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는 딱딱하다.
그래서 바에는 꼭 바텐더가 필요하다.
바에 바텐더가 있으면
바는 부드럽게 변한다.
철렁
하고 내려앉는다는게 이런 것일까.
사람은 아무리 주의깊게 살아도 실수를 한다. 카페나 바에서 일하면서 꼭 글라스나 잔을 한번 깨게 되고, 군대에서 꼭 제대로 외운 암구호가 기억이 안나고, 평생보는 시험 중 한번은 마킹을 틀린다. 그리고, 이와 일맥상통하는 맥락으로 나는 술에 의한 실수를 했다.
사람이 드문 드문 앉아 있는 동네의 작은 바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핑크레이디를 첫 잔으로, 알렉산더를 두 번째, 깔루아밀크를 세 번째로 마시고 있었다. 나는 칵테일을 마시지 않고 그저 병 맥주만 두 병째였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내게 살갑게 다가와서는 자신을 좋아했다던 남자들에 대해 약간은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경계심과 기억상자를 알콜이 스리슬쩍 열어준 게 아닌가 싶다.
은은한 불빛, 무표정한 얼굴의 잘생기지 않은, 그러나 깔끔한 머리를 한 바텐더의 뽀득거리는 글라스 닦는 소리. 바닥으로 낮게 흐르는 재즈피아노의 둥기당거림. 그 위를 통통 뛰는 그녀의 약간 들뜬듯한 목소리와 어울리는 반짝이는 눈동자까지.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녀가 떠드는 남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내가 첫 눈에 반했다고 하면 놀랄래?"라고 말해버렸다. 실수했다. 아차.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겨울이 너무 춥고, 주변에는 죄다 커플밖에 없어서 그냥 툭 하고 찔러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그 말에 어떠한 울림도 없을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바의 여신은 꽤 심술궃은지, 장난스럽게 툭 던진 내 무게없는 말을 가지고 그녀를 갑자기 진지한 세계로 끌고 들어가버렸다.
"나한테? 내 어디가 좋아요? 왜 좋아요? 우와! 기분 좋네 이거~"
깔루아밀크가 아직 남은 하이볼글라스. 나는 당돌하게 내미는 그 얼굴을 향해 무슨 핑계를 대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푸하하 하며 웃어넘어가거나, 그럴 리 없다며 투덜대거나, 혹은 태연하게 그럴 줄 알았다며 씨익 웃는, 그런 장난스런 모습밖에 예상하지 않았던 내게 이런 상황은 생소하고 어색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만 말문이 막힌것이다. 피하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내가 먼저 돌아섰다. 맥주를 한모금 삼키고는, 그냥. 이라고 말했다.
"피이, 그냥이 뭐야."
"그냥이 그냥이지 뭐..."
"그럼 이유가 생기게 해줘야겠네?"
"그게 뭔소리..."
내가 마신 첫 깔루아 밀크의 맛은 말랑하고 따뜻한 맛이었다.
말문을 막아버리는 깔루아 밀크, 그리고 나서 그녀는 아무일 없었던 것 처럼 약간의 단맛만을 남긴 채 오렌지 블로섬을 추가로 주문했다.
나는 마티니를 주문했고, 그녀가 헤헤 웃으며 이제 어디가 좋냐고 다시 물었을 때 뻔뻔하게도 잘 모른다고 답했다.
마티니는 오렌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무뚝뚝한 바텐더, 까만색 바, 말랑거리는 깔루아밀크, 마티니를 입술 아래에 머금고 오렌지 블로섬이 뭍은 입술을 탐했던 나. 서로 어떤 감정으로 그랬는지는 지금도 좀 물음표다. 어쩌면 그날은 아마 바의 여신이 장난기가 동했던 날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아침까지 즐거웠음에도,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그녀가 마셨던 네 잔의 칵테일뿐이다. 가끔 그녀가 바의 여신은 아니었을까 하고 피식 웃어본다.
그녀와는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지구 어딘가에서 또 다시 즐겁게 칵테일을 마시며 자신의 남자이야기를 떠들 때 내 이야기도 나올까...
눈을 떠보니 칵테일 연습용으로 사 둔 드라이진이 바닥이다.
칼린스믹서와 토닉워터만 몇병을 섞어 마신거지..
칵테일로 취해서 잠들면, 그 꿈에 나타나는 바의 여신님이 서비스가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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