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중 지나가면서 들은 얘기지만 임란 후 만들어진 조선의 전설들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도망치다가 왜군에게 발각되자 아기를 버려두고 강으로 뛰어 들어가 피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아기는 당연히 죽었고 여인이 결국 도망갔는지 강물에 휩쓸려 죽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아기를 버리고 간 이유는 왜적에게 욕을 당하면 안 되니까...
근데 이게 정절을 지키는 여인으로 다른 여인들도 본 받으라는 취지로 퍼졌다고 합니다. -_-; 에 뭐 교수님께 들은 얘기니까 카더라는 아... 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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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쪽
세종의 사군 육진 개척으로 함경도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여진은 압록-두만강 바깥으로 쫓겨납니다. 그 후는 이들과의 계속된 싸움이었죠. 실록을 검색해보면 심심하면 "함경도의 방비를 논하다"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실질적인 주적이었죠. 문제는 이게 확실한 대장이 없는 테러와의 싸움? -_-; 이었다는 겁니다. 유목민족인만큼 전투력은 높으니 적은 군사로 상대할 수 없고, 많은 군사를 움직이면 숨어 버립니다. 만주가 딱히 거점을 만들 정도의 땅도 아니었고 얻어봤자 이득도 적었죠. 함경도와 평안도로 꾸준히 사민정책을 했는데도 반발이 심했는데 그 위 쪽은 오죽할까요. 나중에 국경분쟁이 일어날 정도로 북쪽으로 백성들이 탈출했던 것은 청이 세워지고 만주에 봉금령이 내려지면서 이전만큼 소규모의 약탈이 적었던 것, 하도 막장으로 흘러가니 정말 살기 어려워서 개척이라도 해 보자는 게 강했죠.
이들은 조선이 강하게 대응하면 토산물을 바치고 귀부하기도 하는 등 설설 깁니다. 세조 기사를 찾아보고 있는데 여진이고 대마도고 토물 바쳤다는 기록이 참 많네요. (이 때문에 조선은 말썽을 많이 부려서 그렇지 나름 동북아의 제 2인자로 소제국주의를 이루었다는 시각도 있더군요. 뭐 교린이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수틀리면 계속 공격해 들어오고 명나라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해서 "조선이 우리 괴롭혀요 ㅠㅠ" 하면서 이간질을 하기도 했죠. 때문에 세조 때 신숙주의 북정은 명을 꽤나 무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여진을 달래기 위해 왔던 명 사신을 성에 들이지도 않고 그냥 쫓아 보냈거든요.
세조 13년 10월 중국과 공동으로 오랑캐를 쓸어버리는 작전을 세웠는데 운 좋게 조선군 단독으로 골치를 썩이던 이만주를 죽이죠. 그 때 기사를 보면 "중국이 뭐라 물어보면 이렇게 말해라"고 자세하게 적어서 보낸 기록이 있네요. 참 재밌습니다.
자. 이제 세종대왕 시절보다 더한 태평성대라는 성종 시절로 가 봅시다.
성종 22년 (1491) 4월 26일, 홍문관 부제학 김극검 등은 북정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2월에 적이 침입해서 약탈하고 돌아간 것에 대한 보복이었죠. 기니까 링크로 때웁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D%84%EB%AC%98%EC%99%9C%EB%B3%80&keyword=%EC%9D%84%EB%AC%98%EC%99%9C%EB%B3%80
대충 간추려 보면 적지로 들어가는데 패하면 다 죽고 쪽팔리기만 한다. 이겨도 걔네들이 복수할 것이니 더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그냥 튼튼하게 방비만 하자는 거죠. 여기서 대왜정책에 대한 말도 있는데, 적이 수만이라는 말을 하면서 남도에 수만 병력을 갖추자고 하는 말에 그건 다 쌩구라고 수만의 병력을 갖추면 거기에 드는 군량은 어쩔 것이냐. 칠천이면 충분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전에 4만이 동원되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작은 사건으로 뭔 큰 일을 하려고 하냐. 군량은 어쩌고 체면은 어쩌고..."하는 반대를 겪었고 적도 숨어 버려서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돌아왔습니다. 하필 음력 10월 그 추운 날에 군사를 일으켜서 얼어죽고 굶어죽은 병사도 많았구요. 때문에 이 공으로 상을 받은 게 과하다는 반대도 받습니다. 이걸 대표적으로 봤습니다만... 성종 때 이미 각 장수들이 진법을 모른다느니 무기들이 어떻다느니 하는 국방력에 틈이 가는 게 여실히 느껴지죠.
