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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3/12 04:54:43
Name 이웃집남자
Subject [일반] 바람이 분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겨울 바람이 아프게 차갑다.
장갑 낀 손으로 코트 깃을 여미고, 목을 칭칭 둘러 싼 목도리 속으로 바람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이제 조금 낫나 싶은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번에는 목도리에 날숨이 닿아 생긴 습기 때문에 썩 유쾌하지 않은 축축함이 묻어났다.
거기다 또 긴 생머리가, 그 중에서도 유난히 앞머리가 바람에 팔락이는 것이 영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웠다. 누가 보고 '미친년 머리'라고 손가락질하며 웃기 전에 묶든 빗든 어떻게든 서둘러 정리를 하고 싶었다. 다시 목도리 안에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잠시 뭔가를 찾는가 싶더니 곧 찾았다는 듯이 그리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최근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커피 전문 프랜차이즈였다. 어서오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라며 환하게 웃는 아르바이트 학생 앞에서 그녀는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유자차를 골랐다. 카페인을 마시면 두통에 안 좋다는 소릴 의사한텐가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유자차로 주세요. 그나마 차를 마시면 커피보다야 낫겠지 싶었다. 작거나 큰 것 중 어느 사이즈로 드릴까요? 큰 사이즈요. 머그잔에 드릴까요? 네, 머그잔이요. 계산은 뭘로 해드릴까요, 할인 적용되는 카드나 포인트 적립 카드 있으세요? 여자는 현금으로 계산한다고 했으며 그런 카드는 없다고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그 나이 또래의 여대생답게, 여전히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현금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뇨, 필요 없어요.


여자는 영수증과 동그랗게 생긴, 그러니까 주문한 유자차가 나오면 부르르 진동하는 그 것을 받아들고 카운터에서 적당히 떨어진 적당한 자리 쯤에 슬쩍 걸터 앉았다. 곧 유자차가 나오게 되면 좀 더 편한 자리로 옮기리라 하며. 가게 안은 따뜻한 공기가 맴돌았고 그 공기 속에 진한 커피 내음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누군가의 재즈 연주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가게 안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여자는 슬몃 목도리를 풀고 이제부터 뭘 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일단 회사에서 나온 뒤 걷고 싶어 무작정 걷기야 했지만 썩 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평일 오후에 보통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뭘 할까? 미용실에 가서 머리나 해볼까, 아님 입을 옷도 없는데 쇼핑이라도 할까, 아 이번에 새로 나온 영화가 있다는데 그 거나 볼까. 여자는 속으로 이 것 저 것 재보다가 문득 부르르 진동하는 그 것을 들고 가 아르바이트 학생에게서 유자차를 받았다. 두 손으로 유자차를 꼭 쥐고 이번에는 가게 한 켠에 있는 흡연석으로 향했다. 창가 쪽으로 자리를 정하고 목도리와 유자차를 내려놓고는 다시 재떨이를 가져와 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우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유자차를 호로록 마신다.

달콤한 맛과 뜨거운 열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입에서 목구멍을 넘어 달콤하고도 뜨거운 그는 그녀의 몸에 마저 남아있던 냉기를 모두 털어주는 듯 했다. 여자는 유자차와 가게 안의 평화로움이 주는 안락함에 의자의 등받이 조금 더 깊숙한 곳에 몸을 묻고 잠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바람이 불다 말다 한다. 한 번씩 바람이 불 때 길을 걷는 여자들의 긴 머리카락이 팔락팔락한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그녀들의 머리카락은 위로 솟구쳤다 곡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이내 뚝 떨어진다. 그 모습이 꼭 봄처녀들의 하늘하늘한 긴 치마 자락 같기도 하고 넘실넘실대는 성난 바다의 파도 같기도 하다. 개중에는 까만 치마 자락도 있었고 노란 성난 파도도 있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머리 색이 이렇게 다양했을까. 그런데 저 머리 가운데 백발은 왜 없을까?

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핸드폰의 검은 화면에 비추어 머리를 여기저기 비추어보자 역시나, 생각했던대로 머리가 엉망이다. 손으로 대충 털어도 보고 빗어도 보고 하지만 금방 정전기 때문에 도통 머리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 그냥 체념하기로 했다.





