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심야 완행열차의 낡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조명의 절반이 꺼진 객차 안은 어두침침했다. 승객들 대부분은 잠에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깨어있는 사람은 남자뿐이었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열한시 오십팔 분이었다. 남자는 잠자코 기다렸다. 시침이 오십구 분을 가리켰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열두 시로 넘어갔다.
드르륵. 객차 뒤쪽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간식거리를 판매하는 카트의 바퀴가 묵직하게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트는 남자를 지나쳐 객차 앞쪽으로 갔다. 유니폼을 입은 머리 긴 여자가 카트를 밀고 있었다. 이윽고 객차 끝에 도착한 여자는 문을 열고 다음 객차로 넘어갔다. 문이 닫히고 여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히 여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여자는 완만한 속도로 카트를 밀면서 객차 중앙의 복도를 나아가고 있었다. 승객 대부분이 잠든 객차 안에서 여자를 불러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도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한 채 걸었다. 카트는 다시 객차 끝에 도달했다. 그 건너편은 일반 객차가 아니라 기관차였다. 하지만 여자는 망설임 없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를 쫓던 남자는 문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렸다. 잠시 후, 남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기관차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가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남자는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복도를 막고 있는 카트를 뛰어넘어 여자 앞을 가로막았다. 비명을 지르던 열차 차장이 기겁하며 남자를 쳐다보더니 여자를 손가락질하며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거, 귀......”
“귀신이란 말이지. 알고 있다.”
남자는 냉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여자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할 정도였고 양 눈에서 두 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마의 절반이 짓뭉개져 뇌수가 보일 지경이었다. 앞으로 올린 두 팔은 금방이라도 차장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기세였다.
저자가 나를 죽였어
여자는 공허하게 외쳤다. 그러나 남자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안다. 허나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야 하는 것이 법도. 그래서 데리러 왔다.”
남자는 품속에서 검은 색 책자를 꺼내 펴들었다. 그리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이름. 이난희. 나이. 스물일곱. 직업. 기차 승무원. 사인(死因). 자살로 오인되었으나 실은 불륜 관계인 애인과 다투던 중 상대가 열차에서 떠미는 바람에 추락사. 사망시각. 이틀 전 오후 열 한 시 이십칠 분 사십사 초.”
남자가 읽는 것을 마침과 동시에 여자는 스러지듯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책을 덮고 잠시 동안 여자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차장이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저승사자다.”
“예? 세상에 맙소사...... 그런 게 정말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덕분에 살았습니다.”
차장은 다소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저어, 아까 말씀하신 그......”
겸연쩍게 눈치를 보던 차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가차 없이 차장의 말을 끊었다.
“가자.”
“예?”
“너도 명부(名簿)에 있다.”
남자는 다시 검은 책을 폈다. 차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가 상황을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름. 김기현. 나이. 마흔셋. 직업. 기차 차장. 사인. 죽은 애인의 귀신을 보는 순간 극도의 공포에 의해 심장마비로 사망. 사망시각은......”
남자는 손목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차장을 보더니 입술 끄트머리를 치켜 올렸다.
“삼 분 이십 초 전.”
기차는 어둠을 헤치고 선로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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