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제 3군 사령관이자 아라스 전투의 1차 책임자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
아라스에서 모습 때문에 졸장이 이미지가 생길 수 있지만 그는 훗날 오스만 투르크를 멸망시킨
장군이 됩니다.
1. 영국군의 작전 준비
아라스 전투 1차 국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아라스 동남부에 있는 캉브레에 진출할 수 있냐 없냐 였습니다.
이를 위해 앨런비가 추구했던 건 작년 솜므 전투에 대한 반성이었죠.
솜므의 삽질을 안하기 위해서는 장군들도 잘해야 했지만 보급 부분에 혁신이 필요했습니다.
솜므 때 영국은 거의 병력만 가져다 놓고 재반 병과 포의 숫자나 포탄 종류, 전술, 전략 모두 부족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 포를 미치듯이 쏜다. 그런 적이 죽겠지. 그럼 우리는 그냥 걸어가면 될거야 라는 개념이 작전을 펼쳤던 것이었습니다.
장군들 입장에서는 그거라도 걸려라였던 거죠.
하지만 그 결과 수많은 시체더미를 얻어야 했으며. 그냥 쏴서는 적은 안죽는다 라는 결론을 얻었죠.
참 훌륭한 마인드라고 봅니다. 해봐야 아는 인간들이니 말이죠. 물론 수업료는 영국군 단독 70만의 사상자였다는게 문제였지만요.
아라스에서는 이 70만을 재물로 바친 결과 알아낸 사실
1. 포를 쏠 때 대규모로 시간표에 맞추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쏴라....
2. 저지대는 땅에 습기가 많아서 충격 신관 가지고는 그냥 땅에 박힌다. 순발시간(작은 충격에도 폭발하는 신관)이나 시한 신관을
쓰는게 몸에 편하다.
을 적용합니다.
거기에 더해 고대로 부터 내려운 신묘한 전술까지 동원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땅굴전술]이었습니다. 땅굴을 파서 적 참호선 바로 앞에서 부터 공격을 시작한다는 개념이었는데 물론
효용성은 있었지만 이게 전쟁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영국군은 아라스에서 솜므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로 싸웠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2. 앗싸 '영국군 대승리'
4월의 '눈'내리는 악천우 끝에 앨런비는 초전에 대 성과를 거둡니다. 무려 첫번째 공세로 무려 5km를 앞으로 나갈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하루에 말이죠. 솜므에 비하면 대성과였고.... 바로 다음해인 1918년 상황을 빼면은 그 전의 정말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1914년을 제외하고는 서부전선 하루 최대 진격 거리였습니다. (...)
가장 큰 성과는 캐나다 군이 비미 능선을 확보했다는 것도 컸습니다. 무려 1만명 밖에 안 잃고 이 고지를 점령한거죠.(킬로당
2천명씩 죽고 다쳤다는게 이 시대의 대승리 기준)
하지만 문제는 앨런비의 3군을 보조해줄 영국 5군(사령관 고프 대장)의 속도였습니다. 고프는 전쟁 내내 도대체 왜 이장군이
현역을 지키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이 전투 역시 아주
실망스러운 진격 속도를 자랑합니다.(이런 흔히 정치 군인이라고 하죠. 정치력으로 자리를 지키는 부류)
고프는 오스트렐리아군을 미트 실드(모 오스트렐리아 여단은 사상률 80%에 육박) 삼아 진격했지만 성과는 '망'에 가까운지라
앨런비의 3군만 유득히 돌출된 상황을 초래해야 했습니다. 호주군의 고프에 대한 증오는 덤으로 하고도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영국군이 당해야 할 일은 명확했습니다. 한쪽만 튀어 나왔으니 그곳만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아야죠.
3. 독일군의 대응
독일군 6군 참모장 폰 로스베르크는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영국군 포병은 독일군이 파괴한 도로 위를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영국군 3군은 너무 돌출되어 있다.란 사실 말이죠.
이를 간파한 로스베르크는 소모전을 펼쳐 영국군 3군의 공세를 좌절시켰습니다.
물론 상대방인 앨런비도 더 이상 공세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공세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니벨'이 곧 대공세를 펼칠 상황이었기에 조공으로서 본래 목적을 달성해야 하려면
[부하들을 무의미하게 죽이며 공세를 지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