"저어, 미안한데……."
"뭐가요?"
"우리… 이제 이런 식으로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

시작부터 알고 있었던 마지막이지만 정말로 그 것과 맞닥뜨리는 순간은 참 불편하기 그지 없다. 만남에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을 선고 받는 것은 어떤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주한 마지막에게 느껴지는 첫 감정은 섣불리 뭐라 말 하기가 어렵다. 처음 이별을 했을 때는 비교적 쉬웠었는데. 처음 이후로 겪는 반복된 이별들은 점점 슬픔의 색이 옅어져 가는 것을 스스로도 또렷히 느낄 정도였다. 그러다 반복된 이별 속에서 분노나 적개심도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들더니 그마저도 옅어져 이번에 맞닥뜨린 마지막 선고의 순간은 그저 불편함. 저 작게 쪼그라들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나에 대한 미안함, 외도를 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우물쭈물하고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변명하는 남자를 보는 이 순간이 그녀는 참 불편했다.

"그게… 물론 나도 좋아서 만난 거지만 나는 와이프도 있고……."
"네, 그만 만나요 우리."
"뭐?"

여자는 재떨이에 담배 끝을 꾹꾹 누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새벽 세 시에 직장 상사이고 유부남이고 방금 전만 해도 내 위에서 거칠게 숨을 쉬던 벌거벗은 남자에게서 선고 받는 마지막을 받아들이기엔 꽤나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여자는 담담히 블라우스 위에 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을 들었다. 명백하게 떠나겠다는 의도로서의 행동이었다.

"아 저기……."

남자는 허둥지둥 일어나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푹 떨구고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미안하면서 고마운 건 또 뭐예요."

여자는 되려 씩 웃어보였다. 남자는 이제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꾸벅꾸벅 감사를 한다.

"고마워, 고마워 경희씨. 나는, 나는……."
"아녜요. 앞으로는 와이프 분한테 좀 잘 해주세요. 딴 여자 그만 만나시구요."
"응 그래야지. 고마워 경희씨, 고마워."
"됐어요 이제 그런 인사는. 그럼 저 먼저 가볼께요."

여자는 반복된 남자의 꾸벅거림에 슬슬 짜증이 나는 것 같아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저기 경희씨. 우리가 만났던 일들은 아무한테도… 응? 알지? 경희씨 믿는다?"

쿵 하고 닫히는 문 너머로 기어이 비집고 새어나온 남자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목덜미를 콱 낚아채 제멋대로 흔드는 것 같았다. 저 남자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내가 저를 좋아해서 만난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이별하자는 말을 듣고나서 울며 매달릴 줄이라도 알았을까. 아니면 충격 받아서 회사에, 저네 와이프에게 소문이라도 내는 그런 보복이라도 할 줄 알았을까. 머리가 아프다. 최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두통이었다.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호텔을 나섰다.

우습게도 여자는 그 후로 회사를 그리 오래 다닐 수 없었다. 남자는 회사에서 누가 봐도 아, 저 두 사람 무슨 일 있었구나 하고 짐작케끔 굴어왔다. 괜히 커피를 직접 타다 주기도 했고 마지못해 경희씨 라고 이름을 부를 때는 늘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얼굴이 벌개졌다. 동료들도 점차 무슨 일 있었냐며 추궁했고 그 때마다 번번이 얼버무리거나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선 대부분의 동료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눈치챈 듯 했다. 결국 여자는 동료들에게 다른 회사에서 좋은 제안이 왔다며 덜컥 사표를 내버렸다. 동료들은 다들 무엇 때문에 그녀가 사표를 내는지 알면서도 의례적인 축하와 아쉬움을 담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사표를 받아들던 남자는 역시나 끝까지 그녀에게 불편함을 줄 뿐이었다.

"미안해 경희씨."
"아녜요, 과장님이 미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그래도 괜히 나 때문에……."

알면 입 좀 다물지. 이 정도면 솔직히 따귀라도 한 대 쳐야 하는 거 아닌가 라며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안절부절하면서도 어딘가에 안도감이 묻어나는, 그런 얼굴로 남자는 미안하다 거렸다. 여자는 그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그의 와이프를 본 것 같았다. 일순 찡 하는 통증이 머리를 스쳐지나가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찔아찔한 그 통증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쳐버려 이 것이 정말로 통증이었는지 의심케 할 정도였다.

"…다른 회사로 간댔지? 더 좋은 조건에서면 경희씨도 여러모로 좋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너무 맘 쓰지 말구 가서도 잘 하길 바래."

한 번 더, 찡 하는 통증이 머리를 휘감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다. 머리가 멍 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등줄기가 오싹했다.

"이제 하실 말씀 끝났죠?"

여자는 통증 때문에 더 이상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남자는 무안을 당했다 생각했는지 벌개진 얼굴로 또 다시 우물거렸다.

"어, 뭐 뭐 그렇……."

