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이글루스가 점검 중이군요. 흥미로운 고고학 발표가 (예전에) 있었다는군요. 길림 대학에서 요서의 어느 지방에 유적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나온 유골이 한국인과 제일 비슷했답니다. 다른 쪽으로 보기에는 부여 지방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했다고 하고... 글을 쓰신 번동아제(신재호)님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거나 연구가 한 단계 진척된 걸로 나름 객관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부여가 이런데 고구려 건 볼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라고 설레고 있다는 걸 인증 (...); 재밌는 글이었습니다. 점검 끝나면 추가하죠. http://lyuen.egloos.com/5577997
추가~
추가했다지만 짤방 추가한 것일 뿐입니다 ( ..);
조별 과제가 있는데 읽는 책 이름이 다중, 뭘까요 이건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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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수왕
장수왕은 말 그대로 장수했습니다. =_= 한자 표기도 장수입니다. 뭐 불교 쪽이랑도 연결되지만요. 아무래도 아버지 광개토대왕에 비해 실망할 수밖에 없겠죠. :) 그러고보니 광개토대왕 때 이후로 삼국사기에 표시되는 고구려 왕의 호칭이 바뀌긴 하네요.
그의 시대에 주로 보이는 것은 북이 조공 남송 조공 북위 조공 북위조공 북위 조공...... 이렇게 해서 붙은 별명이 조공왕이죠. (...) 광개토대왕의 남정이 광개토대왕비에야 나타나는 것처럼 이 때 고구려에 관련된 기록이 정말 없었나 봅니다. 중국 기록 복붙했겠죠. 반대로 보면 그 정도로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지위를 확립시켰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의 주요 업적이라 할 만한 건, 대륙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까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거겠죠. 그리고 참 없습니다. 이십구년부터 사십삼년까지, 십사년간의 기록이 부재합니다. 뭐 이런 거야 삼국사기에 흔한 거긴 하지만, 그 이후가 조금 다르죠. 스무살에 왕위에 올라 예순살에 이르기까지 남방 정책에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되면 할 생각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 이유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그가 마흔 살, 재위 이십년쯤에 있었던 북연의 멸망 과정입니다. 여기에 신경 쓰는 동안 남방에 신경쓰기는 힘들었겠죠. 허나 그렇게 생각해도 좀 이상해요. 너무 안 한단 말이죠.
기록의 부재일 가능성이 제일 크겠지만, 그의 재위 20~40년 사이에 뭔가 다른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98세까지 살았다는 그, 너무 오래 살았는데다 문자명왕이 그의 아들 조다(그 이름에서 쪼다가 나왔다는 도시전설이 있습니다)가 아닌 손자였죠. 장수왕이 늙은 다음에 고구려에서 권력 싸움이 있었고, 그 사이를 백제와 신라가 찌른 게 아닐까 하는 것이죠. 너무 나갔다는 느낌이 있지만...
흔히 장수왕의 남방 정책의 대표로 나오는 중원 고구려비, 현재는 이게 세워진 시기를 449년으로 보는데, 좀 이상한 게 사실입니다. 위의 가설로 신라와 백제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졌고 그걸 다시 강조하기 위해 세운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이 시기 들어서야 제대로 남쪽을 먹으려고 했고, 이 비가 그 증거이며 그 때문에 신라와 백제가 제대로 반발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뭐 자세한 건 몰라요 ^_^)~
아무튼, 그가 남방정책을 편 건 꽤나 늦은 시점으로 그마저 선공이 아닌 신라와 백제에서 먼저 터뜨렸죠.
2. 눌지 마립간
450년, 장수왕 삼십팔년에 신라에서 큰 일이 벌어집니다. 하슬라, 현 강릉 성주 삼직이 실직, 현 삼척에서 고구려 장수를 죽인 거죠. 삼국사절요에는 440년대로 나와 있기도 한데 삼국사기에는 50년으로 나온 걸로 봐서 이 때가 맞는 것 같습니다. 어이 없는 사건인데, 눌지 이사금이 한 걸 보면 고의일 수도 있단 말이죠.
