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4회차네요.
이번 회도 재밌게 읽어주세요. 디링디링과는 다르게 꾸준한 반응으로 글쓰는 게 더욱 재밌네요.
1 :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45806
2 :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45826&sn1=on&divpage=8&sn=on&keyword=aura
3: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45849
안 읽으신 분들은 지난 화를 읽어주세요.
- - -
##
일 때문인지 그녀는 뒤로 머리를 묶고 카페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그런 수수한 차림조차 굉장히 예쁘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다.
“선배!”
나를 부르는 소리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연주는 ‘약을 잘못 먹었나?’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에 손을 휙휙 젓고 있었다.
“응?”
“또 멍 때렸죠?”
“아 미안. 가서 앉자.”
나는 못내 아쉬웠지만, 개인적인 흑심을 연주에게 들킬까 걱정되어 몸을 돌려 카운터가 보이는 근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따가워 딴청을 피운다. 그러니까... 마주치면 속마음이 들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과제는 잘하고 있어요?”
아 맞다! 순간 아차 싶었다. 주찬이 녀석이랑 옴팡 술을 마셔버린 덕분에 아직 하나도 손을 못 댔다. 하나도 안 했다고 하면 혼나겠지...?
“그럼, 잘하고 있지.”
“정말이죠?”
연주는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살핀다. 얘는 눈을 마주치면 내 생각을 꿰뚫어버릴 것 같단 말이지.
“주문하신 프라푸치노,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잠깐 기다려 가져올게.”
때마침 카페의 그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학교로 오는 동안 지하철에서 있었던 실례가 갑자기 떠올랐다. 눈이 마주치려던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커피를 가져왔다. 너그럽게 용서도 받은 일이지만, 아직 스스로 죄를 지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거 맞지?”
나는 자연스럽게 프라푸치노 잔을 연주에게 건넸다.
“네. 잘 먹을게요. 선배.”
그래 잘 먹어야지. 그게 얼마짜린데.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연주를 따라 나도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크 쓰다.
“선배는 근데 맨날 아메리카노네요? 다른 건 싫어해요?”
“뭐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고.”
생각해보니 혼자서 카페에 올 때도 아메리카노만 마신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가격적인 문제 때문에 아메리카노만 먹는 건 아니었다. 뭐랄까, 이 씁쓸한 맛에 중독됐다는 표현이 맞겠지?
“아메리카노가 제일 맛있어.”
“크, 역시 굉장히 늙은 입맛이네요.”
연주는 내 대답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얘는 맨날 툭하면 늙었다고 놀려. 지도 스물 셋이면 절대 어린 나이가 아닌데.
“어른스러운 입맛이라고 해줄래?”
“네네. 뭐. 아 근데 진짜 과제 잘 하고 있죠?”
으악! 끈질기다. 굉장히 속이 뜨끔했지만, 당황하고 무너질 내가 아니지.
“그, 그럼! 네가 늙은이라고 배려해서 최소한 할 것만 줬는데 이것도 안하면 사람이 아니지!”
“헤에, 잘 아시네요 선배.”
내 대답에 연주는 씩 웃었다. 거 참 미안합니다. 사람이 아니라서. 분명 전생에 마녀였을 거야. 그것도 악질적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는 마녀!
“뭐 그래도 아직 일주일 정도 시간 남았으니까 천천히 해요.”
연주는 웃으며, 토닥이듯 말했지만, 내 귀에는 전혀 다른 말로 들려왔다. 시간 남았다고 농땡이 치지 말고 미리미리 해놔요. 검사할거니까.
오늘 집에 가자마자 과제부터 해야겠다.
스마트폰을 꺼내 대충 오늘 하루의 스케줄을 살폈다. 수업은 여섯시에 끝나니까, 대충 집에 도착하면 일곱 시 안팎이겠군.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들자 연주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을 꺼내 만졌다. 양손을 열심히 꼼지락 대는 걸로 봐서는 열심히 밀린 톡이라도 보내는 모양인 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연주는 아마 꽤 인기가 많을 거다. 과내에서는 털털하고, 싹싹한 선배 후배로 유명하고, 솔직히 외모도 꽤 귀여우니까. 이런 마녀 같은 면모는 나처럼 친한 몇몇만이 알고 있겠지. 내가 어쩌다 이 녀석이랑 친해져가지고.
“선배.”
“응?”
“은성이 여기로 온다는데 와도 괜찮죠?”
뭐 커피 값만 지가 내면 무슨 상관이랴. 뭐 연주만큼은 아니지만, 은성이랑도 나름 친하기도 하고 불편할 게 없었다.