여자는 우물거리는 남자를 뒤로 한 채 곧장 몸을 홱 돌려 회사를 나섰다. 통증은 계속 되었다.





이상하게도 여자의 기억이 잘못 된 것인지 의사의 조언과 달리 통증은 유자차를 마시고 있어도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온풍기의 미약한 바람에조차 가만히 버티질 못 하고 머리카락은 공중에서 하늘거렸다. 핸드폰에 다시 비추어 머리를 손질해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여자는 조바심이 났다. 머리 속 통증은 그녀를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질 않았고 머리카락은 자꾸만 사방으로  제 멋에 취해 흩어지려 한다. 여자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여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차츰 조바심이 가라앉는다. 통증도 조금씩 잦아드는 듯 했다. 하지만 머리는 어쩌지? 기껏 바깥 바람 피해 들어왔는데도 머리는 여즉 해결될 실마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여자는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아아 그래, 머리끈이 있었지. 왜 이제서야 이 걸 생각해냈을까?
얼마간 뒤적거리더니 마침내 머리끈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머리를 묶으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카페 안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있음에 적이 안심했다.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첫번 째 기억은 늘 면도였다. 아버지는 중요한 경조사에 나서기 전에 꼭 옷장에서 가장 그럴 듯한 옷을 꺼내어 입곤 하셨다. 흰 셔츠 위로 넥타이를 단단히 조여 매었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손질 하셨다. 그리고는 가장 마지막으로 얼굴에 면도 크림을 듬뿍 바르고 면도칼로 슥슥 까뭇한 수염을 깎아내었다. 그러고나서 거울에 파르스름한 수염자국이 남은 얼굴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다 마침내는 만족스러워 하셨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동경했다. 그 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굉장히 엄숙해보였고 심지어 고결해보이기까지 했다. 언젠가 호기심에 면도칼을 들고 덤비다 그만 손가락을 베였을 때 앙앙 울던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의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수염은 남자만 깎는 거야. 여자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꼬박꼬박 말을 했다.

"왜? 나도 하고 싶단 말야."

아버지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말했다.

"남자들은 머리가 짧지?"
"응."
"여자들은 머리가 길지?"
"응."
"그래서 남자들은 턱에 수염이 나는 거야."

여자는 울기를 뚝 그쳤다.

"대신 여자들은 그래서 머리를 묶는 거란다."

지금이야 당연히 시덥잖은 농담이라며 웃어주지도 못 할 말이었지만 어렸던 소녀는 그 말이 굉장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녀는 그 후로 면도칼을 들고 덤비는 대신 머리끈을 들고 덤벼들었다.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는 것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앞머리부터 옆머리, 뒷머리 할 것 없이 머리카락 한 올 빠져나오지 않게끔 모아 정갈히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성공한 남자의 면도와 같은 여자의 머리 묶기는 반듯하게 드러나는 하얀 이마와 발간 귓볼이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지만 참 좋았다. 곧장 아버지에게 달려가 머리를 묶었노라고 자랑을 하자 아버지는 또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던 소녀는 자신의 작은 온 몸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품 안이 좋아 눈을 꼭 감았다. 그 후로 그녀는 머리를 묶을 때마다 늘 아버지의 면도를 떠올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신성한 의식이라며. 동경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하지만 머리를 묶는 의식은 꾸준히 이어져오지 못 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특별한 날이 있을 때만 머리를 묶게 되었다. 그 이유에는 너 머리 묶으면 여자로 안 보여 라거나 머리 묶으니까 너무 쎄 보여, 머리 묶으니까 독해 보인다. 남 몰래 짝사랑 하던 남자도, 별 뜻 없이 흘리듯 말 하던 옛 남자도 하나같이 머리 묶는 그녀의 모습을 썩 달가와하지 않았었다. 저들은 죽어라고 매일 매일 턱에 달린 털을 깎아대면서 나한테는 머리 묶지 말라며 핀잔을 준다고 여자는 속으로 그들을 욕 했다. 물론 면도와 머리를 묶는 것에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릴 적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나. 그녀는 늘 의식의 아주 작은 한 켠에 남자의 면도와 여자의 머리 묶는 것을 동일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입 밖으로 욕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욕했을 뿐.
그래서일까 여자는 그 후로 머리끈에 좀처럼 손을 섣불리 대지 못 했다. 그녀가 머리끈에 손을 댈 때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경조사가 있거나, 시험을 보거나 면접이나 미팅이 있을 때만 그랬다. 그러면서도 머리끈은 늘 주머니에, 핸드백에 넣어두고 다녔다.