연산군 때는 서정을 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중종 때는 골치를 썩이던 여진 추장이 조선 안으로 들어오자 (약탈하러 온 건 아닌가봐요) 사로잡자는 말이 나왔는데 조광조가 "군자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반대했죠. 이후 조선은 여진이 쳐들어오면 막되 왠만하면 정벌하지 말고 달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덕분에 세조 때의 남이 이후로 선조 때까지 딱히 "명장"이라고 할 만한 위인을 찾기는 힘들죠. 시전 부락 공략 작전까지 북쪽을 향한 조선군의 공격은 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2. 남쪽
남쪽으로 가 보죠. 이미 삼포에는 규정보다 많은 왜인들이 살았고, 성종 때부터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나 약탈은 꽤나 문제가 돼 왔었죠. 이 때문에 조선이 강압적으로 이들을 제약하고, 이들은 반발하는 과정에서 삼포왜란이 일어나죠. 1510년입니다. 이 때 조선은 사오천 정도의 왜구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해서 일진일퇴를 반복합니다. 웅천이 함락되고 조선에서는 충청도 및 경기도의 중앙군을 움직여 토벌을 지시하죠. 다행히 경상도의 병력이 제대로 병력을 규합하여 적을 쫓아내긴 합니다. 이 때 동원된 병력이 역시 사오천 가량이네요. 이 때 벤 목이 295급. 격침한 적선이 5척입니다. 이 대가로 조선은 삼포에 왜인들이 거주하지 못 하게 하고 대마도에 세견선을 줄이는 등 강력한 압박을 가합니다만, 대마도의 간절한 요청으로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죠. 임신약조입니다. 그래도 이건 어느 정도 성공적이어서 이후 왜구들이 심심하면 오긴 했지만 소규모였고 거의 격퇴에 성공합니다. 1541년. 왜구는 다시 20척의 배와 200여명의 병력으로 고성 앞바다 사량진을 공격합니다. 그나마 이번에도 강력하게 맞서서 십단위도 되지 않는 피해를 입고 쫓아내긴 했다는군요. 대신 왜구 및 대마도에 대한 정책은 강경해지기만 했구요. 소함다수냐, 거함소수냐 논쟁은 이 때부터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차라리 다행이네요.
하지만 우리는 겨우 사오천의 적습에도 충청, 경기의 병력을 모아 내려가야 했다는 상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오기 전에 경상도 내에서 끝냈지만요)
그리고 1555년. 을묘왜변이 벌어집니다. 이번엔 전라도였죠. 적은 7000명 정도. 이들은 현재 영암에 있는 달량성을 포위 공격합니다. 이 때 장흥 부사 한온, 해남 현감 변협, 우수사 김빈, 진도 군수 최인 등이 구원하러 갔는데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각기 이삼백 수준이었습니다. -_-; 농성의 한계에 이른 조선군은 화의를 요청하지만 그걸로 힘이 다했다는 것을 알게 된 왜구들은 총공격을 실시하고 절도사 원적과 장흥 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게 됩니다. 한편 수군도 패하면서 적은 사납게 날뛰게 되죠.
이후 강진의 이희손, 한온 대신 장흥에 온 이수남 등에서 수천의 병력이 모였습니다만 장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쳤고 왜구는 무혈입성하며 약탈을 하죠. 40년 후를 보는 거 같죠? 이후 전주 부윤 이윤경이 영암성으로 가서 힘껏 싸워서 겨우 이기고 수군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적은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도주하는 적의 뒤를 제대로 치지도 못 했죠. 이 때 강진을 구원하지 않았던 김경석이 이윤경과 함께 싸워서 공을 올렸다고 상을 주게 되는데 이에 대한 사관의 논평이 이렇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남쪽으로 정벌 나간 장사들이 죄만 있고 공은 없는데도 위로하는 의식을 거행하려 했으니 은혜를 팔았다는 기롱을 받게 된 것이 당연하다. (1555년 6월 3일)
칠천의 병력 때문에 이준경 (위에 나온 이윤경의 동생입니다) 을 주축으로 한 토벌군이 만들어지고 역시 호남의 병력이 없다고 충청도의 병력을 파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장수들은 도망쳤고 왜구들은 나주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였죠. 이후에 나온 왜구의 침입 중 볼만한 것을 하나 뽑자면 1587년 손죽도 침입인데, 여기서 녹도만호 이대원이 수사 심암의 명령을 받고 힘껏 싸우지만 심암은 지원군을 보내지 않습니다. 미워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거 참... 이대원은 장렬히 전사하고 후에 심암은 참형을 받죠.
