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1/03/21 20:05:09
Name 빈 터
Subject [일반] 악 몽 (惡 夢)
이건 악몽이다. 아니, 악몽이어야만 한다.

가끔씩 누군가 내 인생을 진흙탕 속에 쳐박아 버릴 때가 있다.
그런 일은 처음엔 대단히 사소한 일에서 출발하다가
나중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힘으로 쳐박아 버린다.

실수였다. 우리가 처음부터 서바이벌을 얘기하고 탈락의 살떨림을 강조했던 것은.
처절한 생존게임이 아니어야 했다.
흥겨운 놀이 뒤의 유쾌한 벌칙이어야 했다.
그랬다면 탈락당하는 당사자들도 그렇게까지 큰 정신적 대미지를 입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청률이라는 황금에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 곳에 악몽의 불씨가 숨어 있었다.

김건모의 탈락. 의외였다.
하지만 건모가 아닌 그 누가 탈락한다 해도 의외였을 것이다.
그래도 하필이면 건모였다. 하필이면.

내 입에서 "김건모"라는 이름이 떨어졌을 때
녹화장 안은 한순간 시간이 정지해 버렸다.
모두들 지금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현실감 없는 눈으로 그냥 멀뚱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찰라인지 억겁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이란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임을 깨닫자 마자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이건... 아니야..." 들릴듯 말듯한 혼잣말을 흘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 밖엔.

그가
같이 무대에 섰던 모든 이들에겐 우상 같은 존재이고
또 하늘처럼 우러렀던 대선배이자
누구나 인정하는 참된 가수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 가서 위로하고 토닥거리며 이 어려운 상황이 그래도 현실임을 일깨우고
떠나는 길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 일을 건모가 나서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선 누구도 이것이 현실임을 깨우쳐 줄 사람이 없었다.
감히 하늘같은 선배의 등을 토닥거려 주기엔 현실은 너무 무거웠다.
그 어색한 순간의 정적을 깨는 책임은 오로지 김건모 하나에게만 주어졌지만
후두부를 강타당한 건모는 이미 판단력이 상실된 후였다.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돈 건모의 어눌한 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마음의 짐을 지워 주었고 이것이 악몽의 시작이었다.

이 때, 관록의 힘인지 심성이 여리지 않아서인지 명수가 나서서 사태의 흐름을 잡으려 시도하였다.
탈락이 기정 사실임을 모두에게 인지시키고 그것을 공식화하려 한 것이다.
마침 소라가 히스테리칼하게 반응하지만 않았다면 악몽은 여기서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라는 그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여유로운 멘탈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녀는 그런 현실의 부조화를 견디기에는 너무 예민한 심성을 갖고 있다.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정상적인 방송을 하기 힘든 상태이기에 그것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멘탈이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공황상태를 무시하고 계속 진행했으면 그녀는 분명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악마는 그녀를 이용해 우리를 조롱하고는 또다시 새로운 유혹을 던졌다.
마음 약한 제동이로 하여금 타협안을 제시하게 만든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제동이가 그런 타협안을 제시해선 안되었다.
그러나 제동이는 그런 인간이다. 잔인함을 견디지 못하는.
그는 그 견딜 수 없이 참혹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악마의 유혹인줄 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성을 되찾아 가던 건모가 그런 흐름을 되돌리려 하였다.
그는 매우 쓰라리지만 현실을 인정하려는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이 악마의 노림수였다. 인간의 약한 면을 꿰뚫어본 가장 간교한 노림수.

건모가 차라리 이것을 부정했다면 아니, 그냥 침묵했더라도 나는 어떻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건모는 스스로의 소멸을 인정하려 했다.
잔혹한 현실 앞에 순순히 목을 드리우려 했다.
결국 난 건모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모든 걸 걸어버렸다.
- 그래. 건모야. 너는 그렇게 사라져야 할 가수가 아냐.
  이게 옳은 건진 나도 몰라.
  하지만 너를 지키는 것에 내 방송생명을 걸어야 할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악마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잠깐만요"

사라져 가려는 건모를 이렇게 붙잡아 세운 이후부턴 바뀔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내세운 원칙을 져버려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비껴가려는 순간 우리 앞에는 파국만이 있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까지 와서 다시 건모를 내팽개친다는 것은 그를 두번 짓밟는 것이다.
난 내 목을 조여오는 거대한 악마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마지막 한가닥 희망을 건모에게 걸어보기로 했다.
재도전의 기회를 건모가 선택하게 한 것이다.