서너달 전 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고였다. 상대방 운전자는 혼수 상태에 빠져있다,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여기 사인 좀 해달라.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녀에게로 하여금 정신없는 와중에도 너무 많이 몰아닥치는 말들에 대답을 하게 만들었고 너무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아버지를 야속해할 시간보다도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사인을 요구하는 그네들의 시간이 더욱 촉박해 보였다. 아마 그들도 곧 세상을 떠나려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서두르지. 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덩달아 급박하게 그들의 시계에 맞추어 대답도 하고 사인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했던 것 마냥, 대답과 사인이 끝나자 동시에 등을 돌리고 그녀 앞에서 사라졌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사이좋게 같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그래서 사라진 걸 거다.

여자의 통증은 아마 그 즈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무덤덤하게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조문 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얘기를 나누고 하는, 장례식의 모든 일정이 무덤덤하게 끝나고나서 몇몇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어쩜 여자가 저렇게 독해? 하나밖에 없는 지 애비가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려. 냅둬, 죽은 사람만 불쌍하게 됐지 뭐 저 것도 딸이라고. 애 아빠가 마누라도 없이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저가 알긴 알까. 여자는 그 순간 머리 속이 찡 하는, 최초의 통증을 느꼈다.

여자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상가집 특유의 냄새가 온 몸에 잔뜩 배겨져있는 것 같아 곧장 옷을 벗어 빨래통에 넣고는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새 속옷으로 갈아입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 쇼파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몸에선 부들부들한 로션 냄새가 났다. 어쩐지 신선한 날 것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자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버지가 딸의 잔소리를 피해 몰래 즐겨 마시던 양주도 꺼내와 홀짝 거렸다. 하지만 한 잔 두 잔 마셨는데도 좀처럼 취기가 올라오질 않았다. 여자는 에이, 될 대로 되라 라며 쇼파에 그대로 벌렁 누웠다. 쇼파의 촉감이 볼에 차갑게 닿았다.

머리의 통증은 그 다음 날 쇼파에서 일어난 직후부터 반복적으로, 그리고 늘 불시에 찾아왔다. 일을 할 때에도 길을 걸을 때에도 늘 통증은 찾아왔다. 그 것은 마치 아주 가느다란 철심이 뇌를 쑥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통증이 찾아오면 눈물이 핑 돌고 머리가 멍 해지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 때마다 어금니를 꽉 물어 가까스로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 통증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사들도 별반 원인을 찾아내지 못 했다. 기껏해야 신경성이라느니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라느니 반신욕을 해보라느니 하는 말들이나 해댔다. 식이요법이 중요하다며 채소를 많이 먹고 카페인을 적게 섭취하라고도 했지만 그 또한 통증을 없애주질 못 했고 심지어 완화는 커녕 오히려 심해졌다.

여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법 혼자 살았던 적도 있어 누군가 없는 빈 집에 익숙한데도 불구하고 이 낯설음은 자꾸 이상하게 굴어왔다. 딱히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공허함이라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머리 속 통증만큼이나 낯설음의 이유는 모호했다. 그녀는 결국 집에 들어가봐야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퇴근을 하면 늘 회사나 집 근처의 바에 들어가 술을 한두 잔 마셨고 거기서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의 집에서 종종 아침에 깨어났다. 이상하게도 그럴 때만큼은 좀처럼 통증이 찾아오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이 빌어먹을 놈의 통증은 남자와 여자를 가릴 줄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남자들만 앞에 서 있으면 내숭을 부리 듯 그 모습을 쏙 숨겨서 여자가 혼자 있을 때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 남자들 중 몇 명인가는 선물을 사들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자고 했다. 여자는 딱히 뭐…라고 생각하며 그네들을 만나주곤 했다. 남자들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내밀었고 그 후에는 어김없이 호텔 키를 내밀었다. 그 중에는 얼마 전 자신에게 그만 만나자며 오늘은 아예 회사에서 사표를 내게끔 만든 그 남자도 있었다.





여자는 손에 머리끈을 쥔 채로 유자차를 호로록 마셨다. 회사도 관뒀고 뭘 해야 하나. 학창 시절에는 곧장 집에 돌아가거나 야자 때문에 학교에 있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도서관에,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늘 회사에 있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오후의 텅 빈 공백이 여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뭘 해야 할까 조금 더 고민을 하던 그녀는 목도리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흡연실의 자동문을 지나, 주문을 받고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거울 앞에 섰다. 역시 다시 봐도 머리가 엉망이다. 아니 오히려 거울로 보니 생각보다도 훨씬 엉망이다.