3. 장수를 믿을 수 있는가
저번 글에서 을묘왜변 이후로 조선의 국방이 크게 성장한 것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바꿔 말하면 을묘왜변은 조선의 국방력이 어땠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죠.
일단 진관제의 허실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각 진의 병력은 수백에서 수천 수준. 하지만 각개격파 당하면서 칠천이라는 병력에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수군은 패하면서 왜구에 맞설 만한 제대로 된 전함을 필요로 하게 됐죠. 호남이라면 분명 곡창지대이며 최전방. 하지만 조선은 칠천명도 제대로 상대 못 했고, 이들은 "서울까지 치고 가겠다"는 협박까지 하게 됩니다. 실제로 오진 않았지만요.
장수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이렇게 도망친 이들도 나중에 싸운 공은 있다고 상을 줘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후 저번 편에서 말한 업그레이드 된 무기체계로 나름 맞서 싸웁니다만, 을묘왜변 이후는 정말 소규모의 게릴라였죠.
제승방략을 저번 편에서 얘기하면서 충분히 괜찮은 시스템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수백씩 각개격파 당하고 다시 중앙군 모아서 내려가서 토벌할 바에야 애초부터 병력 모으고 중앙에서 장수 오고 하는 게 낫죠. 소규모야 진관제처럼 알아서 처리하구요. 하지만... 제승방략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습니다.
장수가 서울에서 파견된다는 거죠. 사실 을묘왜변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서울까지 오니뭐니 했지만 전라도 내에서 놀았고 그나마도 해안가였죠. 그렇게 지방 수령들이 맞서는 동안 후방에서 큰 위협 없이 병력을 모을 수 있었고 장수도 편히 내려올 수 있었죠. 하지만 임진왜란은? 적이 경상도도 제대로 장악 못 한 상태에서 그냥 서울로 무작정 진격했죠.
조선은 대대로 지방 군벌을 경계해 왔습니다. 특히 변방의 호족들을 최대한 경계하며 힘을 약화시켰죠. 그나마 그 지역 향리들의 친인척을 장수로 앉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마저도 세조 때 없애 버립니다. 대신 신숙주 등 중앙 인사들이 파견되었죠. 그것도 세종 때의 김종서처럼 상을 당하든 말든 쭈욱 앉히는 게 아닌 (왠지 불쌍하네요 ㅠ) 계속 바꾸면서 군사력을 집중하는 걸 막았죠. 그나마 선조 때는 신립, 이일에게 힘을 꽤나 실어주긴 했지만요.
