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뭔가 '대단한' 일을 하기 전에 하는 몇 가지 준비운동이 있다. 준비운동의 양과 질은 가히 SK 와이번스와 비견할만하다. 우승 이후로 한동안 뻘짓. 공포의 지옥훈련. 그 와중에 시즌이나 훈련이나 공평한 부상. 언제나 나만큼 잉여한 쇀카우터. 명불허전 시범경기. 와 비슷한 막장시퀀스. 이를테면 일주일쯤 하루에 열시간씩 투기장을 돌고 나서(저녁마다 내 팀과 SK의 두명분의 분을 삭히며 술을 마신다), 백년전에 백오십번 읽어서 대사 뿐 아니라 작붕이 있는 컷의 위치까지 외워버린 만화를 두세질 정도 다시 읽고(보통 그것은 한질에 10권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이를테면 이토준지 호러컬렉션이거나 유키카오리의 장편이 되곤 한다), 그 다음에 내 영원한 마음속 디바 히나 오츠카의 작품을 평안한 마음으로 관람하며 폭딸. 여기까지 한 이주일 걸리고, 눈팅하던 커뮤니티 몇 개에 몇 개의 너저분한 글을 올리고,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그리고 작업시작.
2. 안타까운 점은 SK나 나나 준비기간의 막장퀄리티는 공유하지만, 실제 경기의 퀄리티는 천양지차라는 것. SK는 그러고 우승을 하고, 나는 그러고 본경기를 말아먹는다.
3. 라는 확실한 직감이 들었다. 15분쯤 전에. 질게에서 답글버닝하다가. 완벽하게.
4.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두 개 있다. 아니,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랬으니 정정한다. '했어야 할 중요한 일이 두 개 있다.' 물론 하나의 듀타임은 내일이고 하나의 듀타임은 다음 주 중이지만. 물론 하나의 듀타임은 한달쯤 전에 발표되었고, 다른 하나의 듀타임은 보름쯤 전에 발표되었으니 사실 둘다 이미 되었어야 하는건데.
5. 보다 말을 똑바로 하자면 엄밀히는 네개였는데, 두개는 말아먹었다. 어차피 둘 다 본업에 심대한 지장을 주는 건 아니니 말아먹어도 괜찮아. 라고 자위하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 솔직히 말하면 심대한 지장이 있는데 있는데 한화에 정원석이 있는데 있는데 한화에 있는데.
6. 올해들어 네 번쯤 병원에 갔다. 앉아서만 일하고-기획서쓰기, 연구보고서, 번역-앉아서만 쳐놀다가-와우, 홀덤, 술, 담배, 프풋-돼지처럼 살이 찐 덕에 허리에 무리가 와서 침맞으러 한번(모짜르트 녹차돼지, 이런식의 프랜차이즈로 막장대학원생식 입식돼지, 이런 프랜차이즈를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눈병나서 한번. 감기몸살이 전신의 신경을 죄어들 지경이 되서 한번. 비슷한 이유로 또 한번. 병원에서 몇 번 기본적인 바이오마커 검사를 했는데, 전부 '지금 허리/눈병/감기몸살이 문제가 아니라 빨리 내과 가서 혈압약 받아오셈 죽기 싫으면'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죽기 싫으니 가야될텐데. 뭐 이것도 나름대로 준비운동이라면 준비운동 아니겠습니까. 대단한 일이 두 개가 있는데.
7. 근데 가만보면 나만 막장인게 아니라 묘하게 안심이 가는게 있다.