내물 이사금은 고구려에 복속된 것 때문에 시름 속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건 고구려에 인질로 갔던 실성이었죠. 정작 내물 이사금의 아들 눌지는 무시됐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실성은 눌지의 동생 복호를 고구려로, 미사흔을 왜로 인질로 보냅니다. 거기에 눌지 자신도 고구려에 보냈죠.
이런 굴욕 외교 가운데서 눌지가 돌아옵니다. 고구려의 힘을 업고 말이죠. 이 즈음을 고구려가 실성 대신에 눌지를 선택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돌아온 눌지는 오래 생각해왔던 일을 벌입니다. 고구려와 왜에 있던 복호와 미사흔을 데리고 온 것이죠.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박제상 설화입니다. 복호는 어떻게든 데려왔지만, 왜에 있던 미사흔을 데리러 오는 과정에서 박제상은 왜에 남게 됐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 한동안 왜가 신나게 쳐들어옵니다. 헌데 이런 과정에서 백제와는 화친을 하게 되고 동맹도 맺게 되죠. 나제 동맹의 탄생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의 장수를 죽인 건 계획적인 걸로도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반고구려 감정이 팽배한 가운데서 일어난 사고이고, 이 때다 싶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죠. 장수왕이 이에 분개해 병력을 보냅니다만... 격퇴됩니다. 고구려에 의한 신라 1차 멸망의 위기였죠. 삼국사기에서는 눌지 마립간이 꾸짖자 알아서 돌아갔다고 합니다만 그럴 리가요 (...)
이 때부터 왕명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죠.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3. 개로왕
그런 가운데서 백제가 일어납니다. 개로왕 전대의 비유왕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재밌죠. 한강에 흑룡이 나타나자 죽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떻게 죽은 걸까요? 검은색이 북방의 색이니 고구려에서 죽였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하죠. 이런 가운데서 왕이 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을 막으려 최선을 다 하고, 남송에 적극적으로 조공하면서 대립합니다. 기록이 없는 편이지만, 그가 아버지 비유왕의 유골을 수습한 게 무려 즉위 21년 때입니다. 백제의 배신자가 고구려에 투항하는 일도 있었구요.
450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백제 vs 고구려 사이에 큰 일이 벌어졌다는 증거이겠죠.
472년에 개로왕은 칼을 빼듭니다.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한 거죠. 뭐 북위가 고구려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장수왕의 강력한 어그로를 끌게 됩니다. -_-; 이 때 장수왕이 승려 도림을 보내 개로왕을 바둑 삼매경에 빠지게 했다고 합니다만 정말 그럴지는 의문이죠. 뭐 단순 첩자라 생각해도 가치는 있지만요.
475년, 장수왕은 3만 대군으로 남진, 백제는 7일만에 수도에 몰리게 됩니다. 고구려군은 4방면으로 포위해서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화공을 퍼부었고, 400년 한성백제의 수도는 마침내 무너집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은 이렇게 아들 문주를 도망시킨다음 싸웁니다. 아신왕의 뒤를 잇는 백제 안습의 왕, 개로왕의 최후가 가까워진 거죠. 물론 그 뒤를 이은 건 의자왕 -_-;
일주일만의 공성 끝에 겨우 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배신자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개로왕에게 절을 한 후 침을 세 번 뱉고 죄목을 따집니다. 아차성으로 끌려간 개로왕은 그렇게 목숨을 잃죠.
이 때 도망갔던 문주는 신라의 원군을 이끌고 옵니다만 이미 때는 늦었죠. 문제는 이 때 백제 남쪽 호족들의 원군이 없었다는 것 -_-... 백제의 상황을 짐작할 만 합니다.
4. 삼국 정립
이렇게 장수왕은 충청도 부근까지 백제를 강력하게 압박했고, 강원도 부근으로 신라를 강하게 압박합니다. 하지만 정복은 거기서 끝납니다. 신라의 경우 현 강릉 부근은 끝내 먹지 못 한 듯 합니다. 이 부근은 명주로 후삼국시대 초기까지도 신라의 강력한 신하로 남았죠. 궁예에 항복하기 전까지는요.
이런 점에서 광개토대왕이었으면 백제와 신라를 아예 먹었을까, 장수왕이 먹지 못 한 걸까 안 한 걸까로 생각이 나뉩니다만... 일단 제 결론은 처음에는 하지 않았다입니다.