삼도수군통제사는 임란 이전에는 없던 직책입니다. 각 수영이 연합한다는 것 자체가 계획에 없었죠. 때문에 이순신은 저 멀리 도망치는 정부의 재가가 떨어지기 전까지 (물론 명령은 김수가 내렸지만요) 대기해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통제사는 어디까지나 삼도 수군의 대장일 뿐 제대로 지휘권이 없었고, 이순신이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닌 각 수영이 연합해서 작전하는 방식은 똑같이 진행되었습니다. 확실히 지휘권을 가진 건 임란 이후였죠. 북방의 여진족과는 달리 왜구는 대마도를 정벌하면 상당히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그것도 행해지지 않았죠. 각 왜변 등에서 대군이 밀집하게 된 것은 시스템이 아닌 임금의 특명이 있어야 가능했고, 용인 전투에서 5만이 모인 것은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서 그랬던 거구요. 이후 전군에서 가장 많고 강력한 단일부대를 거느린 이순신은 끝없는 견제를 받아야 했고 의병장들은 그 공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 했습니다.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 이징옥의 난 등 북방의 군벌들이 벌인 일이라 할 만한 난들을 겪은 이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시애의 난은 향리의 자제를 등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이 컸죠) 거기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동북의 군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한 장수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주지 못 하는 것은 전면전에서 대군이 만들어지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상주에서 사만이 모였다는 것은 찾지 못 하겠네요. 그냥 모였다가 흩어졌다는 말만 있지 정확한 수치를 찾기 힘듭니다. 난중잡록 찾아보긴 했는데... 하아 또 하나하나 뒤져봐야 되나요 ㅠ 조만간 징비록 보러 도서관이나 다시 가야겠네요. -_-;
4. 사람들의 인식
엔하위키에 재밌는 말이 있더군요. 징비록에 "우리 마을 앞에 개천이 있는데 나룻배 없이는 건널 수 없으니 설마 적이 쳐들어올 수 있겠느냐?"고 류성룡에게 직접 따진 사람이 있습니다. 안동의 향리였다는군요. -_-; 에 뭐 제가 징비록 직접 찾아봐야 알 테니 일단 그런 말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구요. 이게...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선조의 전쟁 준비 명령에 다수의 식자층이 반발합니다. 김성일은 시폐 10조를 계속 올리고 단 몇 개월만에 전쟁 준비는 공식적으로 중지됩니다. 백성을 괴롭힌다, 군량이 부족하다 (그 군량을 쌓아 두면 흉년에 풀 수 있는데 왜 쓰냐 등등) 는 말들이었죠. 이미 성종 때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유학자들의 반발이었습니다. 조광조를 시작으로 한 사림들도 그냥 방비만 튼튼히 하면 되지 왜 병력을 많이 양성하려고 하느냐고 계속 딴지를 걸었죠.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인식은 위와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을까요.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이 만약 사실이라면 왕은 당연히 "상비군 있으면 그 장수 군벌 되니까" 반대일 거고 신하들은 "상비군에게 먹일 군량은 어쩌고 고생할 백성들은 어떡함?" 이라면서 반대했을 겁니다. 이게 당시 조선의 상황이었습니다.
전편과 맞물려 생각하면 이걸로 선조에 대한 옹호가 가능합니다. 나름대로 여진을 토벌하고 무기체계를 정비하고 장수들을 등용하고 했겠습니다만, 신권이 강했던 조선에서 이 이상을 나가기는 힘들죠. 당시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30만으로 쳐들어온다는 건 정말 꿈의 영역이었겠죠. 조선시대에는 그런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았고, 오랑캐의 약탈을 당하긴 했어도 그것 때문에 충분히 제도를 바꿨고 방비를 했다고 생각했겠죠. 불차채용으로 장수들을 새로 뽑은 것도 이런 을묘왜변의 전례 때문에 정말 제대로 된 장수들을 배치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이순신이라는 조선을 구할 선택을 하긴 했지만, 당시 거론된 장수 중에 원.균이 있고 하필 최전방이었던 원균과 박홍, 경상좌병사 이각의 행동을 보면 추천한 신하들도 장수 보는 눈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할 수 있는 건 너무나도 적었고, 그 제한 안에서는 정말 잘 해 준 거죠.
에 뭐. 선조 칭찬은 여기까지 해 주죠. 쿨타임 다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을 담아서 바닥까지 긁어 드리겠습니다.
5. 결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요청이나 교린의 필요성으로 통신사를 파견합니다. 태조부터 성종까지 104년 동안 무려 56회나 왔다갔다 하죠. 특히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19회나 보냅니다. 아무래도 고려말 왜구에게 톡톡히 당한 세대, 주적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았던 거죠. 하지만 연산군부터 임란까지 96년동안 통신사가 파견된 건 단 4회입니다.
김성일의 예에서 알 수 있듯 통신사를 보낸다고 그 실정을 확실히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왜변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조선은 통신사 파견 등으로 일본의 상황을 아는 데에 너무 인색했습니다. 결국 일본에 대한 창구는 대마도에서 알려주는 정보 뿐이었죠. 이 책임은 선조도 결코 벗어날 수 없죠.
