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편을 보셔야 본편을 이해하 실수 있습니다. 링크는 따로 달지 않겠습니다. 너무 많아서
대신 제 이름으로 검색을 해주세요.
본 단편 뿐 아니라 전작인 디링디링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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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이와 만나 당구비 내기로 한 판을 벌렸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현중이를 이겼지만,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계산을 녀석이 하기로 했고 연주까지 초대해버린 것을 고려해 당구비는 내가 냈다.
“그나저나 연주가 사석에서 술을 먹다니 처음 보는 일이네요.” 당구장에서 나오며 현중이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확실히 나도 그 말에 전적
으로 동의한다. 복학 이후 연주와 친해지고 나서 꽤 여러 번 같이 사석에서 술을 먹자고 해봤지만 그때마다 아르바이트가 있다거나 몸 상태가 나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연주는 공식적인 행사나 특정한 모임의 술자리가 아니고서는 같이 대작하기 힘든 사람 중 하나였다.
“무슨 일 있는 걸까요?”
“모르지. 있으면 술 마시면서 얘기할지도 모르겠고.”
내 말에 현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실래요?”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두 발을 멈추고 골목어귀에서 멈춰 선다. 생각해보니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걷고 있었다.
“지금 너 가는 데로 나 따라가고 있는 거였는데?”
“예? 저는 지금 형 가시는 데로 따라가는 중이었는데요?”
순간 서로를 벙쪄 바라보던 우리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게.”
그렇게 키득대다가 어둑한 하늘에 어스름하게 모인 먹구름을 보자마자 행선지를 결정했다.
“어차피 아까 막걸리 마시기로 했잖아? 비도 올 것 같은데 막걸리나 한 잔 하자고.”
“그럼 생생 막걸리로 가시죠. 거기 안주가 제일 맛있는데.”
척하면 척. 이럴 때는 마음이 잘도 맞아 떨어진다. 가는 도중에 연주한테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오라고 연락을 넣었다.
먼저 ‘생생 막걸리’집에 도착한 우리는 창가 쪽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초저녁임에도 ‘생생 막걸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만큼 이 집은 우리 학교 근처 막걸리 집중에 유명한 편이다. 가깝고 가격도 싸고 안주의 맛과 양도 괜찮았다.
“막걸리 상으로 괜찮죠?”
끄덕.
현중이가 메뉴판은 살피지도 않고 주문 버튼을 눌렀다. 막걸리 상은 여러 전과 함께 막걸리 한 사발이 같이 나오는 일종의 세트 메뉴다. 가장 많이들 찾는 메뉴인만큼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 다양한 전 안주가 제공됐다.
주문 한 지 몇 분이 지나자 술과 안주가 차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현중이와 나는 서로의 잔에 술을 채우고 시원하게 목부터 축였다. 달짝지근하면서 쓴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크아. 좋다. 이런 자리에서는 역시 여자 얘기죠!”
단숨에 한 잔을 비워낸 현중이가 특유의 까불 하면서도 익살스런 표정으로 운을 뗐다. 참 이런 점 때문에 녀석과는 만나서 술을 마시는 재미가 있다.
“형은 이번에 신입생들 중에 누가 제일 괜찮은 것 같아요?”
피식.
마치 약장수나 이야기꾼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겨 절로 미소 지어졌다.
“오! 웃으시는 거 보니까 마음에 든 애라도 있는 모양이네요?”
아니 그냥 너 하는 게 웃겨서. 그러나 속마음은 쏙 숨기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중이 녀석이 알아서 재밌고, 유익한 정보를 알아서 쏟아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 역시 형이 마음에 들어할만한 신입생이라면... 역시 첫 번째 용의자는 효신이겠죠?”
이번에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단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녀석의 얘기를 들을 뿐이다.
“효신이가 지금 새내기 중에서 인기절정이죠. 연예인 한효주 닮은 외모에 활달하고 싹싹한 성격에. 동기 선배 가릴 것 없이 노리는 애들이 엄청 많아요.”
“걔가 그렇게 인기가 많아?”
물론 많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실제로 직접 만나서 술도 한 잔 해본만큼 얼굴도 자세히 봤고, 성격도 대충이지만 겪어봤다. 그럼에도 이렇게 맞장구를 쳐줄 필요가 있다. 그럼 현중이는 더욱 신나서 재밌는 얘기를 쏟아내니까.
“아우. 말도 마세요. 지금 벌써 차인 놈만 승용차 좌석 수니까요. 큼큼.”