누군가는 비겁하다 할 것이다.
차라리 당신이 결정하지 왜 그 책임을 가수에게 던지는가 하며 침을 뱉을 것이다.
맞다. 난 비겁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은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 참혹한 상황 앞에서 난 지극히 소인배의 선함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그러고선 그 소인배의 선함이 가져 올 후폭풍이 두려워 건모가 그 폭풍을 멈추어 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악몽은 절대 중간에 깨지 않는 법.
헤어나려 하면 할 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이 악마가 펼쳐놓은 팔괘진이다.
그 혼돈과 황망함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출구를 찾아나가는가 싶던 건모는
그 역시 그 결정의 책임을 혼자 지기엔 버거웠는지 창환이에게 연락했고
악마는 그를 통해 유혹한다.
"네가 결정하지 말고 같이 했던 동료들에게 결정하라고 해"

아...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 버렸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선 이후엔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가버린 것이다.
처음엔 사소했던 것 하나가 점점 더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결국 어떤 힘센 거인도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짓이겨 버렸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저 팔려가는 개처럼 자신의 검은 운명 속으로 한발씩 끌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모든 것은 끝나 버렸다...













ps.1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그냥 그 사건을 통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네요.
ps.2  모든 것은 픽션이며 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가 임의로 내린 것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미스터H
11/03/21 20:1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참... 누군가 책임을 저버린것때문에 결국 모두가 공멸하게 되네요. 이번 사태의 일본정부와 오버랩 되는것 같습니다.
AntiqueStyle
11/03/21 20:34
수정 아이콘
공감이 많이 되네요.
누군가는 탈락한다는 달콤하고도 가벼운 호기심에 뒤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몰입해서인지 누군가가 특히, 국민가수 김건모가 탈락한후 누구도 어쩔수가 없었죠.
일요일 7시의 황금시간대에 일어난 10여초간의 침묵. 적막.
그 충격을 예상 못했으니 도저히 감당할수도 없었던것 같습니다.
탈락후 그의 표정. 20여년간 어떤 방송에서도 그런 표정은 처음 본것 같습니다.
당황했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게 정말인가?
정말 민망하고 안쓰러운 표정이었죠.
누군가가 탈락한다는 가벼운 호기심과 흥분이 이렇게 불편하게 다가올지 정말 몰랐네요.

그렇게 경황없고 넋이 나간 상태에서 상황이 너무 빨리 돌아갔죠.
동료와 연출자들의 설득(?)과 공연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그를 냉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게 한듯합니다.
차라리 좀더 시간을 주어 장고했다면 그는 냉정하게 판단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몰입했던 프로였는데 많이 아쉽습니다.
11/03/21 20:35
수정 아이콘
악마의 유혹으로 넘겨버리기엔 여태껏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가수라고 생각하며 이십여년간 죽어라고 그 들의 음악을 들어온 2명에게 당한 배신이 너무나 깊네요.
당신들을 좋아하는 내 수준이 그 것밖에 안되서 미안하오.......
Inception
11/03/21 20:36
수정 아이콘
처음 볼때는 이소라씨땜에 좀 벙쪘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피디잘못 99%인거 같습니다. 출연진도 제대로 컨트롤 못할정도라니;;
갑시다가요
11/03/21 20:38
수정 아이콘
정말 안타깝고....돌이킬수가 없을듯 진짜....후배가수들하고 자문위원들 끌어다가 재도전의 정당성을 말하게 할때 그건 진짜 열받았습니다.
얼마나 억지스러워 보이던지......... 하나같이 재도전은 당연하다는듯이 .......윤도현씨등 자문위원들의 입장을 이해못하는건 아니지만
그러도록 유도했을 제작진이 더 열받음.....
11/03/21 20:53
수정 아이콘
방송 2번더 봤는데,
김제동,이소라씨 결코 잘한건 아니지만 아니 잘못된 행동이었죠.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김건모씨는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재도전을 안했어야죠. 그 상황에서 재도전 이라니요. 답이 없네요.
하지만 이 모든건 PD 잘못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네요. 떨어뜨리는게 충격적이 었다고 재도전 기회를 줍니까? 말도 안되는 립스틱 핑계를 대면서?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PD능력이네요.
참 아직도 실망감이 큽니다. 그만큼 기대를 많이 했었고, 실제로 무대도 굉장했습니다.
굳이 잘 못한 비율을 따진다면 PD=96% 김건모씨=3% 김제동씨+이소라씨=1% 인거 같습니다.
왕은아발론섬에..
11/03/21 21:51
수정 아이콘
사람들마다 보는 시각의 차이가 크네요.
저 같은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김건모씨가 이 정도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지를 모르겠던데...
그리고 pd의 판단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구요.
하지만 저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소라씨의 행동은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그와 더불어 김제동씨 한테도 좀 아쉽구요.