백성을 괴롭히니 군량이 부족하니 하지만 고려 때 수십만을 동원한 걸 보면 그게 결코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문제는, 조선 200년간 큰 전쟁이 없었던 거죠. 결국 체계는 오랑캐 방비에 맞게 만들어집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 전제왕권이 아니었던 조선의 상황을 보면 전면전 위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었죠. 진관제니 제승방략이니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증명되었듯 전면전에서는 절대 적을 막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거기에 임란 중에도 병적으로 나타나는 조선 왕들의 군벌 억제는 이것을 더 막았구요. 백성들에겐 좋았겠죠. 하지만...
거기에 일본군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인천상륙작전 후 차를 타고 북진한 미군과도 비교할 만한 진격속도였죠. 그것도 경상도 장악도 신경 안 쓰고 무조건 북으로였습니다. 그냥 전면전을 해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정예병들이 최소 15만이었습니다. 물론 장수들이 도망간 것도 크지만 도망 안 갔더라도 북진을 얼마나 저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죠.
옹호가 될지 더 욕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 일본에 대한 정보 모으는 걸 게을리한 건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전면전에 대비하게 시스템을 바꾸는 건 지금 중학생한테 수능 바로 치라고 하는 거와 같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 때 세종대왕이 있었더라도 승리야 했겠지만 초반의 연패는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건 그만큼의 노력과 공감대와, "경험"이 필요하니까요. 어차피 빛과 어둠입니다. 빛으로 보면 전쟁 대비를 했고, 시스템을 바꾸기 어려웠다 이 쪽이지만, 어둡게 보면 정말 준비를 잘 했는데 그렇게 털린 거니까요.
제 결론은 이것입니다. "조선은 전쟁 준비를 상당히 해 왔지만 일본군에게 시스템과 실력 부족으로 초반에 크게 밀렸다. 이것은 당시 조선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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삘 받아서 마구 써버렸네요. 덕분에 댓글 중에 나왔던 얘기들을 확인도 제대로 안 해 보고 일단 제 논지로 밀어붙였습니다. 이 점 알아주시구요. 후에 확인하고 제 입장 정리되는대로 다음 글들에 계속 넣겠습니다. 방군수포는 일단 제가 결론 내리지 못 하겠으니 나이트해머님과 카서스님 토론 열심히 지켜보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에 관한 글도 좀 써주시거나 관련 논문이나 서적 추천해주셨으면 하구요. 아 일단 전 징비록을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_=; 왠만한 책들은 다 고향 집에 두고 왔으니 이럴 때 참 힘드네요.
다음 편은... 제목 고려하다가 (예고편에서는 나라가 망한다라고 했죠) "원숭이의 장난"으로 하겠습니다. 히데요시 별명이 원수이였으니 일본인 비하하는 건 아니구요. 쥐x끼의 장난도 되겠지만 ( 노부나가가 히데요시 부른 별명 중에 대머리생쥐 있었고 김성일도 쥐 같다고 했죠 ) 이건 좀 아닌 거 같고...
할 말이 꽤 길어질 거 같으니 다음 편에서는 일본의 스타일 최대한 말 하는 쪽으로 가고 조선 얘기 가기 힘들 경우 글을 하나 더 쓰겠습니다. 주요 주제는 임진왜란 극초반 전역입니다. 신립에 대해서도 할 말 많은데 거기까지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정말 애매한 결론이죠? 옹호하는 건지 더 욕 하는 건지... 아마 장수들이 도망가고 병사들의 훈련도가 떨어지는 걸 경험 부족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옹호일 거고, 아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훈련했다면 잘 맞서지 않았을까 한다면 욕이 되겠죠. 어느 쪽인지는 각자 판단인 것 같습니다.
여담이 길어지네요. 쓰면서 생각이 든 건데 조선이 준비를 안 했다는 쪽으로 꽤 몰고 간 징비록 같은 경우 정말 선조를 옹호하기 위한 왜곡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은 준비하려고 하는데 간신들이 막았다는 쪽으로 몰 수 있으니까요. 거기다 정말 전쟁 준비를 위해 쓴 책이니만큼 경각심은 더 일깨워 줄 수도 있구요. 거기다 상대가 하필 오랑캐 왜놈인데 잘 준비해놓고 졌다고 하면 쪽팔리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