임란 전 40년간 조선의 국방력은 상당히 상승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미 40년 전에 결정되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판옥선, 각종 총통류들이 대여진, 대왜 용도로 발달했죠. 세종 이후 침체된 국방력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초기에는 규모가 다 비슷했던 수영들이 왜구의 공격을 많이 받은 우수영들로 집중되고 경상좌수영의 경우 아예 육군으로 전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크게 편제가 변하기도 합니다. 선조는 시전 부락 공략 작전이라는 조선사에 보기 힘든 대토벌을 행하기도 했구요. 불차채용으로 파격적인 인사를 행했으며 철저한 전쟁 준비를 명했습니다. 임란 중에 "전쟁 준비를 너무 심하게 해서 백성들 고생하게 했으니 미안염"이라는 교서를 내리고 백성들은 그걸 수긍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죠. 이 정도로 상당한 대비를 해서 소설 임진왜란을 지은 저자진(김경진 윤민혁 안병도)은 "과연 전라좌수영이 다른 수영에 비해 훈련도나 화포 보유 상황이 좋았을까?"하는 의문도 품더군요.

봉수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제승방략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났으며, 한양에서도 파견할 병력이 없었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최전방인 경상좌도에서도 병력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며, 훈련도 문제와는 별개로 병력이 와해된 건 대부분 이각, 박홍, 원균, 서예원 등 장수가 도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불차채용 때 추천된 이순신, 박진, 정발 등은 각자 활약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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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좋은 얘기 많이 했죠? ^_^ 이상 "빛" 편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철저히 까 보도록 하죠. -_-;
임진왜란 관련 서적은 많으니 몇 가지 추천을 해 보자면... 입문서로 쓸만한 것은 제법 옛날에 나온 거지만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이었다"가 제일 낫지 않을까 싶네요. 해전사로 좀 깊이 파 보려면 "임진왜란 해전사"가 제일 낫구요. 다른 건 너무 많아서 확실히 뭐가 좋다고 하긴 힘드네요. 요새 불쏘시개들이 너무 많이 나오기도 했구요. 소설로 따지면 위에서 언급한 소설 임진왜란이 역시 가장 좋지만 입문자에겐 좀 힘들기도 하고 8권이나 돼서 -_-; 그래도 이게 소설인가 사료집인가 싶을 정도로 막강한 자료를 자랑합니다. 아마 제 글에서 심심하면 언급될 듯 하네요.

그러고보니 NHK에서 일본 수군 총대장이었던 도도 다카토라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내년에 할 건 이미 결정됐으니 2013년이나 2014년에 하는 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이순신 장군에게 깨진 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전국시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게 많긴 했지만 임진왜란에서 직접 전투를 한 장수는 처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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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29 21:58
수정 아이콘
아 불쏘시게...

저희 집에도 하나 있습니다. 불쏘시게. --; 내용에 신뢰를 전혀 줄 수없는 글투에 기겁했다죠. 추천을 받고 골랐어야하는데 말이죠.
11/03/29 22:0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예고때도 관심이 많이 갔는데 역시 재미있어요. 그런데 질문이...100급 200급...급이 먼가요?
구국강철대오
11/03/29 22:11
수정 아이콘
근본적으로 당시 조정의 전쟁 대비 분위기는 '왜구의 대규모 침략'을 막자는 주의가 강했습니다. 일본이 침략하는건 거의 기정사실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그동안 상상하기 힘든 미증유의 규모였다는 것이지요. 10만 이상단위로 외국 정벌을 나서는 것은 중국급 대국으로서도 나라의 명운을 건 모험입니다. 실재로 이짓하다가 많이 망했죠? 보급체계라는 문제 때문에 내전 10만 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일본은 그 짓을 한겁니다. 당연히 조선 조정으로서는 상상도 못했고, 당시 방비도 남해안 지역에 치중되어 있었지요. 제 추측이지만 아마 많아야 몇만 단위로 일시적인 침략이라고 생각했지 진짜 나라 전체를 먹으러 온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죠. 당장 선조때 니탕개의 난도 만단위에 오고가는 것이었고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대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15만에 추가병력까지 30만이라니. 생산력이 조선의 두배에 달했던 당시 일본에서 조차 전국시대 직후라는 특이한 사항 덕분에 가능했던 규모지요. 오랜 평화후 메이지 유신 내전에서는 기껏해야 몇천단위로 투닥투닥하는걸 생각하면 일본으로서도 스스로도 자체 능력을 넘어선 침략규모였지요.


