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공대생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역사란 무언가, 나와 관련이 없는, 저기 멀리 놓여 있는 사실들을 지루하고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과목인 것만 같았습니다. 국사 교과서인지 세계사 교과서인지에서, 역사는 사실입네, 해석입네 하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있는 듯도 합니다만, 순도 100% 남의 나라 얘기였습니다.
역사 공부를 왜 하는지 보다 이해하게 된 것은 대학 들어서 어쩌다 책을 조금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시골 출신입니다. 보수적인 지역이지요. 저는 심성도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한 번 마음에 든 옷을 다음에 또 사는, 그런 성격입니다. 한 번 (정말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친구는 십수년을 그렇게 싸고 돌지만, 못 들어온 사람은 끝까지 들이지 않습니다. 월드컵 때면, 예전에 잘했던 브라질이 지금도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이 한두살 차이나는, 1, 2년 선배라도 깎듯하게 대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제아무리 말도 안 되는 가치 판단이라 해도, 그게 수학 명제나 과학적 진술이 아닌 이상, 반대편에 서서 기괴한 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치 판단은, 그 자체로 옳은지 그른지 보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나이주의를 옹호하던 제 정서가 기댔던 논리도, 그 지평에서만 판단하긴 쉽지 않은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전통적 가치고, 전통이란 지켜져야 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
한데, 1950년 사대부 집안인 홍씨네에 나이 차이가 아비와도 아들과도 8세씩 나는 손님이 있어, 부자 각각과 평교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읽지는 않았고,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역사학자가 각자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 분명합니다. 첫째, 한두살 차이까지 칼날같이 자르는 이 문화는 조선의 전통이 아닙니다. 둘째, 그것은 조선 이후에 생겼어야 하는데, 일제와 군부 정권, 즉 군사 문화의 일부입니다.
저에겐, 제가 믿고 있는 많은 가치관들이 옳은지 그른지 그 차원 내에서 평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생겨났고, 누구를 위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따져보는 것은 한결 쉬웠습니다. 이게 역사가 재미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예컨대, 동성동본금혼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건 좀더 지난한 일입니다. 제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로 심지어 그 옛날에 헌재가 위헌 취지를 밝혔)지만, 여전히 저쪽 편에 서서 해괴한 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 그러니까 국사 교과서에 나오듯 조선 후기 양반 비율이 급증했다거나, 과연 시골 고향 동네 XX Y씨 집촌에 제대로 된 저택은 두 채 뿐이라거나.. 이런 것들을 알고 나면, 좀더 쉽게 동성동본금혼법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는 것들은 재미가 적습니다. "좌빨"이지만 불필요한 논쟁으로 아까운 시간 낭비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예민한 주제는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작금 이슈가 되고 있는 모든 문제, 그 어느 하나도 역사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 역사를 이해할 때, 소위 보수적인 입장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유지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든 좋습니다. 프로이드는 어린 아이들의 지적 요구란 사실 사랑받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사랑받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알고자 하는 욕구는 거창하고 고상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것이며, 생물학적인 것은 예술이 그런 것처럼 맹목적인 본능이 아니라 다분히 문화적인 표현의 원형인 것 같습니다. 역사는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렇기에 재미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역사가 그토록 재미없게 가르쳐진 것은, 어쩌면, 그간 역사 교육을 조직해 왔던 무리들이 "뒤가 구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반쯤 진지하게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명시적으로 왜곡된 내용을 주입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악스런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 사람들에게 세상을 대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집어넣어 주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였구나, 하는 생각이 요즈음은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