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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7/03/10 01:44:27 |
Name |
The xian |
Subject |
E-Sport가 무너진다면, 게임계의 미래도 없다고 봅니다. |
제가 작금의 사태를 걱정하고 있는, 다른 PgR인과 공통적인 이유는 저 자신이 E-Sport 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는, 제가 몇 개의 글에서 계속적으로 밝혔듯 저는 '게임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게임을 하는 게 취미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으니 게임을 직업으로 삼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글도 돈 받고 가끔 씁니다.
(단... 제 전공은 게임이 아닙니다. 세라믹공학이죠. 정상적으로 학교도 나왔고, 연구도 했습니다. IMF가 다 망치기는 했지만요.)
처음 E-Sport가 태동했을 때에 게임계 내에서는 반기는 인식도 있었지만, 미덥지 못하다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게임은 스포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일반인들 뿐만이 아니라 소위 '업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년에도 몇백 개씩 피고 지는 게임이, 그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 및 업계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아니라
'프로게이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관심을 가지는 것들을 못마땅해하는 업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프로게이머 상무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최근에 임요환 선수를 중심으로 공군팀이 창설되었을 때
그런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고 어떻게 보면 자기 밥그릇 챙기는 소리겠지만,
정말 못할 말로 "그저 게임이나 하는 프로게이머들에게 저런 뒷받침 해주는 것보다, 게임산업을 육성시킬려면
게임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병역특례가 더 늘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스타크래프트가 뭐 잘났다고?"라는 말도
게임산업에 종사하는 이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온 것도 사실입니다.
예. 물론 저는 이런 말에 대해 반대합니다. 게임이 더 알려지려면 '보는 사업'도 발전하고, 게임을 '만들고 파는 사업'도
발전해야 쌍끌이가 되고, 그래서 게임업의 위상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데 넓게 보면 같은 게임 업종에서
그런 거 가지고 날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바다이야기' 같은 망나니 짓거리만 없다면 말이죠.
그러나 사실, 게임을 만들고 팔아먹는 일은 노동 강도가 높고, 임금은 소수를 빼고는 짜고, 일자리는 늘 부족합니다.
거기에 병역특례제도의 잦은 변경으로 병역특례 얻기가 이젠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겠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폐인 비슷하게 찌들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참고로 이수인님이 펴낸 '게임회사 이야기'라는 만화를 읽어 보시면 제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업계인들은 정상적인 직장인 취급을 잘 못 받습니다. 실제 대우도, 사회적 인식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 다른 동종 업계인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 바다이야기 파문에도 불구하고 게임 업계인들을 이제
'정상적인 직장인'들로 좀 생각하려고 하는 기류가 얼마 전부터 조금씩 형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것이 산업의 형태를 거쳐 가면서 발전해 가는 이유도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 물론 많이 철수하기도, 물러나기도 하지만 - 게임에 투자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Sport 역시 그러한 긍정적인 요인 중 하나입니다. 특히 게임과 생활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 있어서는,
게임이 '나쁜 물건', '악마의 도구'가 아니라 일반 장난감들처럼 '친숙한 도구'가 되도록 친근한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데에 있어서는 E-Sport와 게임방송만큼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례로 원희룡 의원 같은 이들이 결승전에 나와서 축사도 하고 인사도 하는 것을 보면 잘 모르던 사람들은 E-Sport나 게임이
'그냥 오락인 줄 알았더니 저런 국회의원들도 인정하는 스포츠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믿어지진 않으시겠지만, 실제로요.
그런데 지금 E-Sport 판의 분위기는...... 완전히 개판 오분전입니다. 정치판의 진흙탕 싸움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미 다른 스포츠에서 정치화된 협회 지도자, 임원, 정치화된 구단의 행태를 비난하고, 그런 스포츠에 환멸을 느끼고,
어떤 이는 정을 끊지 못해서 보기는 보지만 욕하면서 보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관심을 끊어 버리는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고 PgR에서조차 그런 스포츠 팬들끼리 언쟁이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언론조작의 의심이 가는 일들이 일어나고 방송사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KeSPA의 모습에 분개하는 것은
다른 스포츠의 예를 들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게임업계로 따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게임업계를 뒤흔들어 버린 정치판으로 비화된 '바다이야기'의 상흔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E-Sport가 다시 정치판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의욕 상실은 기본입니다.
이미 E-Sport가 가졌던 좋은 이미지들은 상당 부분 큰 상처를 입었고 설령 여기에서 잘 매조지된다 해도 그런 상흔은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게임계 역시 E-Sport의 흐름에 따라 그 좋은 이미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가지고 시장에 나가게 됩니다. 더욱이 게임 방송사의 입지가 좁아지거나 유명무실해지게 되면, 수많은 게임들이 난립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의 게임들이 전파 한 번 타 보지도 못하고 묻히거나, 잊혀져 버리는 일도 생기고 맙니다.
이렇게 E-Sport가 파국을 맞든 말든, 한쪽이 상처투성이가 되든 말든, 협회의 정치논리대로 그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결국 게임업계에 대한 이미지 역시 점점 다른 산업에 비해 묻혀지게 되고, 선전할 수단도 없어지게 되며,
게임이 진정 문화로서 자리잡고 건전한 놀이로서 자리잡는 날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팬으로서만 이 곳을 찾는 분들과 달리, E-Sport를 팬심만으로 좋아할 수 없는 제 처지가 여러분들께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그러나 팬심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말했던 말처럼 저는 E-Sport가 지금과 같은 길을 걷는 게 너무도 안타깝고
너무도 원통한 이유가 있습니다. 게임 사업이라는 것의 특성이 그렇다 보니 정치 논리는 필수 불가결할지 모르나,
돈과 권력밖에 모르는 자들의 정치논리로 인해 저의 꿈과, 인생과, 젊은 날을 바친 게임업계가, 그리고 저의 미래가
다시 이전처럼 음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고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광경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임업계. 몇 년 전부터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의 품질을 따라잡기는 요원하다는 말이 나오고,
중국에 회사가 먹히고 게임 소스가 해킹 당하다 못해 이제는 게임에서 따라잡힌다는 소리가 슬슬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E-Sport까지 무너지면, 제가 보는 게임계의 시계(視界)는.
제로입니다.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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