장수왕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요동 쪽에도 계속 신경을 씁니다. 요서에 있던, 거란 서쪽의 지두우를 유연과 분할하려는 시도를 한 거죠. 이 부근은 말이 풍부했기에 개척자를 보내서... 아무튼 욕심이 났던 모양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이게 성공했다고 서술하지만 결과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시도는 했던 모양입니다. 내몽골 지역까지 고구려의 힘이 닿았다는 것이죠.
이런 점들을 볼 때 고구려의 양면전선의 문제는 계속됐고, 신라와 백제의 경우 복속으로만 안심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해가 되는 게, 당이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에 했던 것도 도독부, 도호부를 만들어 옛 왕족을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소고구려, 소백제라 하죠. 결국 신라에 밀려납니다만 당의 영토 확장은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당은 물론 중국의 영토는 지금보다 많이 줄어들어야 됩니다. -_-; 그 때 나라를 만들었던 것들이 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남아서 문제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도 이 정도에서 만족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가 되면 쳐 없애면 될 거라 여겼겠죠. 하지만 신라가 죽지 않았고, 더불어 백제도 일어나 버렸습니다. 백제의 기를 꺾는데는 성공했지만, 신라는 참 죽이기는 어려웠죠. 당하고 당하면서도 죽지 않는 신라의 불멸 전설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연개소문 때도 백제-고구려-말갈 연합군은 울산 부근까지 쳐들어가지만 결국 막혔었죠.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나제 동맹, 결국 이 곳을 영구 점령할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그 후에도 열심히 싸웁니다만 -_-; 결론을 내리자면 안 했다 -> 못 했다로 발전한 거라고 봐야겠죠.
아무리 고구려라도 이 둘을 같이 맞서게 될 줄은 몰랐었겠죠.
어쨌든 고구려는 한반도 남쪽에 온 전력을 쏟아부을 수 없었고, 북위와 거란 등의 문제에도 계속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뭐 안타깝지만... 여기까지였던 거죠. :) 이런 상황에서도 설마 백제가 되살아날까 했는데 실제로 일어나 버렸죠. 광개토대왕이 참 대단하긴 했던 것 같습니다. -_-a 하지만 그런 군주를 계속 바랄 순 없었겠죠.
고구려의 팽창은 이렇게 끝납니다. 뭐 그 후에도 고구려의 전성기라 할 만한 건 계속 이어집니다만, 그 힘을 외부로 발산하는 건 딱 거기까지였죠. 북위와의 사이도 나빠져서 계속 싸우게 되고, 남쪽의 나제동맹은 한강을 수복하려고 덤비구요. 기껏 온조왕이 꿀 발라놓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습니다만 그 땅을 온전히 쓰지 못 하고 싸움터가 돼 버렸으니...
5. 그 이후
고구려의 5세기를 대표하다시피하며 산 장수왕이 죽은 후, 문자명왕, 안장왕 등의 치세가 이어집니다. 안장왕 때는 한강 유역을 또 뺐고, (계속 싸우고 있었나 봅니다) 북연의 옛 수도 용성까지 쳐들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요서는 고구려가 심심할 때마다 쳐들어가는 앞마당이었던 것 같은데...
안원왕-양원왕 때 이르르면 고구려의 쇠퇴기가 시작되죠. 일본서기에는 이 때 추군과 세군이라는 파벌이 서로 싸웠다고 하구요. -_-; 거기다 유연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돌궐이 차지하면서 기나긴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때문에 남쪽은 더 생각하기 힘들게 돼 버렸죠. 이렇게 샌드위치가 다시 시작되면서 삼국은 혼란에 휩싸입니다.