“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5분 정도 뒤에 은성이 녀석이 카페로 들어섰다.
“여기야.”
연주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응 안녕.”
은성이는 여자치곤 꽤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네고는 연주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뭐 마실래?”
“음, 레몬에이드로?”
“잠깐 기다려.”
은성이의 주문에 연주는 자신의 지갑을 꺼내들고 카운터로 향한다.
잠깐. 지연주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음료수를 사주다니!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연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니 돈 있고, 친구 음료까지 사줄 정도인데, 지금 가난한 고학년의 고혈을 빨아 먹고 있는 거냐!
“얼마 전에 저한테 돈을 쫌 꿨더니, 잘해주네요.”
은성이는 마치 독심술이라도 하는 듯 내게 말했다.
“응? 그래?”
얼마나 꿔줘야 저 마녀가 이렇게 친절할 수 있는 거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말을 꾹 눌러 참는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연주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 그런데 오빠 이번에 술자리 와요?”
그러고 보니 이번 주 금요일이었던가. 크게 과 술자리를 벌인댔지. 나는 은성이의 말에 순간 고민에 빠졌다. 금요일에는 공강이었기 때문이다.
“왠만하면 좀 나와요. 자 여기.”
“응?”
연주는 어느새 주문받아온 레몬에이드를 은성이에게 주며, 말했다.
“금요일 공강이라 귀찮은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선배 행세해요? 또 젊은 애들도 만나서 술 한 잔하고 얼마나 좋아요?”
허허, 저기 연주야? 너 나랑 두 살밖에 차이 안나요. 그리고 새내기 입장에서는 너도 늙은이거든. 콱 대들어버리고 싶지만, 착한 내가 참는다.
“뭐 그렇긴 한데.”
“주찬 오빠랑 같이 와요. 현우 오빠.”
은성이가 눈을 반짝이며 애원하듯 지원 사격한다. 내가 참 이러면 사람이 좋아서 못이기는 척 넘어간단 말이지. 얘들은 내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서운 녀석들.
“한 번 주찬이한테도 연락해보고. 걔가면 나도 갈게.”
“무슨 둘이 결혼했어요? 주찬 선배가 와야 선배도 오게?”
“알았어. 간다 가.”
끈질긴 연주의 추궁에 승낙해버린다. 하긴 좋아하는 술 마시러가는데 나쁠 것도 없지 싶다. 이왕 가는 거 함주찬 녀석도 꼭 데려가야겠다. 혼자가면 뻘쭘하니까.
내친김에 주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야.
답장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던 모양인지 바로 답장이 왔다. 흐흐 미안하지만 같이 가줘야겠어.
-- 왜?
- 금요일에 과 술자리 있는 거 알지? 가자.
-- 뭔 이 나이 먹고 거길 가려고해? 신입들 사이에 낀 부장님이라도 되고 싶냐.
요새 참 내 주변인들이 말을 너무 예쁘게 하는 것 같다. 허허.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에게 달라붙었다.
- 야 이번 아니면, 또 언제 둘이서 이런 공적인 술자리에 가겠냐. 너 아프리카 갖다오면, 난 졸업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함주찬! 넌 그런 녀석이잖아.
-- 알았다.
다행이다. 버림받지 않아서.
“주찬이도 간데.”
“진짜요!?”
내 말에 은성이가 놀란 듯이 외쳤다. 얘는 주찬이 온다는데 지가 난리야?
“응.”
“와, 주찬 오빠 이런 술자리 온다는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요. 재밌겠다.”
하긴, 요즘에는 내가 청하는 술자리도 마다하던 녀석이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느낌이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지? 학교 밖으로 나와서 카페에 온 만큼 다시 강의를 들으러 가려면 여유롭게 미리 출발하는 게 좋을 텐데.
“지금 몇 시야?”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있는 연주에게 물었다.
“음, 한 시 이십 분쯤 됐네요.”
어차피 은성이도 있으니 이만 슬슬 가야겠다.
“나 먼저 가볼게. 두 시 수업이니까. 너희 더 있을 거야?”
“네, 세 잔이나 시켰는데, 한 시간만 있다가긴 그렇잖아요.”
하 여자들이란. 넉 잔 시키면 아주 카페에 눌러 살지도 모르겠다.
“갈게.”
“가요. 선배.”
“안녕히 가세요.”
둘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카운터를 지나치며, 슬쩍 그녀를 훔쳐본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 없이 둥글고 큰 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정말 내 이상형 중에 이상형이다. 진짜 미친 척 하고, 번호라도 물어볼까?
이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섰다. 아직은, 오늘은 무리다.
-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