참고로 충무공은 임란을 대비해서 품계를 몇계단 뛰면서 초고속 승진을 한 경우인데 이런 상식을 깨는 초고속 승진에 대신들과 사간헌에서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걸 커버해 준 백그라운가 바로 선조 자신이었습니다. 임란때 활약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선소의 인재 고르는 능력은 탁월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쉬운건 왕위>>>>>>>>>>>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국가 라는 가치관이었지요. 호란때 발리는 인조와는 달리 성격이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왕으로서의 선조의 능력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략 부분은 거의 본좌급이랄까. 아래 신하들 쥐고 흔드는 능력은 거의 S급이었죠.
무형의난사
11/03/29 22:46
수정 아이콘
이거 국사 새로 배워야겠군요 덜덜.....여튼 선조는 망할 인조님 너님보다는 훨나음 이정도인가요? 크크...
양정인
11/03/29 23:12
수정 아이콘
뭐... 선조는 어떤 면으론 정말 뛰어난 임금이었죠.
다만 그것이 엉뚱한 방향에서 나왔다는 것이 불만인 것이죠.
미친듯한 진격속도를 보인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한 것까지는 자신들의 계획으로 됐지만
그 이후에 선조가 몽진에 몽진을 거듭하면서 북으로북으로 튀어버렸으니 크크
Je ne sais quoi
11/03/29 23:12
수정 아이콘
아... 이게 뭔가요. 전 그 동안 선조가 조선 역사상 일등을 앞다투는 무능력의 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능력이 아니라 왕위 집착으로 인한 실기였단 말인가요.. 그동안 읽은 책들은 뭐였지 ㅜ.ㅜ 아니야.. 믿을 수 없어... ㅠ.ㅠ
카서스
11/03/29 23:36
수정 아이콘
1. 성종 이후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조 이후로 국방력에 대한 투자를 줄인것은 결정적으로 이시애의 난 때문으로 꼽고 있는것 같습니다.

세조가 이시애의 난때 자신이 동원할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신식 화기로 무장하고있던 이시애의 군대를 겨우겨우 격파한 뒤로 철저히 군벌세력화를 견제했기 때문으로 알고있습니다.

2. 그리고 불사채용에 원모씨도 들어가있는걸로 알고있었는데 아닌가요?

3. 병력동원면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남더군요. 더 정확히 말하면 잘 훈련된 정규병이 제대로 집결했는지요. 일단 조선 정규군은 세조 이후로 국가에서 아예 공인해버린 방군수포제로 인해 제대로 훈련 등에 동원되지도 않았고, 이로인해 군대의 막장화는 이미 수차례 왜변으로 입증된 바가 있었죠. 심지어 명종조에는 각지에서 발생한 초적때를 토벌하는데에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막장이라....

4. 여기에 박홍이 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임란기에 참전한 사실과 연계하여 추측했을떄... 장수들은 자신들이 지휘하게 될 병력을 보고 '이게 뭐야, 이런병력으로 어떻게 싸워 (....)' 하면서 도망간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물론 공상입니다.
황사저그
11/03/2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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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이야기지만, 도도 다카도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무려 NHK 대하드라마로 나온다니, 결정된다면 내후년 대하드라마는 안보는 걸로 결정이군요.
키스도사
11/03/29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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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시 이런글이 안구정화가 되는 글이죠 +.+
눈시BB님께 항상 감사하단 말 드리고 싶고 앞으로도 재미난글 기대하겠습니다 ^^

선조, 전쟁 개시전엔 꽤 괜찮은 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 돌입과 더불어 하는 행동들은 이해 불가죠 ^^;;

류성룡을 한성 방어하라고 남겨 놓으려다 신하들이 "류성룡은 꼭 필요함!" 이라고 하는바람에 데려갓고 한강방어선과 임진강 방어선을 담당하던 김명원이 삽질로 말아먹고 돌아왔지만 "승패는 병가지 상사라는 말이 있잖아" 라며 관대함을 보인모습, 칠천량해전으로 해상권을 한큐에 말아먹은 원균을 신하들이 "잡아 족쳐야합니다!" 라고 하지만 옹호하다 훗날 1등 공신에 올리는 위엄도 보여주죠. 그리고 광해군을 대신 자기자리에 대리로 앉히고 자신은 명나라로 도망가면 어떻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말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또한 나중에 명나라 경리 양호와 충돌을 빚은 정응태가 정응태 무고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대해 모함을 하자 세자가 알아서 처리해 난 온천에 휴양갈테니 하는 무책임해 보이는 모습도 보여 류성룡이 극구 말려서 결국 자신이 처리하긴 합니다만...