백제에서는 동성왕-무령왕 때에 그렇게 그리던 전남지방 점령을 이루었고, 제 2의 도약을 하게 됩니다. 신라 역시 지증왕, 법흥왕에 이르면서 크게 발전했고, 그들을 이은 성왕과 진흥왕에 이르러 가야제국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죠. 이 때에 이르면 왜는 신라에 적수가 되지 않았고, 그저 백제와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이들이 한강 유역을 재점령하게 되는데... 이 무렵이 또 참 논란입니다. 신라가 뒷통수를 쳤다는 게 흔히 나오는데 참 여러가지 가설이 있어요. 이전부터 한강 유역을 재점령한 상태였다거나, 하긴 했는데 백제가 먹을 상황이 아니라서 신라에게 준 거라든가 (고구려에 대한 방패로 삼기 위해) 백제가 이미 동맹인 상황에서 신라를 치기도 했다든가, 애초에 신라는 구원군 꼬박꼬박 보냈는데 백제는 잘 지키지 않았다던가 아무튼 참 말이 많아서 뭐라 하기 힘드네요.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돌궐은 물론 중국의 남북조가 무너지면서 혼란이 계속돼서 고구려는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 때의 왕이 평원왕, 그 유명한 평강공주의 아버지입니다. 온달은 남북으로 열심히 싸우러 다녔다가 마침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신라는 진흥왕 때 함경도까지 진출하면서 기세를 올리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적으로 둔 상황에서 뒷감당은 참 어려웠고, 이후 쭉 수세로 일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구려도 거기에 신경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중국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고 어마어마한 힘을 고구려로 투사한 것이죠. 이 무렵 백제는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이 집권했고, 수나라에 열심히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찔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무서운 힘으로 이를 막아냈죠. 그리고 백제를 갈굽니다만, 고구려의 피해도 커서 그게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백제는 수에 이은 당에도 고구려를 찌를 것을 주문하는데, 이 때 신라가 당에 열심히 기대면서 신라를 치지 말라는 당의 명령에 거부, 고구려와 동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국제관계 참 재밌게 돌아가죠. 이렇게 돌궐-고구려-백제-왜라는 한 갈래와 당-신라라는 갈래가 만들어지고... 삼국시대의 끝이 다가옵니다.
무왕-의자왕을 이어 세번째 전성기를 이룩할 뻔 했던 백제는 중앙집권에 대한 갈등 가운데에서 신라가 친 치트키로 한 방에 망했고, 슈퍼파워를 100년 동안이나 막아내던 고구려는 끝내 무너졌으며, 신라는 그 가운데서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로 발돋움했습니다. 이후 발해와 신라가 각기 만주와 한반도에서 세력을 이루었죠.
김유신의 말대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기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기야!"
가 되는 거죠.
이렇게 근초고왕의 희망도, 광개토대왕의 전설도 끝났고 삼국시대도 끝이 나게 됩니다.
자... 광개토대왕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요?
주로 그 정복에만 신경 쓰는 게 현 상황이지만, 그 모습을 보면 참 합리적이었고 치밀했습니다. 마구 찌르고 다닌 게 아니라 확연한 방침이 있었고, 목표를 그대로 이루었죠. 내정에도 그리 실패한 것 같지 않구요. 장수왕이 그 뒷감당 하느라 참 힘들었겠습니다만... 정말 이런 군주가 한국사에 또 얼마나 있었을 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함께 대왕이라 불리는 유이한 왕이 된 거겠죠.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은 이런 느낌으로 다가올 겁니다.
대략 백제-가야-왜 연합군에게 포위당한 신라군 앞에 나타난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
이건 수나라에 평양 외성을 내준 후 반격하는 모습? ( ..)
뭐 그렇다 해도 이런 전설에 감동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시대가 어땠는지, 그의 생각이 어땠는지, 그 전후의 사정이 어떘는지를 잘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 로한의 저런 거대한 돌격에 곤도르와 로한의 오랜 관계, 사우론의 과거, 뭐 이런 배경 사정이 필요한 것처럼요. 뭔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되새겨보려고 글을 시작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신라의 백제 뒷통수치기는 고구려와 신라간의 밀약때문에 일어난일이라는 설도 있더군요.
즉 고구려가 돌궐의 침략때문에 한강유역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되자 오랜 동맹국이었던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치고, 대신 신라에게는 새로 얻은 영토를 인정해주는 밀약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앙숙이었던 백제보다는 신라가 상대하기 쉬워보여서 신라와 밀약을 맺었다는... 뭐 하나의 설일 뿐이지만 말이죠.