이소라씨 80%, 김제동씨 10%, pd 9%, 김건모씨 1% 이렇게 생각되네요.
낭만토스
11/03/21 22:17
수정 아이콘
어머니께서는 결정 전부터 보시면서 계속
저기서 누군가 한명 탈락되는게 참 이상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니깐 다 쟁쟁한 가수들이라 누가 탈락하는게 이상하다 라는게 아니라
저런 가수들을 데리고 탈락 시키는 포멧자체가 이상하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재미있게 보지만요
11/03/21 22:26
수정 아이콘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기 보다는 그냥 한편의 비극같아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비극 같이 예정되어 있는 운명처럼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가는.
물론 그 와중에 잘못한 사람들이 당연히 있지만 잘못한 그 사람들도 선의를 갖고 했던 일들인데
상황 속에 휩쓸려 가면서 어떤 행동들도 결국은 악이 되어 버린...

어쩌면 최고의 가객들을 모아놓고 누군가를 탈락시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
예정되어 있던 파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성소년
11/03/21 22:28
수정 아이콘
슈퍼스타K도 보지 않았고 위대한 탄생, 나는 가수다도 보지 않지만 제가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정말 놀랐던 것은
'사람들이 노래마저도 경쟁을 통해서 이기는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더 훌륭하다 혹은 그럴 것이다' 라는 단순한 논리가 저한테는 왜 그리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지는지..
냉면처럼
11/03/21 22:30
수정 아이콘
이런 글을 기다렸습니다
역지사지가 되어 조금은 이해해볼 수 있음을
나타내는 글을

잘 읽었습니다! [m]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7923 [일반] 애플 아이폰 VS 삼성전자 스마트폰 CF 역사/비교 [20] Alan_Baxter6297 11/03/22 6297 0
27921 [일반] 추억의 락 그룹 Focus [1] 강력세제 희더4239 11/03/22 4239 0
27920 [일반] 100년 같았던 하루..(성인분들만 읽어주시기 부탁합니다.) [111] 후리13381 11/03/22 13381 0
27919 [일반] <나는 가수다>의 현 상황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27] 산타5904 11/03/22 5904 0
27916 [일반] 여러분의 PGR21 가입일은 언제 이십니까? [115] 삭제됨3823 11/03/22 3823 2
27914 [일반] 온라인투표에서도 박근혜 의원이 1위네요. [56] 아우구스투스6732 11/03/21 6732 0
27913 [일반] 악 몽 (惡 夢) [14] 빈 터4395 11/03/21 4395 1
27912 [일반] 재 트위터에서 이슈가 되고있는 어떤 뉴스 [44] 난 애인이 없다8291 11/03/21 8291 0
27911 [일반] [EPL]달그리쉬와 수아레즈가 기적을 만들 수 있을까요? [47] 아우구스투스6346 11/03/21 6346 0
27910 [일반] 클래식 기타 배우기... [8] 마실9449 11/03/21 9449 0
27908 [일반] 나는 7ㅏ수다 재도전 사태를 무마할 해법 [96] 네로울프9924 11/03/21 9924 0
27905 [일반] [해외축구/수정] 세리에A 30라운드가 끝났습니다. 인테르는요.. [30] 삭제됨5418 11/03/21 5418 0
27904 [일반] 쇼하고 있는 쇼 같지도 않은 쇼 <나는 가수다> [41] 王天君10762 11/03/21 10762 0
27903 [일반] 스마트폰 구입 과정, 한달간 이용기, 베가x리뷰, 맛폰관련 잡담 [26] 화잇밀크러버8407 11/03/20 8407 0
27902 [일반] [음악] 간만에 음악이나 들어봐요. 오디션프로그램 보다가 생각난 노래들 [8] 코리아범5071 11/03/20 5071 0
27901 [일반] 오늘의 EPL 선더랜드VS리버풀//첼시VS맨시티 [50] 낭만토스4888 11/03/20 4888 0
27900 [일반] "나는 가수다"의 등장 매커니즘. [99] 논트루마9514 11/03/20 9514 1
27899 [일반] [농구] KBL 정규시즌 종료-KT 역대 한시즌 최다승 경신 [19] lotte_giants4751 11/03/20 4751 0
27897 [일반] 나는 가수다! 개인적으로 오늘 1위는... [42] 네로울프8814 11/03/20 8814 0
27896 [일반] '나는 가수다' 다음 무대가 기다려지는건 저뿐인가요..? [53] 헤헤헤헤7224 11/03/20 7224 0
27894 [일반] 나는가수다 재녹화설이 유력하네요 [46] 니드11113 11/03/20 11113 0
27891 [일반] 기획의도만 좋게 되버린 '나는 7ㅏ수다' [253] BraveGuy8867 11/03/20 8867 0
27890 [일반] 프야매를 접었습니다. [17] kiraseed4918 11/03/20 4918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