여담이지만 선조의 자식교육도 아주 개판이었죠. 오죽하면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자 백성들(국경인과 국세필)이 자기손으로 가토에게 왕자를 잡아 바치는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물론 국경인과 국세필은 가토에게 직함까지 받고 앞잡이 노릇하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에 제일 첫 손님으로 사망하지만요.
마사초
11/03/30 00:12
수정 아이콘
신라본기 첫 기사가 박혁거세가 왕이 됐다. 그리고 일식이 일어났다. 그리고 알영이랑 결혼했다
네번째 기사가 일본놈이 쳐들어왔다죠. 때문에 일본과 치고박고 싸우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고
그 동안은 이렇게 싸우면서 비교적 무난히 이기고 그랬는데 임란같이 대규모 장기적으로
쳐들어온 적은 처음이라 기존과는 다른 양상의 전투가 나왔다고 봅니다.
임란에 대한 준비는 더 올라가면 14c말부터 착실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수군의 경우는 다음에 설명이 나올 것이고 기존의 주적을 북방오랑캐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방어거점도 변화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둘다 막으면 좋겠지만, 그럴 여력이 없을 땐
일본을 막고 북방오랑캐는 명의 협조를 구하는 식으로 가게됐고 이를 사대라 부르게 되죠
사대는 굴욕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나온
상당히 합리적인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란 동안 조선은 그 특유의 세련된 정밀기계같은 모습을 보여서
임란을 이겨내는데 큰 도움을 주죠
타테이시아
11/03/30 00:16
수정 아이콘
선조가 임란만 없었어도 명군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선조의 정치 중 그나마 괜찮았던 정치였다는 사림의 등용은 자기의 컴플렉스를 만회하기 위한 요소 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자기는 조선왕조 최초로 적손이 아닌 자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컴플렉스가 상당했죠.
적손이 아닌 자로 임금이 된 케이스는 고려시대로 가봐도 상당히 드물고 이전 왕조로 가봐도 거의 마찬가지로 드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임금에 올랐으니 얼마나 컴플렉스가 심했겠습니까?
그 컴플렉스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깨끗하다 인정받고 있던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야 선정을 펼친 임금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서손의 이미지를 깔끔히 없앨 수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선조는 그 자체의 능력은 정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이의 탄핵을 막아주지 못한 점입니다.
이이가 선조의 신임을 받고 병조판서 등으로 복직되었을 때 삼사를 장악한 동인은 이이를 서인으로 몰아 공격합니다.
결국 이에 견디지 못한 이이가 사직하고 마는데요. 여기서 선조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이이와 같은 뛰어난 신하가 반대당에 의해 몰리는데도 전혀 구해줄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 이후에는 더 가관입니다. 이이 사후 서인은 몰락했고 동인의 세상이 되었으나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여기에 선조는 정철을 등용하게 되는데요. 정철은 낭만적인 문학가였으나 냉혹한 정치가였죠.
그는 여기서 그를 공격했던 동인의 상당수를 이 때 숙청시켜 버리죠. 선조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1591년 임진왜란이 터지기 불과 1년 전 세자건저문제로 선조가 변덕을 부려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을 다시 숙청합니다.

만약 선조가 적어도 조선임금 중 평균 정도의 정치력만 가지고 있었어도 이 꼴은 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동서인의 분당은 솔직히 임금이 너무 방치한 감이 커요. 스스로 학자군주를 자처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군주는 학자가 아니라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붕당에 있어서는 강하게 대처했어야 했습니다.

선조가 정치력이 뛰어났다는 것으로 동서인의 분열을 잘 이용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로 들자면 가장 극심한 분열을 일으켰던 숙종대를 보면 아실 수 있는데
숙종은 환국정치를 통해서 여러번 정치세력을 바꿔치기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세력이 노론인데 웃기게도 노론의 수장은 숙종이 사약을 내렸던 송시열이었습니다.
즉 노론은 자신의 수장을 죽였던 숙종의 편을 숙종 말년에 섰다는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숙종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러한 강한 왕권은 이후 영조-정조 시대를 이끄는 힘이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왕조국가시절에는 왕권이 강해야지만 그 나라가 부강하고 여러가지 모든게 발전됩니다.
조선에 있어서는 태종과 세조, 숙종이 그러한 역할을 한 임금들이었죠.

그런 면에서 보면 선조는 너무나 무능력했다고 봅니다.
ChRh열혈팬
11/03/30 00:34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 요즘 광해군에 대해 공부중인데 혹시 광해군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찰할수있는 서적은 없을까요?? [m]
11/03/30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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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인데 어마어마한 떡밥이 쏟아져 나오네요.

본글도 재미있게 읽었고 리플도 너무 재미있네요.
앞으로도 좀 더 많은 리플이 달리고 좀 더 많은 논쟁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크크

그리고 선조에 대한 평가는 저 역시 예전엔 상당히 부정적이었는데,
단편적인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지만
인물 그 자체를 두고 봤을 때는 오히려 유능하면 유능했지 무능력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게 무엇이지 뭐라고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는데 한 단어로 정리해주시네요.
재능낭비-_-;;
체러티
11/03/30 01:13
수정 아이콘
글이 길어지더라도 해전부분은 꼭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Je ne sais quoi
11/03/30 01:31
수정 아이콘
그런데 오랜만에 추게 안 가나요? 전 추게 복구해서 보냈으면 좋겠는데 ^^
루크레티아
11/03/30 09:57
수정 아이콘
선조가 아예 절대무능으로 평가받는 기존의 사관, 상식은 갈아 엎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능'의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만약 선조가 유능했다면 왜란 당시에 그런 뻘짓의 콤보를 작렬시킬 리가 없지요. 진짜 선조가 유능한 임금이었다면 왜란의 대처에서도 똑소리 나는 모습들을 보여주어야만 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왕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비상시에는 그저 우왕좌왕 할 뿐인 평범한 수준의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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