갈증을 느낀다는 큼큼거리는 녀석의 잔을 채워준다. 잔을 받은 현중이는 다시 한 번 말끔하고 시원하게 막걸리를 비운다.
“그래서 효신이를 둘러싼 초유의 관심사가 그거에요. 아무래도 과 역사상 몇 년에 한 번 나올법한 이 미녀가 누구와 사귈지. 또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
“그래?”
빙그레 웃으며 자작한다. 막걸리는 자작이 제 맛이라며 예전부터 현중이에게 말했었기 때문에 현중이도 딱히 자작에 대한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막걸리만큼은 자작을 하든 따라주는 것을 받든 자유다.
“흠. 형 반응을 보니까 효신이는 아니네요. 그럼 주다민? 걔는 어때요?”
주다민이라.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나는 것 같다. 학기 초 술자리에서 보기도 했었고. 오며가며 인사성이 밝아서 괜찮은 신입생이라고 생각한 애였다.
“솔직히 효신이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민이가 진짜 진흙 속의 진주라고요.”
“왜?”
“제가 다민이랑은 좀 친하거든요. 수수하게 안 꾸몄는데도 그 정도 외모에 착한 성격까지. 몇 년 지나면 효신이보다 다민이가 더 예뻐질지도 모르죠.”
현중이는 마치 천기누설이라도 하는 듯, 다민이가 더 예뻐질지도 모른 다는 부분에서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작게 소곤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풉.”
“흐음.”
웃음과 동시에 튀어나간 침이 녀석의 얼굴에 튀겼는지 현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티슈 한 장을 집어 얼굴을 닦았다.
“형 생각보다 까다로우신데요? 효신이도 다민이도 아니면...”
다른 용의자가 또 있는 모양이다.
“헐. 설마? 류하얀이에요?”
류하얀이 누구지. 안타깝게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하얀이란 아이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하얀이가 과 생활을 잘 안 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긴 한데, 아는 애들 중에서는 벌써 하얀이 한테 홀린 애들이 한 둘이 아니죠.”
4학년에 접어들어 과 생활이 뜸해진 나로서 과 생활을 잘 안하는 여자애를 기억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얼굴은 솔직히 효신이나 다민이한테 부족할지 모르지만 하얀이가 그게 그렇게...”
꿀꺽.
다시 한 번 내게로 현중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러운 듯이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조심히 입을 내 귀로 가져다 댔다.
“뭔데?”
누군지도 모르는 신입생 얘기였지만 워낙에 현중이가 말을 재밌게 하는 턱에 궁금증이 생겨버렸다. 그 때.
“둘이 뭐해요?”
“헉!”
“어 왔어?”
현중이는 귀신이라도 본 마냥 화들짝 놀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떨어졌다. 야, 네가 그러면 더 이상하다고. 마치 우리가 서로 막 사주는 그런 사이처럼 비춰지잖아. 빨리 해명해. 눈빛으로 현중이에게 내 뜻을 전한다.
“크흠흠. 남자들끼리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
“무슨 중요한 얘기 길래 그렇게 밀착해서?”
연주는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이상하다는 얼굴로 현중이를 쏘아보았다.
“하하하. 그런 게 있어.”
삐질 땀을 흘리는 걸 보니 아주 천적이 따로 없다.
“또 여자얘기하고 있었지?”
아예 담담한 연주의 표정을 보니 의심도 아니고 확신하는 것 같다. 확실히 동기에 친한 만큼 더 쉽게 꿰뚫림 당하는 건가.
“아냐. 여자 얘기라니!”
“그래 아니면 다행이고. 설마 어제 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루 만에 그럴 리 없지. 약속 어기면... 뭐 잘 알지?”
“그럼. 잘 알지. 하하하.”
약속?
“무슨 약속?”
문득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연주에게 물었다. 연주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어제 현중이 헛소리 때문에 선배한테 실례했잖아요. 그래서 말했죠. 어디서 당분간 그 놈의 여자 얘기 좀 하고 다니지 말라고요. 하고 다니면 해주기로 했던 소개팅이고 뭐고 다 없다고. 근데 선배 얘가 진짜 여자얘기 한 거 아니에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루온 같은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연주는 현중이가 여자 얘기를 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기에 넘어가준다는 것을.
현중이는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듯 내게 도움의 눈길을 반짝이고 있었다. 무지하고 멍청한 녀석! 순간 불쌍하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이렇게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당하며 연주에게 압도당하고 있었구나. 솔직히 아주 조금 동병상련의 마음도 들었다. 소희에게 당하는 내가 그랬으니까. 단지 차이라면 나에게는 채찍과 채찍만이 있어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