주식폭발로 또 얼마 날려먹은 친구 모군(들). 박사진학 원서접수까지 남은 텝스가 한번 남았다는 사실에 대좌절중인 모양. 전세값 폭등으로 하루아침에 통장잔고가 두자리수 바뀐 모양. 월급 따박따박 나오던 직업 그만두고 본격 자기세계를 탐험하다 세달만에 정신차려보니 전세사는 것도 아닌데 통장잔고 자릿수가 하나 날아간 모군. 올해는 GRE 몰빵이다 하며 겨울에 열심히 해두고 봄에 일본에서 시험쳐야지, 하다 일본지진과 함께 계획이 날아간 모군. 아니 그보다 당장 바로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친구의 친구 모양과 번역가 모누님. 두어달 전에 아버지가 쓰러져서 하던 순수예술 때려치고 상업예술판 기웃되는 모군. 바람피기에 대한 진지한 고찰 끝에 '그래도 난 지금 사귀는 누나가 좋은 것 같아. 올해는 결혼 준비 들어가야되나'라는 결론에 이르렀으나 삼일 뒤에 그 누나와 헤어진 비운의 대기업 회사원 모군. 소액창업한다고 깝치다가 현실의 쓰라림에 위액을 걸걸하게 토해내고 있는 후배 모군. '야 나 업무적으로 상담받을꺼 있다 주말에 한잔하며 이야기좀 하자'란 나의 문자에 '나 주말 양일 풀타임 확정에 야근은 덤이요' 라는 답문을 보낸 디자이너 모군. 러시아어가 능수능란한 고학력 구직포기자 모군.
8. 다들 그냥 인생을 국밥처럼 말아먹는게 아니라, 뭔가 엄청 대단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 중일꺼야. 라고 믿어야지. 20대 후반이라는 게 그런 나이 아니겠어. 뭐, 나처럼 준비만 뻑쩍스레 괜히 바쁜척 이거저거 하다 다 말아먹는 녀석도 있을꺼고, 전부 다 잘 될 녀석도 있겠지만, 뭐. 어쨌거나 너도 힘든 꼴 보니까 나도 힘이 좀 난다. 그러니 너도 내가 힘든 꼴 보면서 힘좀 내도록 해.
9. 역시. 이제 준비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적당히 어디가서 혼자 주절거리기'가 끝났으니 기획서 두개 쓰고 자야지, 라고 생각한 바로 그 타이밍에 전화가 오는군. 난 안될꺼야 아마. 나루토를 안봐도 그건 알아. 하지만 받을 수가 없네. 아, 책임감이 넘쳐흘러서 오늘은 꼭 끝내고 자야지 이런 건 아니고, 역시 넘버링한 글은 10번까지 끝내지 않으면 영 찝찝한 것이...
10. 인생은 힘들거나 한심한 것 같은데, 한심한 것보다는 힘든게 낫지. 나도 한심한 준비운동을 좀 정리하고 이제 슬슬 힘든 메인 게임을 제대로 진행해야겠어. 힘든 친구 A야. 한심한 친구 B야. 뭐가 어찌되었건, 이제 3월인데.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 봄이라고. 좌황사 우낙진의 꿀같은 풍수 속에서, 너도 나도 어쨌거나 되는대로 잘 해 보자구. 서른 살엔 이거보다 나아지겠지. 아니면 뭐 할 수 없고. 뭘 할 수 있어서 스무살이 되었던 기억은 없으니까. 아무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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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이란 시간은 참 묘한 것 같죠. 저도 20대 후반에 이른 지금 아무것도 해놓은게 없는 것 같아서 초조하고 떨리고, 저 친구들의 에피소드가 마치 내 일인양 느껴지는 위치라 이글이 콕콕 박해오네요.; 하하하.
힘내야죠. 헥스밤님도 힘내시고, 저도 힘내야죠. 뭐 어쩌겠습니까. 그런게 인생인것을. 20대가 지나도, 30대라고 봄이 오진 않겠지만. 지금 제가 메신저에 걸어놨듯 '인생에서 충격과 좌절과 공포가 없는건 언제일까?' 라는 질문을 다시 곱씹네요. 그게 드물기 때문에, 희망을 찾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힘들어도 술한잔으로 기댈 수 있는것 같아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