여자는 우선 코트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다시 목도리를 매었다. 그리고 가만히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2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와 마주 서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이내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도 똑같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머리끈 든 손을 올렸다. 거울 속 여자도 손을 들었다. 여자는 차근차근 머리카락들을 하나로 모았다. 앞머리, 옆머리, 뒷머리. 희고 반듯한 이마가, 발간 귓볼이 찬찬히 드러났다. 이쯤에서 묶을까. 여자는 능숙한 솜씨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머리를 묶는 여자의 신성한 의식이 경건하게 치뤄졌다.

이제 거울 속 여자의 머리카락은 하나로 꽁꽁 동여매어져 있다. 여자는 가만히 거울 속 여자를 쳐다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머리를 묶은 탓에 거울 속 여자의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그러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아……."

거울 속 여자도 따라한다. 아…….
여자는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것을 느꼈다. 그 것은 자꾸만 가슴 속을 비집고 나와 어떻게든 자신을 가슴 밖으로 토해내고 싶어했다. 뜨끈뜨끈하기도 했고 뭔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같기도 했다. 그 것을 토해내고 싶음을 꾹 참으며 사라지라고 속으로 애쓰던 여자는 또다시 불현듯 마구잡이로 들이닥친 머리 속의 통증에 몸이 조금 허물어졌다. 결국 여자는 아주 작게, 조그맣게 그 것을 토해냈다.

"아."

거울 속 여자도 따라한다. 아.
아주 조금 토해냈을 뿐인데 우습게도 가슴 깊은 곳 그 것의 꿈틀거림은 되려 더욱 심해졌다. 여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토해냈다.

(운영진 수정)

거울 속 여자도 따라한다. 썅.
하지만 그 것은 아직도 성이 안 풀리나보다. 점점 꿈틀거림이 심해졌다. 더 이상은 안 돼. 여자는 입을 다물려 했지만 통증이 오늘따라 멈추질 않고 계속된다. 자꾸만 머리 속이 두근두근 요동치는 것 같다. 얇고도 날카로운 무언가가 머리 속을 후벼파내는 것 같았다.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이젠 막을 수가 없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얼핏 쳐다 본 거울 속 여자도 꽤나 괴로워보였다. 어서 날 토해내달라며 꿈틀거리는 가슴 속 그 것의 발버둥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머리 속의 통증과 가슴 속의 꿈틀거림이 교차로 빠르게 들썩거렸다.

(운영진 수정)

여자는 점점 크게 가슴 깊은 곳의 꿈틀거리는 그 것들을 계속 꾸역꾸역 힘겹게 토해냈다. 이제는 거센 폭풍처럼 몰아닥치기 시작한 통증도 꿈틀거림도 감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운영진 수정)

여자는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 입을 한껏 벌리고 온 몸으로 모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바닥에 주저 앉아버리는 찰나에조차 수도꼭지를 돌려 여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수돗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쏴 하는 큰 소리를 내며 툭 터지듯 콸콸 쏟아져 나왔다. 막혀있던 것들이 폭발하듯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물방울들은 세면대에 부딪쳐 튀어올라 바닥으로도 뚝뚝 떨어졌다.
화장실 바닥이 금세 젖어 들었다.
하얀 바닥이 물에 또록또록 젖어든다. 조금 많이.


***
본의 아니게 요 며칠 전 나는 가수다의 이소라 님이 불렀던 곡과 같은 제목이 되어버렸네요.
그래서 제목을 바꿀까 말까 몇 번이나 고민해봤지만 결국 그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혹시 이소라 님의 바람이 분다로 알고 글을 누르셨다면 죄송합니다.
글이 앞 선 두 글보다 조금 길어져서 과연 이 글이 다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만일 올라가지 않는다면 내용을 잘라내거나 해야겠지만 될 수 있으면 온전히 올라갔으면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일본의 지진에 대해 위로를 전합니다. 진심으로 부디 큰 피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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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그랬죠
11/03/12 09:41
수정 아이콘
이소라님의 바람이 분다로 알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필력이 상당하시군요^^
바람이 분다를 들으면서 글을 보는데 나름 잘 어울립니다~
잘 보았습니다~
아양쓰
11/03/12 10:51
수정 아이콘
상당한 흡입력이 있는 글이네요.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에 중독되는 느낌을 받을 정도 였습니다.
연재해 주셔두 될듯 합니다.
지금만나러갑니다
11/03/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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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뭔가 우울한 글 잘 일었습니다
아침부터 상쾌하군요^^:;
가치파괴자
11/03/1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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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글 너무 좋아요 ^^
자주 연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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